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동진대교가 있기 전에는 그 자리에 나루가 있어 배로 강을 건너야만 했다. 이 나루가 바로 부안 대표적 나루로 이 나룻터에는 뱃사공이 나룻배와 더불어 연중 대기하고 있다가 길손들을 건네주는 일을 해왔다. 그들은 세습하여 뱃사공 노릇을 하였는데 정기적, 항시적으로 이용하는 주민들이 거두어 주는 뱃새경과 외지인들에게서 받는 선임(船賃)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뱃새경은 이용하는 횟수에 관계없이 근처 주민들은 한 가구당 1년에 보리 1말, 또는 5되씩 2회에 걸쳐 부담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특례가 있어 지방의 관원이나 양반에게는 뱃새경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관원이나 양반들을 일일이 다 못 알아보아 시비가 생기는가 하면, 선임 없이 올라타는 나그네, 선임을 깎자고 덤비는 건달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부안21>
동진나루터는 예나 지금이나 부안의 관문이다. 동진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김제 죽산 방면으로 약 3km 쯤 가면 동진강 하구에 동진대교가 놓여 있는데, 1978년 이 다리가 놓여지기 전 까지는 나룻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넜으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부안사람들이 외지로 출세出世하려면 거의가 이 나루터에서 나룻배 신세를 져야 했는데 예로부터 이곳 나루쟁이가 유난히 거칠고 버릇이 없기로 유명하여 이 부안지방 속담에 「동진강 나루쟁이 보다도 후례자식이다」 또는 「후례스럽기가 동진나루쟁이 뺨치겠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을 정도다. 웬만큼 세도 있는 양반이 아니고는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얼른 월천(越川, 갯물이 빠지면 사람을 업어서 개펄을 건너 나룻배까지 태워주는 일)을 하여 주지도 않았다. 그러다가도 술값이라도 몇 푼 주면 겨우 움직이는데, 이 음흉한 나루쟁이가 젊은 여인네나 처녀는 월천을 잘하여 줄뿐더러 업고 가면서 여인의 엉덩이 밑에 받친 손으로 점잖지 못한 장난질도 곧 잘 한다는 것이다.
이 나루터에 부안지방의 산물이 많이 모이고 왜정 때에는 조선통운朝鮮通運의 창고도 있었으며 숯장사, 떡장사, 잡화장사에 나루터 잡놈들이 들끓었다고 하는데, 한번은 허름하게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선개(船價, 船賃, 나루삯)도 안내고 배에서 내려 휘적휘적 가버리는 것이었다. 화가 잔뜩 난 이 고약한 나루쟁이가 쫓아가서
「이보시오 당신이 뭔데 선개도 안내고 도망치는 거요?」하고 따지니까
「야 이놈아! 나도 멀쩡한 부안김가다」
하면서 두루마기를 제치고 허리춤에 차고 있는 호패를 쓱 보이니, 나루쟁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는 것이다. 부안김씨들이 이 지방의 호족이고 세도도 커서 함부로 할 수도 없으려니와 또 이 나루쟁이가 부안김씨들한테 혼줄을 당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후부터 부안에는 ‘나도 멀쩡한 부안김가다’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어쨌든 동진나루의 수입이 꽤 좋다보니 그 관할권을 놓고 부안의 원님과 김제의 원님 간에 송사가 벌어졌다. 동진강이 서로 자기네 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전라 감사는 매우 난감했다. 부안과 김제의 경계를 흘러 서해로 빠지는 이 강을 무엇을 기준하여 관할권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부안 원님이 말하기를
“내 일찍이 김제에 서진(西津)이 있다는 말 못 들었고, 부안에 동진(東津)이 있다는 말은 익히 들었습니다.(未聞金堤西津, 聞於扶安東津)”
하고 말하니 김제 원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전라감사도
“그렇다 이제 생각하니 나도 김제에 서진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없구나”하고 부안원님에게 승소 판결을 내려 주었다. 그 후로는 동진나루터 관할권 시비가 다시는 없었다고 한다.
/제보자:최형렬(崔炯烈,남67세,부안군 동진면 장등리/1990년 당시))
/출처:전설지(1990.08.20. 전라북도 발행)
/부안21(2009·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