‘풀숲’이 된 덕림초등학교의 오랜 기억

 

▲덕림초등학교(폐교)

주산면에는 주산초등학교와 덕림초(주산면 덕림리 487-3), 석계초(주산면 백석리 579-7), 그리고 동정초(주산면 동정리 388)가 있었지만 현재는 주산초등학교만 남아 있고 나머지 학교들은 폐교가 되어 부지만 덜렁 남아 있다. 폐교된 덕림초등학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나 쉽지 않았다. 부안군지 및 40여 년 전에 발간된 옛 자료(부안 얼-1986) 등에서 덕림의 연혁을 찾고 졸업생과의 대화를 통해 이 글을 이어가고자 한다.

 

숲이 울창했다던 덕림(德林)에 생긴 국민학교

덕림리(德林里)는 숲이 울창했으므로 덕림(德林)이라 했다. 덕림 주변 마을 아이들은 주산국민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주산국민학교는 학생 수 과밀화(1957년 1817명, 1958년 1959명, 1959년 1905명)가 심하였다. 이에 학생 수 과밀화와 먼 거리 통학을 해소하기 위해 석계분교, 동정분교, 덕림분교 순으로 나눠 교육 시설이 생기게 되었다.

부안교육지원청을 기준으로 약 8km쯤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덕림초는 1만5125㎡의 면적의 학교로서 1965년 2월 9일 주산초등학교 덕림분교로 설립 인가 되어 1학년 2학급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1969년 3월 1일 6학년 편제 초등학교로 승격 인가되어 1969년 4월 18일에 개교하였다. 1969년 3월 3일 기준 남학생이 206명, 여학생이 194명으로 400여 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다녔다.

주산면의 동북단에 위치한 덕림국민학교의 학구(學區)는 정읍군 영원면과 부안군 백산면의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각각 20~30호 정도의 7개 마을이 대상이었다. 이 지역은 당시에 주업이 농사이고 교통이 불편해서 부모님이나 학생의 의지가 아니면 학교 다니기가 어려웠다. 개교 이전의 교육기관이라면 마을 단위로 사랑방을 이용하여 소규모 서당을 만들어 학구열에 의지가 있는 소수의 학생들에게 초보적인 한문 습득을 시킬 뿐이었다.

▲덕림초등학교 6회 졸업생(1975.2)

1924년에 주산국민학교가 설립되었지만, 이 지역과는 거리가 멀어 아이들의 등하교가 매우 불편함을 통감한 지역주민들은 1963년에 덕림분교를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속적인 추진과 지역 사람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1965년 2월 9일에 주산국민학교 덕림분교로 설립 인가 되었다. 덕림국민학교가 설립된 지 약 10년이 지나면서 학생 수가 늘어나게 되어 지역주민들의 학교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지역 경로회가 설립되면서 학교와 학생들에게 관심을 크게 갖게 되었다. 난폭한 청소년들의 선도와 학교시설 등 학생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우수 학생에게는 다음과 같은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덕암경로회는 1972년 4월 8일 설립되어 가정은 빈곤하지만, 성적이 우수한 졸업생들에게 소정의 백미(白米)를 지급하였는데 한 예로 8명의 학생에게 백미 4叺(가마니)를 나누어 지급하였다. 그리고 1976년 4월에 설립된 덕암회에서도 6명의 학생에게 당시 시세에 맞춰 백미 3叺(가마니)수준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지역사회에서는 후학양성을 위해 지속적인 장학 사업을 하였다.

1974년 3월 4일에 12학급으로 편제되었고, 1976년 3월 12일 학생 수가 최고일 때 남학생이 216명, 여학생이 242명으로 458명의 학생들이 덕림국민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워 요란한 함성이 그치지 않았다. 1985년 3월 12일 덕림국민학교 병설 유치원이 개원되었고 1986년 11월 10일 기준 남학생 83명, 여학생 78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였지만, 그 후로 이농현상 및 농어촌 인구감소로 학생 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1999년 2월 28일 인근 동정초등학교와 함께 약 35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현 주산초등학교에 통폐합되었다.

