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루살이를 꿈꾼 석정의 삶과 문학

 

▲신석정(1936. 청구원 서재에서) <사진 출처:석정문학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1년 늦가을 무렵으로 기억된다. 전주시 고교학생반공웅변대회에서 한 학생이 해방 직후 북한 주민들이 젊은 유격대장 김일성 장군을 환영하며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을 말하는 과정에서, 실감나게 표현하려고 두 팔을 들어 올리고 큰 소리로 ‘김일성 장군 만세! 만세!’하고 외친 것이 문제가 됐다고 한다. 그 학생은 가짜 김일성에 평양 시민이 속았다는 것을 이어서 말하려 한 것인데, 그 부분에서 중단이 되고 대회장은 금세 얼어붙었다고 한다. 이를 빌미로 당시 전주상고에 근무 중인 신석정 선생이 배후 조종자로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귓속말로 전해지는 음산한 소식에 다들 어깨를 움츠리며 걱정하던 기억이 새롭다. 더구나 그해 여름에 ‘실미도 사건’이 있었던 터라, 사정기관의 감시가 조여 오며 다들 몸을 사리던 상황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교과서에서 배운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시인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는데, 그 시를 아무리 돌이켜 봐도 도무지 연결되지 않았다.

 

▲신석정 시인과 허소라 선생 <사진출처:석정문학관>

자연서정과 현실참여라는 경험

사실, 신석정 시인에 대해서는 중학교 국어 시간에 허소라 선생을 통해 들은 바 있다. 우선 허선생의 여자 이름이 사실은 대학교 시절 문예현상모집에 자신을 뽑아준 심사위원인 석정 선생에게 받은 필명이라며, 그분의 추천으로 등단했다고 했다. 그 필명이 인연이 되어 한 여고생으로부터 언니로 삼겠다는 편지를 받고 서로 연락이 오가다, 남자인 걸 알게 되고 연정으로 발전했는데 결국 헤어지게 됐다는 사랑 얘기를 국어 시간에 오랫동안 했고, 그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 『흐느끼는 목마』를 우리에게 돌려 읽게 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군산에 있는 대학으로 가셨다고 들은 뒤 가끔 떠올리며, 내가 문단의 한 귀퉁이나마 차지하게 된 데 그분의 영향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2013년 대전문학관과 한국문학관협회가 공동 주최하고 대전문학관이 주관하는 전국문학관대회 개막식에 석정 문학관장으로 참석한, 멋진 노시인 허소라 선생을 만나 인사를 드렸다. 선생은 석정 시인의 애제자이자 맏제자로 40여 년을 석정 관련 자료를 모으고 연구해 석정 시인의 참모습을 널리 알린 석정 연구의 대가로, 초대 석정문학관 관장이 된 것이다. 그 뒤 내 어쭙잖은 평론집을 보내 드렸더니 격려 말씀과 함께, 석정 시인의 시사적 위치 재정립을 위해 쓴 평전 『못다 부른 목가』를 보내왔다. 허소라 선생은 머리말에서 ‘오랜 세월 석정에게 씌웠던 ‘목가시인’이라는 가시면류관을 벗겨, 평생을 부안과 전주에서 살면서 ‘자연서정과 현실참여라는 이원적 경험을 외롭게 온몸으로 흡수통합’해 ‘한국시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아야 함을 강조했다.

