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설화]뉘역메와 거적골-“산 모양이 도롱이로 둘러 놓은 노적가리 같다”

 

▲전영래 교수에 의해 백제부흥운동의 주요 전적지인 두량이성(豆良伊城)으로 비정되고 있는 주산면에 위치한 사산. 사산(뉘역메)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거적골은 들판 너머 산 아래에 있었던 마을이라고 한다. 개암사 뒷산에 있는 주류성(울금바위)에 올라 고부 쪽을 바라보노라면 바로 발아래에 삿갓모양의 산(해발 100여 미터) 하나가 누워 있고, 그 산 너머의 들판은 고부에 이어져 있다. 오늘의 지도에는 삿갓 笠자를 써서 ‘笠山’이라고 표기해 놓았으나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산이 도롱이를 닮았다하여 ‘도롱이뫼’라 부르며, 한문으로는 도롱이 사(蓑)자를 써서 ‘蓑山’, 또는 ‘뉘역메’라고 부른다. 패망한 백제는 역사를 남기지 못했고, 백제패망 역사는 당, 신라, 일본에 의해 쓰여졌다. 그러니 우리 말 ‘도롱이 뫼’를 한문으로 옮길 때 ‘豆良伊’로 표기할 개연성은 높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산 정상에 토루(土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백제군이 주류성의 전방위 진지인 이 천험의 요새를 지키며 시간을 끌자 나당군은 식량이 떨어져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 사산에 이엉을 엮어서 낟가리처럼 쌓아놓고 군량미를 많이 쌓아놓은 것처럼 위장하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는 전설이 이 지방에 남아있다. ‘뉘역메’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한다.ⓒ부안21

주산면사무소가 있는 종산(鐘山)으로부터 서북쪽으로 1km쯤 가면 뉘역메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뒤의 산 모양이 마치 도롱이로 둘러 놓은 노적가리 같다 하여 뉘역메, 혹은 도롱이 산(蓑山)이라 했는데 지금은 쉽게 사산(士山)으로 쓰고 있다.

이 사산에는 백제시대의 고성으로 추정되는 테머리형의 토성터가 남아 있는데 이 성과 개암사 뒷산에 있는 주류성에서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과의 싸움을 한 성터로 추정되고 있다. 사산 옆에 정소산(定蘇山)이라는 얕으막한 야산이 있는데 그때 당시 소정방과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만나 승전을 즐기며 놀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옛날에 이 뉘역메 마을 앞에 강이 가로질러 흘렀으며 마을에는 욕심 많은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어찌나 부자였던지 많은 곡식을 노적으로 높이 쌓고 도롱이를 둘러친 것이 마치 산과 같았다 하며, 마을 앞 강 건너에는 거적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거적골 마을에도 큰 부자가 살고 있어 이 부자 또한 많은 곡식의 노적가리를 거적으로 둘러쳤으므로 마을 이름을 거적골이라 했다는 것이다.

▲주산면 사산(뉘역메) 마을

뉘역메 부자와 거적골 부자는 강을 사이에 하고 서로 다투어 노적가리 높이기에 모든 욕심을 다 부려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을 조금도 도와주지 않으므로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서 노적가리가 벼락을 맞아 불타버려 망해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거적골에는 그 부자가 살았다는 장자터가 남아 있다.

뉘역메의 사산에는 임진왜란 때 이 지방 의병들이 군량미를 저장하였다고 하며 이 마을에서 조선조 말에 송방식(宋邦植)이란 분이 진사에 합격하고부터 산을 士山으로 바꾸어 쓰기 시작하였다고도 한다./소재지:부안군 주산면 사산리/제보자:김형옥(金炯玉,남,66세,부안군 주산면 덕림리) 뉘역메(사산)와 거적골

주산면사무소가 있는 종산(鐘山)으로부터 서북쪽으로 1km쯤 가면 뉘역메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뒤의 산 모양이 마치 도롱이로 둘러 놓은 노적가리 같다 하여 뉘역메, 혹은 도롱이 산(蓑山)이라 했는데 지금은 쉽게 사산(士山)으로 쓰고 있다.

이 사산에는 백제시대의 고성으로 추정되는 테머리형의 토성터가 남아 있는데 이 성과 개암사 뒷산에 있는 주류성에서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과의 싸움을 한 성터로 추정되고 있다. 사산 옆에 정소산(定蘇山)이라는 얕으막한 야산이 있는데 그때 당시 소정방과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만나 승전을 즐기며 놀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옛날에 이 뉘역메 마을 앞에 강이 가로질러 흘렀으며 마을에는 욕심 많은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어찌나 부자였던지 많은 곡식을 노적으로 높이 쌓고 도롱이를 둘러친 것이 마치 산과 같았다 하며, 마을 앞 강 건너에는 거적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거적골 마을에도 큰 부자가 살고 있어 이 부자 또한 많은 곡식의 노적가리를 거적으로 둘러쳤으므로 마을 이름을 거적골이라 했다는 것이다.

뉘역메 부자와 거적골 부자는 강을 사이에 하고 서로 다투어 노적가리 높이기에 모든 욕심을 다 부려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을 조금도 도와주지 않으므로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서 노적가리가 벼락을 맞아 불타버려 망해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거적골에는 그 부자가 살았다는 장자터가 남아 있다.

뉘역메의 사산에는 임진왜란 때 이 지방 의병들이 군량미를 저장하였다고 하며 이 마을에서 조선조 말에 송방식(宋邦植)이란 분이 진사에 합격하고부터 산을 士山으로 바꾸어 쓰기 시작하였다고도 한다./소재지:부안군 주산면 사산리/제보자:김형옥(金炯玉,남,66세,부안군 주산면 덕림리/1990년 당시)/출처:전설지(1990.08.20. 전라북도 발행)


/부안21(2009·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