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류성-6] 주류성(周留城)과 백강(白江)은 부안에 있다

 

 

▲복신이 칭병 우거했던 곳이라하여 ‘복신굴’이라 한다./울금바위에는 3곳의 굴실이 있다. 이곳 부안사람들은 세 굴을 각각 ‘원효굴’, ‘베틀굴’, ’복신굴‘이라 부르고 있는데, 원효굴은 676년에는 원효대사가 나라 잃고 실의에 빠져있는 이곳 주민들을 위무하고자 원효굴에 와 머물렀다고 하며, ’베틀굴‘은 백제부흥운동 당시 병정들의 옷을 지어주기 위해 베를 짰던 곳이라 한다. 또 ‘복신굴’은 복신이 칭병 우거했던 굴이라 한다. 이곳 울금바위 정상에 오르면, 두량이성, 고사비성, 백강으로 비정되는 곳 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국어사전은 주류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충청남도 한산(韓山)에 있었던 백제의 성. 백제가 망한 뒤 유신(遺臣)인 복신(福信)·도침(道琛) 등이 백제 부흥을 위하여 웅거하던 곳. 처음 유인궤(劉仁軌)의 나당(羅唐)연합군의 공격을 크게 물리쳤으나 복신·도침의 내홍(內訌)으로 죽고, 증원된 나·당(羅唐)의 수륙(水陸) 대군의 공격을 받아 의거(義擧) 4년만인 663년에 성이 함락되었음.”/새 우리말 큰사전(삼성출판사)

또 다른 문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제 말기의 성. 일명 지라성(支羅成)·두량이(豆良伊)라고도 한다. 백제 멸망 후 복신(福信)·승려 도침(道琛) 등이 부흥운동을 하던 근거지로 신라 문무왕 1년(661)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한때 전세가 유리하였으나 부흥군 지휘자 사이의 반목으로 혼란해진 틈을 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663년 9월 성이 함락되어 4년간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이 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여, 충남 서천군 한산(韓山)이라는 설과 충남 청양군 정산(定山)이라는 설 및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이라는 설이 있다.”

백제, 일본, 신라, 당 등, 동아시아 4국이 운명의 일전을 벌인 국제전이었음에도, 주류성 백강전투지의 위치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1930년대 이병도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의 주류성설 및 금강 하류의 백강설과 안재홍(조선상고사),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今西龍)의 부안 우금산성의 주류성설 및 곰소만의 백강설이 대립해오다 최근 향토사학자 박성흥씨는 충남 홍성설을 제기하였다. 그는 94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주류성의 위치는 현 충남 홍성군 장곡면 대현리~산성리~광성리 일대라고 주장하였다. 박씨는 홍성 근거설을 조선 후기 지리학자인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誌)> 권5에서 제시하였다. 김정호는 대동지지 홍주목조(洪州牧條)에서 “洪州牧 本百濟周留城 唐改之 州(홍주목은 본래 백제의 주류성이었는데 당이 이를 심주라 고쳤다.)”라고 하였고 공주목조(公州牧條)에서는 “王(文武)領 金庾信等二十八將軍 與之合功 豆陵尹城(今定山) 周留城(今洪州)等 皆下也(문무왕이 명령을 내려 김유신 등 28장군으로 하여금 함께 두량이성과 주류성을 공격하도록 하여 이를 다 굴복시켰다.)”라고 구체적으로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동경대 이케우치 교수의 충남 서천군 길산천 부근의 구릉설과 연기군의 전의 지방설도 있다.