 

▲학교 운동장은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보리베기와 수학여행의 추억

25년 전에 사라진 덕림초에 관련된 자료 및 졸업생을 찾기 위해 고민한 결과 수년 전부터 변산지역 산행을 함께 했던 선배 지인을 통해 덕림국민학교 졸업생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드디어 2023년 8월 14일 오후에 용기를 내어 덕림국민학교 졸업생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분은 현재 전라북도 인재개발원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편안한 목소리의 원장님과 20여 분의 전화 통화를 통해 약 50여 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당시의 덕림국민학교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원장님에게 불시에 졸업 연도를 여쭸더니 오랜 세월이 지나서인지 잊고 있었지만, 나중에서야 78년 2월에 졸업했다며 덕림국민학교 8회일 것이라며 확신은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참고 자료에서 살펴본 결과 86년 2월 졸업생이 17회이니 아마도 9회 졸업생 정도로 짐작된다.

학교 주변의 인상적인 건물은 교문 왼쪽에 구멍가게가 2곳이 있었으며 젊은 남자분의 이발소도 있었고 그분은 지금쯤 70대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학창 시절 생각나는 선생님 중에 최○병 선생님이 기억나며 당시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젊은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열심히 지도하였는데 현재 전주에 거주하시고 있어 가끔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당시 덕림국민학교에는 특별활동으로 탁구부 및 핸드볼부가 있었는데 탁구부를 했던 학생 3명이 익산시에 있는 이일여·중고에 진학하였고 그중 2명은 실업팀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소풍은 학교에서 5km 거리의 주산삼거리에 간 적이 있고 보통 6학년까지 봄에는 베매산, 가을에는 사산저수지까지 걸어갔다고 하였다. 기억나는 수학여행은 1박 2일로 버스 한 대를 대절하여 내변산 및 백천내, 변산해수욕장과 내소사에 갔으며 내소사에서 하루 숙박했던 일이 기억에 남았다. 수학여행 비용은 개인이 냈으니 요즘처럼 학교에서 지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6학년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을 보리베기 대민봉사활동으로 받은 돈을 모아 수학여행 경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보리베기 인력동원’은 주변 학교에서도 초등학교 5~6학년 때에 참여하였다. 당시에는 학교에 농기구 창고가 있고 괭이 및 호미, 삽이 농기구 창고에 가득 걸려 있었다. 실과시간 및 교내 일손 관련 작업이 있으면 줄을 서서 농기구를 하나씩 배정받아 담임 선생님의 엄격한 지시로 농기구를 사용하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보리를 베는 낫은 집에서 직접 가져와서 보리 베기 대민 봉사활동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이른 아침 아버지께 낫을 숫돌에 갈아 달라고 해야만 했고 위험한 낫을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가져오기 위해 새끼줄로 낫의 칼날 부분을 칭칭 동여매고 학교로 가져갔던 기억이 있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로 당시에는 지역 농부의 요청을 받아 학생들이 보리밭에 한 줄로 서서 보리 베기를 하였고 경험이 없고 일이 서툰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잘려 나간 보리 이삭이 바닥에 뒹구는 일도 허다하였다.

일손을 요청한 집에서는 아이들의 간식을 위해 팥죽이나 칼국수를 준비하였고, 보리 베는 중에 학생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보리밭에서 알을 품고 있던 놀란 꿩들이 괴성과 요란한 날갯짓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고 꿩알을 훔쳐 먹기 위해 숨어있던 구렁이가 학생들의 고함소리에 놀라 도망치지 못하고 움츠려 있으면 선생님이 막대기로 구렁이를 멀리 내팽개치던 일도 기억난다.

지금은 재량휴업일이 있지만 당시에는 ‘농번기 방학’이라고 하여 봄가을에 1~2회 정도 농사일이 바쁜 때 2~3일 정도 휴업을 하고 집안일을 돕도록 했다.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농번기에는 어린아이들의 고사리손도 농촌에서는 일손에 보탬이 되었다. 이후에는 점차 기계화가 되면서 아이들이 집에 있으면 어른들이 일하는 데 방해만 된다는 여론이 커지면서 어느 틈엔가 농번기 방학은 사라졌다.

 

추석마다 열렸던 덕림리 체육대회

▲덕림초등학교 1회졸업생(1969.2)

졸업여행 중에 내소사 화장실에 대한 기억이 선하였다. 예전 절간 화장실이 거의 비슷하듯이 어두운 밤에 여럿이 볼일 보러 갈 때 한참을 기다렸던 일, 그리고 해우소의 바닥이 너무 깊어 위험스러웠고 대소변의 소리도 한참 후에 들리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72명의 학생이 졸업을 했는데 그중에 기억나는 친구는 주산 농협지점에 있는 친구였으며 교육활동으로는 당시 핸드볼을 배워 부안 관내 핸드볼 대회에 출전했던 기억이 있다고 하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왼손잡이 선생님이 비가 올 때도 수업 이외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열정으로 덕림국

▲덕림초등학교 1회졸업생(1969.2)

민학교 핸드볼팀이 부안 관내에서 상위 등수 안에 들 정도로 학생들의 실력은 대단했다고 한다. 졸업생은 핸드볼 대회뿐만 아니라 부안 관내 축구대회에도 참가하였다. 지금은 구기 종목 같은 경우 교사들이 직접 지도하지 않지만 필자가 교직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학교 교사가 구기 종목을 지도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취미나 특기에 따라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달라지기도 했다.