사실 어떤 학자는 신석정 선생의 제자임을 내세우면서도, 전원시인인 그를 저항 시인이나 민족시인으로 평가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일언지하에 부정하면서, 석정의 미발표작이나 새롭게 발굴된 작품은 다섯 권의 시집이 나온 뒤의 일이자 시인 스스로 시집에 싣지 않음으로써 함량 미달의 작품임을 인정한 것이라며, 생전에 출간한 시집만을 정본으로 삼아 평가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렇게 전원시인으로 확정하며, 시인이 남긴 전 작품을 총체적으로 살피지 않고 자신이 임의로 선택한 몇 작품만 분석해 그 근거로 삼는다. 더구나 그 분석도 고정된 의견의 동어반복에 그쳐 합리적 주장이 되지 못함을 스스로 입증한다. 특히 신석정 시인이 존경하는 정지용에 대한 ‘인상적 소묘’라는 부제를 붙인 「정지용론」에서 ‘모름지기 문학인은 영원히 인생을 대상으로 하지 아니치 못할지니’라면서 기교에 앞서 시인의 인간됨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사실, 시인의 참모습은 생애의 궤적과 그가 남긴 모든 작품의 변화과정을 유기적으로 살펴봐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석정의 조국해방에 대한 생각

신석정의 삶과 문학은, 동시대를 살아간 시인들의 삶의 궤적과 작품의 변모를 비교 대조해 볼 때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좋은 대비는 고향이 인접하고 서로 잘 알았던 시인들과 대비하는 것인데, 고창군 부안면 출신이지만 부안군 줄포면에서 보통학교를 다녔던 서정주 시인이 아주 적절해 보인다. 물론 그 대비 과정에서 다른 문인들도 자연스레 살피게 될 것이다. 서정주는 호적에 한 살 위인 1914년생으로 기재돼 있으나 실지로는 1915년생이니 석정보다 8년 후배이다. 둘은 같은 부안에서 생활하고 또 중앙불교전문강원 동문으로, 전북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학승이자 석학인 석전 박한영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흔한 해외 유학도 하지 않아 학력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서정주는 줄포보통학교를 5년에 마친 뒤,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인 아버지의 주선으로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보결로 입학해 2학년 때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 지지 시위의 주모자로 퇴학당한 뒤, 아버지가 힘써 고창고보 2학년으로 편입시켰으나 백지동맹 사건으로 자퇴했으며, 중앙불교전문강원도 다 마치지 않았으니, 실제 학력은 보통학교 졸업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같다. 둘 다 대학에서 강의한 것도 비슷하나, 정주는 모교인 동국대학교 교수를 지낸 데 비해, 석정은 8년을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하고 전주상고에서 정년퇴임한 중등교사인 점이 다르다. 석정의 3남으로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신광연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보통학교 졸업이 유일한 학력인 석정은 교원 자격증이 없어 정식 교원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교육청에 논문 한 편을 제출해 교원자격증을 받아 정식 교원이 되었다고 증언했다. 서정주는 제2공화국 시절 학력 미달의 교수들을 구제하기 위해 실시한 교수 자격 심사논문에 「신라연구」를 제출해 1960년 동국대 교수가 되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신석정 고택(청구원 터)

정주와 석정의 만남은 1933년 부안군 선은리에 마련한 집 ‘청구원’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석정은 기억하고 있다. 석정이 「나의 교우록」에서 소개한 바에 의하면, 배추를 솎아내던 9월 초에 ‘고창중학 2년 재학 중이라는 17·8세 되어 보이는 까만 제복의 홍안소년’ 서정주가 찾아와, 밤새 ‘보들레르니 니체니 톨스토이니 투르게네프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나이에 비해 조숙한 데’ 놀랐다고 기억하고 있다. 정주는 중앙고보 1학년 때 광주학생항일운동 시위 참가 후, 당시 일본과 한국의 지식인 사이에 풍미하던 사회주의 사상과 톨스토이의 박애주의 영향으로 중앙고보 인근 계동의 하숙방에서 나와 아현동 빈민굴에 들어가 살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줄포로 돌아와 여름 석 달 동안 고생한 적이 있다.