이는 역사가들이 <신.구당서><일본서기><삼국사기> 등의 기록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백제는 그 뒤로 망했으므로 자신이 쓴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기록자가 우리 땅의 지리나 지명을 정확히 파악하고 기록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조차 이 크나큰 사건을 지나치게 축소, 왜곡하여 기록하였다. 3년간의 이 전쟁을 잔적들의 소요쯤으로 보고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부실한 사료들만을 근거로 견강부회하여 주장함으로써 주류성과 백강이 도처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최근 강철종 교수(1969, 전북도지)와 전영래 박사(1976, 주류성과 백강 위치 비정 논문), 노도양 교수(1986, 정산설에서 부안설로 바꿈), 이도학 교수, 나종우 교수, 변인석 교수, 그리고 부안의 향토사학자 등이 부안의 우금산성과 동진강설을 주장하며 부안설이 차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에 부안설을 바탕으로 현장에 남아 있는 전설과 옛 지명 등을 고찰하여 기벌포(지벌포) 주류성 두량이성 등의 위치를 확인하고 당시의 해안선을 도출해내어 백강 전투의 현장을 새롭게 밝히고자 한다.

먼저 앞(두량이성은 어디인가?)에서 고사비성(古沙比城), 두량이성(豆良伊城)의 위치는 거론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문헌들을 종합하여 볼 때, 다른 여러 가지는 제외하더라도 주류성과 백강의 구비요건은 다음과 같아야 할 것이다.

1. 복신장군의 지휘소가 있고, 칭병 우거 했던 (*1)窟室이 있다.
2. (*2)‘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향했다, 했는데, 백강은 웅진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3. (*3)‘不觀氣像’으로 백제군이 무너지다.-이는 백제, 일본, 신라, 당 4국이 결전을 감행할 수 있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방대한 해안지대여야 한다.

위의 주류성.백강 구비 여건 중, 이병도의 한산의 ‘건지산성’이나, 박성흥의 홍성의 현리~산성리~광성리 일대 산성에 복신이 칭병 우거했다는 ‘굴실’이 있는지 묻고 싶다.

(*1)굴실-<동국여지승람> 부안 산천조에 “우진암은 변산 꼭대기에 있는데 암체는 둥글고 높고 거대하며 눈처럼 눈부시다. 바위 기슭에는 3곳의 굴이 있어 제마다 승려들이 기거하고 있다. 바위 정박이는 평탄하여 올라가서 조망할만 하다”

이곳 부안사람들은 세 굴을 각각 ‘원효굴’, ‘베틀굴’, ’복신굴‘이라 부르고 있는데, 원효굴은 676년에는 원효대사가 나라 잃고 실의에 빠져있는 이곳 주민들을 위무하고자 원효굴에 와 머물렀다고 하며, ’베틀굴‘은 백제부흥운동 당시 병정들의 옷을 지어주기 위해 베를 짰던
곳이라 한다. 또 ‘복신굴’은 복신이 칭병 우거했던 굴이라 한다. 이곳 울금바위 정상에 오르면, 두량이성, 고사비성, 백강으로 비정되는 곳 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2)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구당서> 유인궤전이나 백제전에 한결같이 “유인궤는 별수, 두삽, 부여융과 함께 수군과 양선을 이끌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을 만나 더불어 주류성으로 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주류성 백강이 결코 금강하류지방이 아니라 금강, 곧 웅진강을 벗어난 곳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3)不觀氣像-<일본서기>는 백강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대당(大唐)의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白村江)에 진을 쳤다. 무신(27일), 일본의 수군 중 처음에 온 자와 대당의 수군이 합전하였다. 일본이 불리해서 물러났다. 대당은 진을 굳게 하여 지켰다. 기유(28일), 일본의 여러 장수들과 백제왕이 기상(氣象)을 보지 않고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저들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중군의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대당의 군사를 쳤다. 대당은 즉시 좌우에서 선박을 내어 협격하였다. 눈깜짝할 사이에 관군이 잇따라 패배하였는데 물속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천지2년 8월조

여기에서 不觀氣像의 정체는 무엇인가? 기상을 보지 않았다는 뜻으로 조석간만의 차, 곧 물때(물과 썰물)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밀물을 따라 백강구(白江口)를 쳐나갔던 일본 수군은 얼마 후 썰물 때가 되자 꼼작 못하고 갯벌에 묻혀버렸던 것이다. 이에 당군은 좌우로부터 이를 에워싸고 공격, 배를 불태우자 일본군 사졸들은 물에 뛰어들어 빠져죽는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부안 산천조를 보더라도 “界火島 在縣西四十里 潮退卽連陸” 곧 썰물 때에는 육지와 닿는다는 것이다.

