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설화] 벽송대사와 그의 어머니-호남의 명당 ‘無子孫香火千年之地’를 찾아서

 

▲벽송대사의 어머니 묘. 자손이 없어도 천 년 동안 향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호남의 명당이다.ⓒ부안21

부안에는 벽송대사에 관한 두 편의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환의고개’, 또 하나는 ‘無子孫香火千年之地’ 설화이다.


환의(換衣)고개

일명 지응대사(紙鷹大師)라고도 불리는 벽송은 출가하여 내소사에서 청련암 가는 중간쯤에 벽송암(碧松庵)을 짓고 수도에 정진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출가해 버리자 어머니는 벽송에게 귀가할 것을 권하지만 이미 불도에 깊이 귀의한 벽송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작별하면서 한 가지 굳은 약속을 하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초하루와 보름, 오늘 작별하는 이 고개에서 만나기로… 아무리 어머니이지만 수도승이 지켜야하는 淸戒의 영역 안에는 부녀자가 들어갈 수 없으므로 암자로부터 십리가 넘는 이 고개 마루에서 만나 모자의 정도 나누고 새 옷과 헌 옷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 이후로 이 고개를 옷을 바꾸는 고개라 하여 환의재(換衣峙)라 불리어지게 되었다는데 진서 연동에서 백포를 지나 내소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환의재, 진서 연동에서 백포를 지나 내소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부안21

無子孫香火千年之地

환의고개에서 아들과 헤어질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벽송에게 “나는 너 하나만을 믿고 살아 왔는데 네가 이렇게 수도하는 중이 되어 출가하였으니, 네 한 몸은 수도하여 도를 이룬다 한들 너의 후손은 끊어지고 말 것이니 그것이 한스럽구나!”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벽송은 “어머니 염려 마세요. 어머니께서 천수를 다 하고 가신 후에 無子孫香火千年之地에 모시겠습니다.”하며 어머니를 위로하였다고 한다. ‘無子孫香火千年之地’란 문자 그대로 돌볼 자손이 없어도 천년 동안 향불이 꺼지지 않는 명당자리라는 뜻이다.

그 후, 벽송은 大悟하여 고승이 되었으며,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를 지금의 동진면 장등리 장기등(長基嶝)에 모셨는데, 이 묘에 명절날 치성을 드리면 가족이 일 년 내내 무병하고 재수가 좋다하여 다투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또 이 무덤의 풀은 ‘야니락(학질의 일종)’이라는 병에 특효가 있다고 하여 다투어 뜯어가므로 저절로 벌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동안 가졌던 궁금증이 발동하여 지난 7월 18일 전설 속의 그 명당을 찾아 나섰다. 부안읍에서 동진대교 방향으로 혜성병원, 오륜의집, 고마제저수지를 지나 오른쪽 길로 접어들자 들판 가운데 꽤나 큰 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동진면 장등리 마을이다. 옛 동성초등학교 못 미친 지점에서 북쪽 논길로 들어서자 나지막한 산 아래 10여가호가 옹기종기 붙어 있는 장기등 마을이 나왔다.

호남의 명혈(名穴)이라는 벽송대사의 어머니 묘는 마을 들머리에 자리하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묘를 보자마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명절도 아닌데, 더구나 하루건너 비가 추적거리는 지루한 장마철인데도 묘역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침 이 마을 사람들이 고샅에 나와 있기에 물었더니 “엊그제 어떤 양반이 벌초도 하고, 치성도 드리고 갑디다.” 하는 것이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묘역을 관리하지만, 인근 마을 뿐 만이 아니라 타 지방 사람들까지도 어떻게 알고 찾아와 서로 앞 다투어 벌초하고, 치성을 드리기 때문에 묘역은 항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고 했다. 마을사람들 얘기를 듣노라니 이곳은 묘지라기보다는 마치 신앙지로 느껴졌다. 벽송은 과연 그의 예언대로 자손이 없어도 향불이 꺼지지 않는 명당에 어머니를 모신 것이다.

▲마침 이 마을 사람들이 고샅에 나와 있기에 물었더니 “엊그제 어떤 양반이 벌초도 하고, 치성도 드리고 갑디다.” 하는 것이었다. ⓒ부안21

묘비 앞면

(碧松堂)
紙鷹大師先妣之墓

묘비 뒷면

發文 古蹟踏査
踏山하신 江湖諸賢과 紙鷹大師任(碧松堂)을 崇慕하시는 多士께 敬意를 表합니다. 不肖의 淺薄한 識見으로 發議하게 됨은 地家書에 詳記된 扶安 東津面 長登里 長基嶝에 位置한 大師의 先妣墓所는 卽 大師의 小占이니 乾坐坤得寅破며 無子孫香火千年之地로 傳해 내려온 바라 世人들의 奉審과 所願을 祝燾하면 每事를 成就한 徵驗이 있어 綿綿히 이어온 湖南名穴이다. 大師의 宗派는 曹溪宗이시고 古縣內에 入鄕한 礪山宋氏이며 來蘇寺 靑蓮菴에서 通道하시어 地家書의 明堂圖를 作하셨고 李朝中葉의 高僧으로 14名師中 1人이셨다. 大師의 높은 智德을 闡揚하고 先妣之靈을 慰勞하고져 傳說의 事由를 收錄하여 菲薄하나마 表石에 入刻하오니 此後 世人들의 龜鑑됨을 參考하시고 先師의 族後孫인 井邑郡 七寶面 臥牛里 宋榮南을 追記합니다.

