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맛이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원효방의 유천(乳泉)과 변산의 차(茶)문화

 

▲개암사 뒷산이 이고 있는 울금바위에는 세 곳에 굴실이 있다. 이곳에서 원효대사가 수도했다해서 ‘원효방‘이라고 부른다.ⓒ부안21

원효방 유천(乳泉)

개암사 뒷산이 이고 있는 울금바위에는 남. 북. 서 세 곳에 굴실이 있다. 북쪽의 굴실은 세 곳 중 가장 협소하며 백제부흥운동 당시 군사들을 입히기 위해 베를 짰다해서 베틀굴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서쪽의 굴실은 세 곳 중 가장 큰 굴로 역시 백제부흥운동 당시 복신이 거처한 굴이라 하여 일명 복신굴이라고 불리고 있다.

남쪽의 굴실은 바위절벽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지표에서 10여 미터나 되는 암벽중간에 있어 사다리가 없이는 도저히 오를 수가 없는 곳이다. 굴실의 크기는 6∼7평정도이고, 이 굴실 바로 옆에는 마치 칸막이를 해놓은 듯 3평 크기의 또 하나의 굴실이 있다. 세 곳의 굴실 중 가장 전망이 뛰어난 곳으로 이 굴실에서 바라보면 변산의 산들이 첩첩이 발아래 포개져 들어온다. 이곳이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617~686)가 수도했다고 전해오는 ‘원효방’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가 이곳 원효방을 둘러보고 그의 <남행월일기>에 기록을 남겼다.

“부령 현령(扶寧縣令)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원효(元曉)가 와서 살자 사포(蛇包)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이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內室)과 외실(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에 참여할 뿐이라 한다.-하략”

내용으로 볼 때 원효방은 세 곳의 굴실 중 바위 중간쯤에 있어 사다리나 밧줄에 의지해야만 오를 수 있는 남향의 굴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나왔다고 했는데 정작 이 굴실에는 샘이 없고, 샘은 복신이 거처했다는, 그래서 복신굴이라고 부르는 서향의 굴실에 있다. 그렇다면 복신굴을 포함한 울금바위 전체를 원효의 수도처로 보아야 옳을 것 같다.

어쨌든, 이 샘물은 바위틈에서 스며 나와 바닥의 확독만하게 파인 곳에 고이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부안사람들은 이 샘을 ‘원효샘’이라고 부르는데, 이규보의 기록처럼 맛이 젖과 같이 달므로 유천(乳泉, 젖샘)이라고도, 또 어떤 이는 차 달이기에 좋은 물이라 하여 다천(茶泉)이라고도 부른다.

우리 선조들은 품천(品泉)이라 해서 물맛의 우열을 매겼고, 차 달이는 물도 아무 물이나 사용하지 않았다. 차(茶)의 성인(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는 “차는 물의 신(神)이요, 물은 차의 몸(體)이니, 제대로 된 물이 아니면 그 신이 나타나지 않고, 제대로 된 차가 아니면 그 몸을 나타낼 수 없다.”고 <다신전(茶神傳)> ‘품천(品泉)’ 항목에 기록하였다.

그런 초의선사는 좋은 샘물의 덕목으로 가볍고, 맑고, 차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무색無色, 무취無臭, 무미無味 여덟 가지를 꼽았다. 이 중에 아름다운 물이란 우리 몸에 필요한 유기물(미네랄)을 잘 갖춘 물을 말하는데, 낙엽 등이 분해된 유기물은 주로 지표로부터 30~40cm 지하층에 모여 있다고 한다.

초의선사는 또 “산 위의 샘물은 맑고 가벼우며 산 아래 샘물은 맑고 무겁다. 돌 사이에서 나는 샘물은 맑고 달며, 모래 속 샘물은 맑고 차가우며, 흙 속의 샘물은 담백하다. 흘러 움직이는 물이 고여 있는 물보다 나으며, 응달진 곳에서 나는 물이 양지의 물보다 좋다. 참된 근원의 물은 맛이 없으며, 참된 물은 향기가 없다”고 이르고 있다.

초의선사가 세운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의 샘물이 이러한 덕목을 모두 갖춘 유천이라고 한다. 대흥사에서 열리는 초의문화제는 이 일지암의 물로 차를 달여 부처님께 바치는 헌공다례로 시작한다.

▲원효방 유천(乳泉)/이 샘물은 바위틈에서 스며 나와 바닥의 확독만하게 파인 곳에 고이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부안사람들은 이 샘을 ‘원효샘’이라고 부르는데, 이규보의 기록처럼 맛이 젖과 같이 달므로 유천(乳泉, 젖샘)이라고도, 또 어떤 이는 차 달이기에 좋은 물이라 하여 다천(茶泉)이라고도 부른다.ⓒ부안21

변산의 차(茶)문화

이규보의 <남행월일기>는 사포가 ‘원효방의 샘물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여 원효에게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규보가 방문했을 그 당시에는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에 참여할 뿐이라 한다.’고 기록하였다.