다시한번 백촌(白村), 백강(白江), 백촌강(白村江)이란 지명을 살펴보기로 한다. 당과 신라가 수로와 육로로 협격해 들어오자 의자왕은 귀양가있던 흥수에게 계책을 물었으나 원론적인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다. 흥수는

“당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기각의 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원광야에서 대적하면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백강(혹은 기벌포라고 함)과 탄현(혹은 침현이라고 함)은 아국의 요로입니다. 일부단창을 만인도 당할 수 없으니 마땅히 용사를 가려서 가 지키게 하여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白江(或云 伎伐浦) 炭峴(或云 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羅人未得過炭峴)” 라고 했다.”

그렇다면 白江(或云 伎伐浦)는 과연 어디일까? 백제 군현 중에서 <삼국사기> 지리지의 해당 지명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부군은 본래 고사부리군이요 영현이 세 있는데 그중 부녕현은 백제시대의 개화(皆火)현이고 희안(喜安)현은 백제시대의 흔량매(欣良買)현, 후의 보안이고, 상질현은 본시 상시현이다. (古阜郡 本百濟古沙夫里郡 景德王改名今因之 領縣三, 扶寧縣本百濟皆火縣 今因之, 喜安縣本百濟欣良買縣, 尙質縣本百濟仩柴縣 今因之)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 보안현과 부령현이 조선 태종 때 합쳐져 부안(扶安)이란 현재 지명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합쳐지기 전의 두 고을은 각각 어디에 있었는가.
먼저 백제시대의 흔량매현, ‘흰내말’ 곧, ‘하얀 물의 마을’ 또는 ‘하얀 강의 물’이란 뜻이 된다. 欣자의 중국 고음은 ‘hin’. 현음은 ’hsin’이다. 신라시대의 희안(喜安), 고려시대의 보안(保安), <고려사> 식화지에 보이는 희안(希安) 등은 모두 ‘흰내’를 적은 글자들이다. 따라서 백촌, 백강 등 역시 이들 뜻글자를 달리 적은 지명임은 말할 것도 없다. 백제시대 흔량매 옛터, 곧 백촌에는 白山이란 이름이 엄연히 남아 있다. 동진강은 백산의 동쪽 기슭을 구비쳐 흘러 북류하는 강으로 <문헌비고> 산천조에 ‘東津江 古稱漳水 又名息漳浦’라 하였는데, 식장(息漳) 역시 ‘희다’는 말의 빌려적은 글자임을 알 수 있다.

다음 부령현, 곧 개화현(皆火縣)은 어디에 있는가. <동국여지승람>에는 ‘扶寧, 或稱戒發’이라 하였다. 개화, 계발은 모두 <삼국사기>에 보이는 기벌(伎伐), 지화(只火) 등과 같은 말이다. 현재도 계화도(界火島)란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현지에서는 지금도 ‘지화도’라고 부르는 주민도 있다.
따라서 백강구에 위치한 문제의 기벌포는 바로 이 계화현의 상륙지점인 포구로 백강이나 백촌의 위치도 이 일대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백강에 대해서는 성충, 흥수의 얘기 속에 나타난 것으로서 그곳의 지리적 여건이 험애하여 배를 나란히 띄울 수 없는 곳이며, <구당서><당서>의 ‘동승안’, ‘출좌애란 표현처럼 그곳은 남북으로 흐르는 강어귀라는 것도 이미 말한대로이다. 이는 서안인 현 백산성이다.