석정도 톨스토이를 탐독한 적이 있으나, 「시정신과 참여의 방향」에서 투르게네프가 「사냥꾼의 일기」에서 묘사한 농노들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이 농노해방을 위한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예술가들의 작품 활동이 바로 현실참여라는 점을 입증하는가 하면, 1939년에 발표한 「방(房)」에서 ‘세상이 뒤집어지리라는 이야기는 모두 좁은 방에서 비롯했다’며 ‘이마가 몹시 희고 수려한 청년’이 ‘고적한 좁은 방에서 그 전날 밤’을 새웠으리라고 짐작하면서, ‘터져나올 듯한 울분을 짓씹는 젊은 「인사로푸」들이 껴안은 질화로 갓에서 동백꽃보다 붉게 피었다’고 노래하는 걸 보면, 석정은 톨스토이보다 투르게네프를 자기 삶의 표본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특히 「방(房)」에서 표현한 ‘그 전날 밤’은 투르게네프의 소설로, 여주인공 ‘엘레나’는 러시아 귀족의 딸로 조국 해방에 헌신하는 불가리아의 가난한 유학생 ‘인사로푸’를 사랑해 그와 결혼하고, ‘인사로푸’가 귀국 도중 병으로 죽자 남편이 못다 이룬 해방운동을 계승하기 위해 불가리아에 남는다. 석정은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빌어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이 무너질 것을 소망하면서 젊은 혁명가들의 울분에 찬 모습을 통해 조국 해방의 소망이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진행 중인 가능성임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오세영은 「방(房)」을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저항시의 하나로 평가한다. 석정은 이 시가 문제가 돼 사정당국에 불려가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하지만 일제의 강압에 대한 그의 저항 의지는 위축되지 않은 채 생활 속에 반영돼, 일제의 억압이 최고조에 이른 1943년에 태어난 그의 막내딸 ‘엽(葉)’을 집에서는 「그 전날 밤」의 여주인공인 ‘에레나’로 불렀다.

▲ 왼쪽부터 신석정, 김태종, (미상), 신기태(1935 봄. 청구원에서) <사진출처:석정문학관>

석정은 「나의 문학적 자서전」에서 ‘나이에 비해 조숙한 홍안소년’ 정주를 ‘패기만만한 기백’으로 추억하며, 그 기백과 장만영의 ‘백절불굴의 노력’이 자신의 문학 수업에 높은 자극제가 되었다고 회상한다. 정주는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하기까지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고창고보에서는 백지동맹을 주도했으며, 떠돌이 건달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돈 300원을 훔쳐 망명 혁명가를 꿈꾸며 만주나 러시아로 가려다가, 서울에서 만난 하숙집 주인 배상기의 영향으로 세계 문호들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섭렵하며 혁명가의 낭만적인 꿈을 버리고 문학에 뜻을 두게 된다. 나중에 그는 중앙고보 시절의 시위 참가를 민족애가 아닌 호기심이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빈민굴 체험을 소년 시절의 감상과 무작정한 연민으로 사회주의의 빈부 타파 정신에 물들었고, 성 문제를 사회주의적 동지애로 극복한다는 막심 고리키의 소설을 읽고 회의를 느꼈다고 했다. 서정주가 다분히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동경으로 꿈꾼 “육혈포도 쓱 한 자루 안 호주머니에 숨겨가지고 다니는 망명 혁명가가 어느 만큼은 소원이었던”(「육혈포」 부분) 것과 달리, 고창고보 선배인 이현상이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과 노동운동에 전념했고, 한국전쟁 때 남부군을 지휘하다 휴전 후 사살된 데서 보듯, 실제 혁명가의 삶은 목숨을 건 형극의 길이었다. 결국, 정주의 패기만만한 기백은 확고한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꿈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소작인의 청구원 생활

