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류성-5] 주류성(周留城)과 백강(白江)은 어디인가?

    662년 총력을 기울인 두량이성(豆良伊城) 싸움에서 백제부흥군한테 패한 신라는 타격이 컸다. 당군이 백제부흥군에 포위되어 곤경에 빠진 틈에 독자적으로 백제부흥군 세력을 발본색원하려던 태종무열왕의 야망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패전 충격으로 인해 태종무열왕은 통일의 웅지에 불을 당겨 놓고 아직 그 귀결을 보지 못한 채, 태자 법민에게 마무리과업을 물려주고 죽고 만다. 이처럼 백제부흥군은 두량이성 싸움 승리로 기세를 떨쳐 백제 부흥도 눈앞에 두는 듯 했으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복신이 모반하지 않을까 의심한 풍왕은 복신을 죽이는 자중지란에 빠지게 된다. 이때의 상황을 <구당서>백제전 용삭2년조의 …

[오! 주류성-4] 豆良伊城은 부안에 있다

    전영래 박사는 “고사비성(古沙比城)은 궁색스럽게 5만분의1 지도상에서 찾아낸 김제군 진봉면의 古沙里가 아니라 百濟五房城 중의 하나인 中方古沙夫里城으로 오늘의 고부(古阜)임을 밝혔다. <삼국사기> 지리편에도 ‘古阜郡 本 百濟古沙夫里郡 景德王 改名今因之…(고부군은 본래 고사부리군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주서(周書)’.‘북사(北史) 등의 백제전에는 국내를 오방(五房)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했는데 당 고종대에 엮어진 ’한원(翰苑)(蕃夷部 百濟)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는 ‘房은 중국의 도독(都督)과 같으니라’하고 다음과 같이 오방을 설명하고 있다. “國南二百六十里에 古沙城이 있는데 城房百五十里步요 이는 그 中房이라 房은 兵千二百人을 거스리며 國東南百里에 得安城이 있는데 城方은 一里요, 此其東方이라. 國南三百六十里에 卞城이 있는데 …

[오! 주류성-3] 두량이성(豆良伊城)은 어디인가?

    660년 백제 도성이 함락되자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자 융 등 포로들(구당서 58명, 유인원의 平百濟碑에는 7백여명,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장사 88명, 백성 12,807명, 김유신전에는 왕과 신하 93인 군졸 2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을 당에 끌고 가서 고종에게 바쳤다. 당 고종은 의자왕 일행을 접견했으나 죄를 묻거나 벌을 주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금자광록대부위위경’이란 벼슬을 주어 예우했다. 그러나 며칠 뒤 의자왕은 억울하고 분통터지고 한 많은 망국의 설움을 감내하기 벅차 이국땅에서 허망하게도 지존의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렇다고 백제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다. 투항을 거부한 백제군은 …

[오! 주류성-2] ‘장패들‘과 ’신라28장군 묘’

    상서면 소재지인 감교리 일대의 들판에는 전쟁과 관계되는 지명이 많다. ‘장밭들(長田坪) 또는 將敗坪)’, ‘신라 28장군 묘’, ‘대진터(對陣터)’, ‘되야지터(退倭地터)’ 등이 그것이다. ‘되야지터’는 정유재란 때 왜군을 물리친 연유로 유래된 지명이므로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장밭들 또는 장패평’, ‘신라 28장군 묘’, ‘대진터’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장밭들(長田坪)‘을 살펴보자면 ’將‘자가 ’長‘자로 변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싸움이 벌어졌던 곳에서 연유된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장패평(將敗坪)‘은 너무도 확연하다. 문자 그대로 ’장군이 싸움에서 패하였던 들판‘이란 뜻이다. 그리고 청등리 개암사 입구 동쪽 도로변에는 19기의 고인돌이 몰려있다. 원래 …

타루비

  상서-유정재 길을 ‘호국로’로 부안에서 상서 감교, 청등을 거쳐 유정재에 이르는 길은 ‘호국로’로 이름을 지어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변산은 평지돌출형으로 북으로는 상서까지, 남으로는 보안 남포리까지 바닷물이 들어 와 간신히 섬을 면한 형국이다. 그러다보니 개미허리 같은 유정재는 자연 군사적 요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선 국가 명운이 결린 전쟁들이 빈번했었다. 660~663년에는 백제부흥군과 일본군이 신라와 당나라 군사를 맞아 국제전을 벌였던 기벌포.백강 전투지로 비정되는 곳이다. 이 전쟁에서 백제부흥군과 일본군이 패함으로써 백제는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676년(신라 문무왕 16년)에는 신라군과 당군 간에 격전이 …

청학동으로 간 신선대 사람들

6.25전쟁 후, 변산의 신선대에는 일심교 신도들이 모여들어 18가구 80여명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었다. 일심교는 ‘유불선 동서학 합일 갱정유도’를 내세우며 세계의 모든 종교가 유교로 뭉쳐질 것을 믿는 강대성이 세운 신종교이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생활관습을 그대로 좆아 사서삼경을 읽고, 상투, 댕기머리에 흰옷을 고집하며 신학문, 현대문명과는 담을 쌓고 살다가 1970년대 중반 무렵 지리산으로 이주해 갔다. 지금의 그 유명한 “지리산 청학동”이 바로 그 곳이다. 몇 해 전(1996년 경)까지만 해도 추석 때 신선대로 성묘 오는 그들(은재필 씨 가족)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묘를 모두 이장해 가 …

[오! 주류성-1] 나뭇개 마을의 ‘배맷돌

  부안에서 개암사 가는 길에 ‘나뭇개’라는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상서면 고잔리 목포(木浦)-, 지명에서 느껴지듯이 이곳은 1900년대 초까지만해도 중선배가 드나들던 바닷가 마을이었다. 나뭇개 부근은 부안에서도 간척이 꽤 일찍 시작되었던 것 같다. 1770년대에 간척이 시작됐고, 1910년과 1934년에는 일인들에 의해 삼간리, 청서리까지 간척이 이루어져 두포천이 완전히 농토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대에 시작된 계화도간척공사로 인해 해안선은 예전에 섬이었던 계화도까지 멀리 후퇴해 있다. 계화도간척공사 이전만 해도 지금의 큰다리 부근과 궁안리 일대가 염전이었고, 창북리는 계화도를 드나들던 포구마을이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행안들판을 지나 주산의 배메산 밑까지 바닷물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