이 외에도 부안에는 주류성・백강전투를 뒷받침할만한 지명이나 설화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주류성의 지리적 고찰

부안은 전라북도 서남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진강과 줄포만 사이에 보안현(삼국시대에는 흔량매, 희안)과 부령현(삼국시대에는 개화, 개발, 지화, 기벌포(지벌포))이 합쳐진 이름이다.
면적 1억 5천만평 가운데에는 두포천이 가로 흐르고, 동엔 전영래 박사가 주장하는 백강인 동진강이 있으며, 밖으로는 김제 피성(避城, 일본서기 天智紀 2년조의 피성은 다른 판본에는 辟城으로 기록되어 있다.)과 백골제, 고부(古沙比城) 금사동산성과 고부만과 눌제가 있고, 안으로는 반곡리산성, 백산산성, 사산(전영래 박사가 주장하는 豆良伊城), 소산리산성, 부곡리산성 등이 있으며, 남으로는 일본 이마니시가 백강이라 주장하는 줄포만이 있다. 또한 주을포, 제안포, 유천리 토성, 검모포진이 있고, 서로는 사투봉, 격포진, 소격산성, 고사포만, 대항리산성, 의상산성, 장신리산성, 석불산성이 있고, 북으로는 효산 스님과 신규호, 노도양 교수가 백강이라고 주장하는 두포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구지산성, 용화동산성, 당후리산・상소산성(부안읍성) 등이 사방으로 고루 배치되어 천혜적 국방상 요새지로 되어 있다. 부여와의 거리는 120km, 군산과 해로로 30km, 김제와 20km, 고부와 20km, 덕적도에서 지벌포까지는 93해리 지점으로 변인석 교수가 백강이라 주장한 동진강 하구에서 지벌포 하구까지 20km의 해안이 흐르고 있다.

백강의 지리적 고찰

백강은 주류성의 방어만이 아니고, 백제권 전방에 영향을 미치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내포설이나 금강하구(웅징강)설 등은 당군이 공주와 부여를 점령한 후 계속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강이라고 볼 수가 없다.
부안에는 동진강, 줄포만, 두포천 등, 세 곳의 강이 백강이라 주장되고 있으며, 변인석 교수는 부안 앞 해안 일대를 백강이라 주장하고 있다.
소정방은 덕적도를 떠나 고군산에 대 부대를 주둔시키고, 금강하구로 가 김법민과 만나 주류성 공격계획을 세운 후 기벌포에 상륙, 동승안인 상소산에 올라 백제 주력부대가 있는 상서면 가오리 대진터의 전황을 살폈다.
백제 일본군 주력 주둔지인 대진터(상서면 가오리)는 두량이성과 대공리산성, 호치산성, 동림산성이 연결되어 있었다. 4차례에 걸친 대진터, 장패평 결전에서 승리한 나당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백강(두포천과 동진강)에서 패한 부흥군은 동진강 상류 태인천(賓骨壤)을 거쳐 보성 조양만을 통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여 667년 일본으로 국호를 개정하고 일본에 백제문화의 뿌리를 내렸고, 풍왕은 줄포만으로 빠져나가 위도 왕등도에 정박하였다가 고구려로 도망했다. 왕등도에 왕이 올라 왔다 해서 상왕등도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신라 28장군 묘로 전해지고 있는 장군총이 지금도 상서면 감교리(將敗坪) 장밭들에 있다. 또한 장패들에서 서남쪽 개암저수지 밑 산자락에는 보령원’이라는 사당이 있는데,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김유신 장군이 당군과 함께 백제와 싸워 이기자. 신라왕은 이 일대의 땅을 사폐지지로 내렸다고 한다. 장패평도 이 전쟁으로 얻어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싸움은 졌어도 이곳 주민들의 상처가 너무 커서 신라 행정에 호응을 안하자, 676년 북의상 (의상대) 남원효(원효방) 사복 세 분을 보내서 선무 공작을 할 때 처음 왔던 삼막실이 있고 개암사 대웅전 앞에 원효가 야단법석을 마련할 때 괘불을 걸어놓은 당간이 아직도 남아 있다./참고문헌:’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전영래)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