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루비

타루비. 부안-상서-유정재-영전사거리 가는 길 상서면 감교 지나 개암사 입구
못 미쳐 청등마을 도로변에 서 있다.

 

상서-유정재 길을 ‘호국로’로

부안에서 상서 감교, 청등을 거쳐 유정재에 이르는 길은 ‘호국로’로 이름을 지어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변산은 평지돌출형으로 북으로는 상서까지, 남으로는 보안 남포리까지 바닷물이 들어 와 간신히 섬을 면한 형국이다. 그러다보니 개미허리 같은 유정재는 자연 군사적 요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선 국가 명운이 결린 전쟁들이 빈번했었다.

660~663년에는
백제부흥군과 일본군이 신라와 당나라 군사를 맞아 국제전을 벌였던 기벌포.백강 전투지로 비정되는 곳이다. 이 전쟁에서 백제부흥군과 일본군이 패함으로써 백제는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676년(신라 문무왕 16년)에는
신라군과 당군 간에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 전쟁에서 신라군이 당군 4천여 명을 죽이고 승리함으로써 당 세력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1597년 왜군이 호남지방을 침략했을 때에는
이곳 호벌치에서 이 지역 의병들이 왜군을 맞아 싸웠다. 호벌치란 이름은 이곳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는 뜻으로 후에 붙여진 명칭이다. 부안군민들은 1964년에 이 고개에 정유재란 호벌치전적비를 세웠고, 이 전적 비는 1976년에 전북 지방기념물 제 30호로 지정되었다. 이렇듯 이곳은 이 지역사람들의 호국정신과 저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이 전투에서는 무명의 향촌선비들과 농민·천민·승려 계층의 무수한 의병들이 순절하고 말았다. 의병장 채홍국(蔡弘國)과 두 아들 명달(命達), 경달(慶達) 3부자를 비롯하여 의사 김영년(義士 金永年), 처사 이유(處士 李瑜) 등이 순절했다.

의사 김영년이 순절하자 그의 아들 헌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의 간을 내어서 씹었다는 전설이 문헌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처사 이유(處士 李瑜)가 순절하자 그의 부인 부안김씨는 남편을 대신하여 의병을 지휘하다가 역시 순절하였다. 이유는 당시 부안의 도곡(桃谷)에서 숨어 후진을 양성하던 중 전쟁이 나자 의병을 모아 싸웠다. 후손들은 이유 부부의 의로운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하여 그 자리에 타루비(墮淚碑)를 세웠다. 타루비는 옛날 중국 진나라 양양태수 양우(羊祐)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인데 백성들이 그 비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두예(杜預)가 붙인 이름이다. 이 비는 고예진(高禮鎭)이 글을 지었으며, 지금은 상서면 청등 도로변으로 옮겨져 있다.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1월 22일 12시 12분 16초 조회 :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