▲덕림초등학교 초기 교직원(1969.2)

많은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교훈이나 교가는 생각나지 않고 단지 교장선생님이나 여러 선생님이 학교 뒤 관사에서 생활하였는데 술을 즐겨 드셨던 선생님이 자상하게 학생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 등을 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덕림초 입구에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이 있어 앨범 앞표지에 실렸던 기억은 있지만 지금 본인에게 앨범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고 했으며 동창회 관련 사진은 동창회 밴드에 확인하여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덕림국민학교 운동장에서는 추석 때 덕림리 체육대회를 열곤 했는데 7개 마을이 4개 팀을 만들어 축구, 배구, 달리기 등 행사를 하였으나 학교 폐교 후에 관리가 되지 않아 마을 행사도 사라져 아쉽다고 하였다. 덕림초가 폐교되어 2년 정도 지나니 운동장에 잡초가 무성하고 타지 생활에 적응된 동창들의 바쁜 귀가로 참여가 저조하였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폐교 2년 뒤 찾은 덕림초등학교 모습은

덕림초등학교에 관련된 글을 찾던 중에 2012. 05. 12 <부안독립신문>에 게재되었던 글이 있어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 같아 그 일부를 싣고자 한다.

제목은 ‘숲 속 덕림초등학교의 작은 기억’으로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교문에 들어섰다. 학교는 숲속에서 잠자고 있다. 큰 나무들이 교실을 가리고 세종대왕 동상과 책 읽는 소녀상도 숲속에 묻혀 있다. 운동장에는 웃자란 풀들이 작은 숲을 이룬다. 2001년 8월에 찾았던 덕림 초등학교 모습이다. 1999년 2월 28일에 폐교가 됐으니 2년 반 만에 자연의 변화를 학교는 받아들였다. 요리조리 풀을 헤쳐 현관에 들어서자, 게시판에는 폐교되기 직전인 1998년 자료들이 찢어진 채 붙어 있다. 덕림초등학교 학구(學區)는 덕림, 인천, 학동, 철연, 중공, 신공, 공작 등의 마을이다. 교장과 교감 그리고 교사 6명, 기능직 2명 포함하여 교직원은 10명이었다. 평균연령 47.6세, 평균 근속연수 20.4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 같으면 개인 정보 보호라는 이름으로 게시판에 붙이기는 꺼려지는 내용들이다.

관공서와 학교가 소개되는데 주산면에는 주산초, 석계분교, 동정초와 덕림초가 있었고, 주산의 인구는 1275명(남631, 여 644명)이었다. 뭐 이런 세세한 얘기들까지 게시판에다가 썼느냐 할지 모르지만, 당시 게시판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했기 때문 아닐까. 덕림초 졸업생 중에 신공마을에 사시는 박○순씨는 “한 때는 한 학년이 100명이 넘을 정도이고 영원의 사구에 사는 학생들도 이곳 덕림초등학교를 다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쩌랴, 농촌 인구 감소에 따라서 아이들이 없으니 설립된 지 35년 만에 폐교가 되었다.

 

덕림국민학교 옛터에 남은 아련한 흔적들

10월 7일 토요일 생태 인문학 탐방이 있는 날이기에 가벼운 복장으로 부안교육지원청 2층 회의실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는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회,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행사다. 석불산 및 등룡성당 일원, 백련초등학교와 채석강을 탐방하였는데 3시쯤에 모든 행사가 끝나 불현듯 덕림초등학교 옛터를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안교육지원청에서 출발하여 주소가 주산면 덕림리 487-30인 장소를 향해 707 지방도인 문정로를 거쳐 스포츠파크 사거리에서 직진 도로인 선돌로를 달려 신흥삼거리에서 덕림로에 접어들었다. 가던 길에는 중공마을, 인천마을 등 재미있는 이름들이 보였다.