석정이 중앙불교전문강원에 다니며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하다 1년 남짓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부안으로 돌아온 것은, 모친의 별세와 소작농으로 지주에게 시달리는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서울 생활의 고달픔 때문이었다. 그는 10두락의 소작농으로 얻은 벼로 선은리에 집을 마련해 ‘청구원’이라 이름 짓고, ‘가난을 벗 삼아 카펜터나 도연명처럼 전원에 묻혀 망국민으로서의 막다른 골목을 견디어 문학의 길에나 정진하기로 뜻을’ (「나의 교우록」) 세웠다. 그의 어머니는 다정다감한 아버지보다 훨씬 엄한 분으로 어려서 어리광 한 번 부려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여섯 살 때 원두막 옆을 지나다 아버지 친구 분이 몇 개 준 참외를 신바람이 나서 가지고 집에 왔다가 어머니에게 매를 맞으며, ‘모래에 혀를 박고 죽을지언정 먹을 것과 먹어선 안 될 것을 알아야 한다’라는 대쪽같은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낭만적인 성격에서 시의 싹이 텄고, 냉철한 어머니의 성격에서 지조를 생명으로 삼고 살아야겠다는 싹이 텄다고 「나의 어린 시절」에서 회상했다. 그래서 가난한 소작인으로 생활하면서도 나름 지조를 지키며 시인으로 사는 방안으로 귀향을 한 것이다. 그런 ‘청구원’ 생활 중 서신 왕래로 교유하던 가람 이병기와 조운 시조시인이 찾아왔는데, 가람 시인과의 친밀한 교유는 나중에 전북대학교에 출강하는 인연으로 이어지고, 영광에 살던 조운 시인과의 교유로 그의 매제가 서울에서 만난 최서해임을 알게 된다. 조운 시인의 아버지는 아전이고, 어머니는 기생으로, 조운은 그야말로 천출이었다. 그는 3·1 만세운동 가담 후 만주로 도망 다니다 떠돌이 문학청년 최서해와 만나게 된다. 그는 관념적 복고주의가 아닌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시조부흥운동을 벌였다. 그는 4군자나 대나무와 소나무 등을 관념적으로 칭송하는 데서 벗어나 하늘을 우러러 빨갛게 핀 인민의 꽃 채송화를 노래했다. 석정도 「시론」에서 ‘피니 돌무늬니 물어 무엇하자느냐/돌이 모래 되면 충신을 잊겠느냐/ 마음에 스며든 피야 오백 년만 가겠니’라고 노래한 조운의 시조 「선죽교」를 ‘두뇌의 시’가 아닌 ‘심장의 시’라고 칭찬한다.

▲『촛불』-신석정-1952(4285)년-대지사(초판1939-인문사)

우리나라 빈궁문학의 대명사인 최서해는 석정이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알게 됐다. 그는 문인들과 동아일보사로 이광수를, 동광사로 주요한을, 불교사로 한용운을, 매일신보사로 최서해를 찾아다녔다. 그는 「나의 문학적 자서전」에서 ‘시방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매신 현관에서 그 초췌한 얼굴로 우리를 보내던 서해의 초라한 모습이다. 서해는 그 뒤 얼마 안 되어 타계하였으니 그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서해는 보통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만주로 간도로 방랑하며 체험한 최하층민의 생활을 간결하고 직설적인 문체로, 박진감 있게 전개한 자전적 작품들로, 1920년대 빈궁문학의 한 전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해가 1927년에 쓴 편지 형식의 소설 「전아사(餞迓詞」는 석정이 1961년에 쓴 시 「전아사(餞迓詞」와 제목이 같다. ‘전아사’는 과거를 떨쳐 보내고 새로운 미래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송구영신’과 같다. 서해의 소설은 사촌 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고향과 어머니를 떠나서 서울로 올 수밖에 없었던 사회구조적 가난을 설명하며, 가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각오를 밝히는 작품이다. 석정은 같은 제목의 시 마지막 연에서,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한 함성으로/ 다시 억만 별을 불러 satan의 가슴에 창을 겨누리라/ 새벽종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라고 노래한다. 억압과 굴종의 얼룩진 역사를 떨쳐버리고 자유와 해방의 새벽종이 울 때까지 사탄의 가슴에 창을 겨누리라는 각오를 다지는 모습엔 뜨거운 민족애와 치열한 역사의식이 담겨 있다. 그래서 박두진은 ‘가장 석정다운 사상의 골격과 깊이를 느끼게 한다’라고 평가한다. 서정주도 ‘창을 들고 일어서리’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1944년 8월에 「무제-사이판 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의 끝부분에서 ‘아아, 기쁘도다 기쁘도다/희생 제물은 내가 아니면 달리 없으리// 어머니여, 나 또한 창을 들고 일어서리/배를 띄우리/사이판으로!/매킨.타와라로! 아투로!’라고 옥쇄를 감행한 일본 병사들과 하나 되어 적과 싸우자고 선동하면서 말이다.