光復後 初甲戌 十月 日

扶安 金炯鎭 撰幷書

그렇다면 벽송대사는 누구인가?

벽송대사 碧松大師(1464~1534)

법명은 지엄智嚴, 법호는 야로埜老, 당호는 벽송碧松이다. 속성은 송宋씨, 아버지의 이름은 복생福生이고 어머니는 왕王씨이며 부안사람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한 인도 스님이 예를 올리고 자고 가는 꿈을 꾼 뒤 잉태하여 조선 세조 10년(1464년 3월 15일에 벽송을 낳는다. 아이는 특이한 골격과 대장부의 기상을 지녔으며 어려서부터 글공부와 칼 쓰기를 좋아하고 특히 병서兵書에 능했다.

성종 22년(1491년) 4월, 여진족들이 북방 변두리에 쳐들어와 그곳을 수비하던 장수를 죽이자 임금은 허종許琮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토벌하도록 했다. 벽송은 허종을 따라 참전하여 이마차尼馬車와 싸워 큰 공을 세웠으나 싸움이 끝나고 돌아온 뒤 세상의 속절없음을 느껴 출가의 뜻을 굽힌다.

그는 “대장부로 태어나 마음자리(心地)를 지키지 않고 외부로만 치닫겠는가”라고 탄식하고는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으로 들어가 조징祖澄 대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니, 이때가 28세였다.

뜻이 높고 행실이 엄격하여 즐겨 선정禪定을 닦는 것이 마치 중국 수나라의 낭장 지엄智嚴에 견줄 만했다. 그는 먼저 교학敎學에 밝은 연희衍熙 스님을 찾아가 원돈교의圓頓敎義를 묻고 다음에 벽계정심碧溪正心 선사를 찾아가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密旨)’의 일깨움을 받아 현묘한 가르침에 의해 깨달음에 도움이 많았다.

중종 3년(1508년) 가을 금강산 묘길상암妙吉祥庵으로 들어가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개에게는 불심이 없다(狗子無佛性)’는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 정진, 얼마 후 의심덩어리(漆桶)를 타파했다. 또 <고봉어록高峰語錄>을 보다가 ‘양재타방颺在他方’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마지막 알음알이를 떨친다. 이런 까닭으로 벽송 선사는 평생토록 대혜와 고봉의 종풍을 드날린 것이다.

▲벽송지엄 선사 영정(벽송사 소장), 28세에 출가하여 평생토록 대혜와 고봉의 종풍을 드날렸다.

벽송은 중종 6년 (1511년) 봄, 용문산으로 들어가 두 번의 하안거를 마치고 봄에 오대산으로 들어가 한 철을 보낸 뒤 백운산, 능가산 등 일정한 주석처 없이 한도인閒道人처럼 제산諸山을 두루 돌아다녔다. 중종 15년(1520년) 3월에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초암草庵에 머물며 옷을 갈아입지 않고 하루 두 번 먹지 않으며 정진을 거듭하였다. 문을 닫고 외부와의 교류를 두절한 채 인사人事를 닦지않자 배운이들이 왔다가 우뚝 솟은 언덕(벽송)을 바라보고 물러서면서 거만하다고 비방하는 일이 잦았다.

중종 29년(1534년) 겨울, 여러 제자들을 지리산 수국암壽國庵에 모아놓고 <법화경>을 강설하다가<방편품方便品>의 ‘제법 적멸상寂滅相’은 말로써 선설宣說할 수 없다‘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한 번 탄식하더니 “오늘 이 노승은 여러분들을 위해 적멸상寂滅相을 보이고 갈 것이니 여러분은 밖으로 찾지 말고 더욱 힘쓰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시자를 불러 차를 달여 오게 하여 마신 뒤 문을 닫고 단정히 앉더니 한참동안 잠잠했다. 제자들이 창을 열어보니 벽송은 이미 열반에 든 후였다.

11월 초하루 진시辰時였으며 입적한 뒤에도 얼굴빛은 변함 없고 팔다리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부드러웠다. 다비하는 날밤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뻗치고 재를 드리는 날 새벽, 상서로운 구름이 허공에 가득 서리었다. 정골頂骨 한조각에 진주처럼 영롱한 사리가 알알이 붙박혀 있었다. 제자들이 이를 수습하여 석종石鐘을 만들어 지리산 의신동義神洞 남쪽 기슭에 봉안하였다.

벽송은 세속 나이 71세, 범랍 44세로 세연을 마쳤다. 저서로 가송歌頌 50수를 엮은 <벽송집>이 있다.

내소사 수리봉(현 관음봉) 아래 벽송 스님이 수도하였던 토굴터가 있으며, 벽송대사의 어머니가 대사의 옷을 지어 헌옷과 바꾸어 입혔던 ‘환의재’가 입암리와 진서리 경계에 있다.

<내소사지>에서 따옴


/허철희(2009·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