덕림로 오른쪽 옛 덕림초등학교 후문인 듯한 장소에 도착하여 뒤뜰을 둘러보니 다듬어지지 않은 오래된 향나무가 옛날 학교였다는 것을 알리며 건물 옆 운동장에는 표고버섯 재배용 통나무가 비닐하우스 안에 즐비하였다. 운동장으로 걸어가니 넓은 운동장에는 여러 동의 비닐하우스와 마늘을 재배한 듯 검은색 비닐이 여러 줄 길게 깔려 있었다.

▲잡초 덩굴에 둘러싸인 세종대왕 동상

운동장 아래 오른쪽 끝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우뚝 서 있지만 잡초 덩굴에 둘러싸여 외부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까이 다가가니 세종대왕 기단 옆에는 기증자의 주소와 이름인 듯한 ‘부안군 주산면 덕림리 차재환’, 그리고 생년월일인 듯한 ‘1930년 12월 25일’이 새겨져 있었다. 한글과 나라 사랑의 숭고한 정신을 심어 주기 위한 세종대왕 동상은 1981년 6월에 세워졌다고 판에 내용이 실려 있었다.

언덕 위 교실과 운동장 사이를 오르내렸던 콘크리트 계단이 세 군데 있었고 교문 방향 언덕에는 효자 정재수 동상 및 근면상, 체력은 국력을 나타내는 동상 등 십여 개의 동상들이 우거진 잡초 언덕에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운동장 중간 가장 먼 아래쪽 큰 나무 아래에는 이승복어린이 동상이 역시 수풀에 가려져 있었다.

학교 건물 가까이 다가서니 동쪽으로는 콘크리트로 제작된 둥근 탁자와 의자가 있었고 2층 건물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철재 계단이 지금도 설치되어 있었다. 뒤뜰에는 창고와 샤워장이 있었지만, 학교를 한 바퀴 돌아다니는 중에 어느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어 덕림초의 당시 생활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학교 밖으로 나와 정문이 있었던 곳으로 걸어가니 학교 담장 앞에는 고부천과 연결된 듯한 농수로가 가로질러 있었고 교명이 떼어 없어진 정문은 굳게 잠겨 있어 담장 주변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덕림초 옛터를 둘러보고 귀가하려는데 덕림 경로당에서 전동스쿠터를 타고 나오시는 어르신에게 덕림초등학교를 물었더니 본인은 나이가 많아 덕림초를 다니지 않았다고 하며 학교 관련 질문에는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다시 생각해 보니 덕림국민학교의 개교는 1965년이었으니 노인께서는 주산으로 학교를 다닌 것으로 여겨진다.

 

폐교와 함께 사라지는 학교라는 추억

▲교정에 있는 동상들

처음 학교가 생길 때는 자녀교육이 절실한 지역주민들이 땅을 무료로 내놓거나, 건물을 짓거나 운동장을 만들 때 마을 주민들이 울력(힘을 합해 일을 함)을 했다. 자녀들의 장래가 걸린 교육기관이 동네에 들어선다는 것에 학부모 입장에서는 가슴이 들뜨고 자녀를 위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35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폐교가 되었고 이제는 폐교 후 25년의 시간이 흘렀다. 당시에는 희망과 애환을 한꺼번에 가져다준 학교가 폐교되니, 졸업생들과 지역민들의 문화 박탈감과 가슴 속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지역 사람들의 마음과 머릿속에서 ‘덕림초등학교’란 이름조차도 사라져가고 있다. 35년이나 지역과 함께한 역사물인 학교가 학생 수 감소로 폐교가 되었는데 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지역과 함께한 학교의 역사를 잊고 지낸다.

부안군에 가장 초등학교가 많았을 때는 52개교였다. 어느덧 통합 및 폐교의 수순(手順)을 밟아가던 중에 이제는 20여 개교만 남았다. 그러나 앞으로 몇 개의 학교가 더 사라질지 모른다. 학교의 폐교는 농촌의 어려움과 함께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라도 과거와 더불어 현재 존재하고 있는 교육 관련 자료를 보관·보존하기 위한 학교 밖 특정한 장소를 만들어 졸업생들의 기억과 추억을 채워 주었으면 한다. 이런 장소가 만들어진다면 관심 없던 학교 창고 구석에 방치된 교육자료 및 졸업생들이 가지고 있던 옛 자료를 다시 한 번 찾아보게 되어 숨어 있던 교육의 역사도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살아 간다. 각종 자료와 사진 속에서 수십 년 전 자신과 친구들이 잊고 있었던 학교의 추억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 김강주(부안초등학교 교장)

 

♣ 부안이야기 29호(2023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