백제부흥운동군이 주류성 전투에서 패해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해가 663년이니 원효대사가 변산에 머물렀던 시기는 그 이후가 될 것이고, 이규보가 전주목사 겸 서기(全州牧司錄兼書記)로 부임해 변산의 벌목책임자로 있을 때 원효방을 방문했으니 1199년의 일이다. 이미 그 시대(원효대사-고려)에 변산에는 차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초의선사(1786~1866)가 세운 일지암이 차문화의 성지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일지암과 같은 유천이 있는 변산의 차문화는 그 시차가 천년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산의 차문화는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변산에 차밭이 없고(보안면의 차밭은 최근에 조성되었다.) 자생하는 차나무도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문헌에 ‘변산의 차맛이 좋다’는 기록도 보이고, ‘원효방 근처에 차나무가 자생한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 부안의 토공(土貢) 품목에는 狐(여우가죽), 狸(너구리가죽), 水獺皮(수달가죽), 沙魚(상어), 天鵝(거위), 黃毛(족제비꼬리털), 席(자리)와 함께 茶(차)가 들어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세종실록지리지 이후에 발행된 동국여지승람이나 호남읍지 등에는 부안의 진상품 품목에 차가 들어있지 않다.

차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운남성, 사천성)이라는 설과 인도(아샘지방)라는 양설이 대립되어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왕후(許黃玉)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보면,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차종자라고 한다.(金海 白月山有竹露茶 世傳首露王妃許氏 自印度 特來之茶種云)”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로왕비 허왕후(許黃玉)는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로서 부왕의 명을 받아 16세의 어린 나이에 수륙만리 이국의 수로왕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다. 그때 금은비단 등 많은 패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 차 씨앗도 함께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 말미에는 “차와 과일 등을 갖추어서 시조 수로왕릉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온다.

가락국기에는 또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賡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王位田) 주관하여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마련하고 떡과 밥, 차(茶)와 과일 등을 갖추고 제사를 지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고, 그 제삿날은 거등왕(居登王)이 정한 연중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위의 기록으로 본다면 차를 가지고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서기 661년에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수로왕의 15대 방손)의 어명으로 60여 년간 끊어졌던 제사가 다시 이어지게 되면서부터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 겨울 12월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조공(朝貢)하니, 당문종(文宗:826~839년)은 인덕전에 불러서 보고 등급을 가려 잔치를 베풀었다. 당나라에 갔던 사신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왕(興德王)은 지리산(地理山: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차가 선덕여왕 때부터 있기는 했으나, 이에 이르러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구려나 백제에는 어떤 경로로 차가 전래되었는지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러나 중국으로부터, 그게 아니더라도 불교를 따라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크다. 고구려에 차의 전래가 이루어졌다는 가능성을 확실하게 해주는 자료로는 일본인 아오끼(靑木正兒)가 제시한 고구려의 옛 고분(古墳)에서 출토되었다는 모양이 둥글고 얇은 작은 병다(餠茶)이다. 병다가 고분 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고구려 사람들이 차를 애음했으며, 사자(死者)를 위해서 묘실에까지 차를 넣어주는 관습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울금바위를 이고 있는 개암사. 원효방은 울금바위에 있는 굴실을 말한다.ⓒ부안21

백제에도 어떤 경로로 차가 전래되었는지 직접적인 자료는 없으나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바로 변산 원효방의 원효대사와 백제의 중 사포에 얽힌 일화를 들 수 있다. 사포는 원효에게 늘 차를 달여 드렸고, 이로부터 500여 년 후 이규보가 방문했을 때도 한 늙은 중의 거처에 찻잔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이곳에서 사포가 원효에게 달여 드린 차가 신라에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백제에서 재배한 것인지 명확한 자료는 없지만 아마도 백제의 어느 땅에서 재배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들이다. 그 이유로는 원효방이 백제 땅 깊숙한 곳에 있어 신라로부터 수송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 고려 때에도 원효방에 거처하는 어느 늙은 중이 차생활을 하였다는데 이 노인이 마신 차가 부안 땅에서 재배한 차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기후조건이 알맞은 부안은 차 재배가 가능하며 현재에도 부안군 일대에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선생은 그의 <다고사(茶故事)>에 “신라의 차는 당에서 들어왔고 일본의 차는 송에서 들어갔으니 비록 연대의 전후는 있으나 모두 불교를 따라 전래했었고, 또 불교를 따라 발달했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로 보면 불교가 성행했던 그 당시 고구려, 백제에도 당으로부터 차종자의 전래가 없었을 리가 없다. 고구려는 북쪽 추운 지방이므로 재배에 부적당하나 백제는 남쪽 따뜻한 지방인만큼 신라보다 오히려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 일찍 들어와 재배가 되었더라도 사실이 전하지 않는 이상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할 바다. 그러나 지리산을 중심으로 논할 때 신라의 옛 땅이었던 경상도 방면에 비하여 백제의 옛 땅이던 전라도 방면에 차 산출이 더 많다고 한다. 이는 백여 년 전에 된<여지승람>에도 적혀 있거니와 금일에 이르도록 의연히 변함이 없다. 전라도는 지리산 외에도 모든 명산에 거의 차가 없는 곳이 없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망한 나라는 역사를 제대로 기록할 수 없다. 호암선생도 자료 미비로 백제의 차 전래 사실을 밝힐 수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의 80%가 백제의 옛 땅에서 재배되고 있다는 사실 등으로 볼 때 백제의 차 전래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변산의 원효방이 간접적으로나마 이를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부안의 다인들의 모임인 ‘낭주다인회(회장 서영옥)’는 해마다 곡우 무렵에 그해 첫 수확한 차로 개암사 스님들과 함께 원효방에서 헌다례를 올리고 있다. 백제의 차 전래를 간접적으로나마 말해주고 있는 이곳 원효방에서 1,300여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차 문화가 이어진다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일이다. 부안 다인들만이 아니라 전국의 다인들이 함께하는 헌다례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허철희(2009·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