 

꽃덤불과 고루살이

석정이 추구하는 자연과 현실, 자연과 인간, 서정과 참여의 통합을, 서정시의 형태로 치열한 역사의식을 담아낸 작품은 해방 직후인 1946년 1월에 탈고하고 2월 8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첫날을 끝내고 시 쓰는 동무들끼리만 따로이 모여 술을 나누며 처음으로 맘 놓고 즐기는 자리에서 시골서 올라온 석정이 노래 대신 소리 대신 낭독한’ 시가 바로 「꽃덤불」이라고 이용악은 쓰고 있다. 석정은 이 시에서 일제 36년 동안 식민지 백성의 굴절된 삶의 모습을 사망, 망명, 변절, 전향 등으로 압축한 뒤, 이제 해방이 되었지만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라고 노래한다. 해방 후 겪은 이념의 극한 대립과 혼란의 현실을 아직도 겨울밤의 차가운 현실로 비겨 안타까워하며, 자주적인 민족국가 수립의 꿈을 아늑한 꽃덤불로 소망하고 있는 절창이다.

▲석정문학관에서-백산고등학교 학생들(2016)

2014년에 허소라 시인이 공개한 석정의 미발표 시 중 1948년 6월에 탈고한 「젊은 군상」은 유진오와 유정의 투옥, 오장환이 당한 테러, 육체노동으로 연명하는 김기림 등의 동향을 소개한 다음, 이런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조국으로 통하는 가까운 길이여/ 더 기쁘고나’라고 마무리해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다. 완주 출신으로 당시 ‘인민계관시인’으로 평가받던 유진오 시인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 산내 뼈잿골에서 희생된 것으로 전해지고, 서정주와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며 정주의 첫 시집을 자신의 출판사에서 호화판으로 출간해, 서정주와 쌍둥이 형제로 불리던 오장환은 서정주의 친일시 등 변절을 보고 절연한다. 그는 유진오를 문단에 추천했다. 그는 「병든 서울」에서 ‘그리고 나는 외친다./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나라’라고 해방을 맞는 심경과 벅찬 희망을 노래한다.

석정이 1946년 5월 6일 탈고한 시 「피-에레나에게 주는 시」의 뒷부분에서, ‘연약한 너의 아버지 이 감방에서/산송장으로 하고 있을지라도/인민의 나라 세우는 날 새나라 세우는 날/이 작은 피는 온몸으로 흘리리라/비처럼 사뭇 줄줄 흘리리라’라고 모든 인민이 자유롭고 고르게 잘사는 새나라-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이 말하는 ‘고루살이’를 이루는 데 헌신하겠다며, 감방에서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의 여주인공 ‘엘레나’를 본따 ‘에레나’로 부르는 막내딸 ‘엽(葉)’에게 다짐하고 있다. 오장환과 석정의 꿈이 같은 것이다. 1982년의 이른바 ‘오송회 사건’도 석정 시인과 관련이 있다. 오장환 시인의 시집 『병든 서울』을 군산 제일고 이광웅 교사가 석정에게 빌려다 복사해 동료와 돌려 읽은 것을 간첩으로 몬 사건이다. 다행히 석정은 1974년에 영면했다.

/ 김영호 문학평론가

 

♣ 부안이야기 29호(2023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