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류성-4] 豆良伊城은 부안에 있다

 

 

▲<왼쪽>한산을 두량이성으로 오인한 거리도
<오른쪽>두량이성 침공과 고사비성의 관계도

전영래 박사는 “고사비성(古沙比城)은 궁색스럽게 5만분의1 지도상에서 찾아낸 김제군 진봉면의 古沙里가 아니라 百濟五房城 중의 하나인 中方古沙夫里城으로 오늘의 고부(古阜)임을 밝혔다. <삼국사기> 지리편에도 ‘古阜郡 本 百濟古沙夫里郡 景德王 改名今因之…(고부군은 본래 고사부리군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주서(周書)’.‘북사(北史) 등의 백제전에는 국내를 오방(五房)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했는데 당 고종대에 엮어진 ’한원(翰苑)(蕃夷部 百濟)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는 ‘房은 중국의 도독(都督)과 같으니라’하고 다음과 같이 오방을 설명하고 있다.

“國南二百六十里에 古沙城이 있는데 城房百五十里步요 이는 그 中房이라 房은 兵千二百人을 거스리며 國東南百里에 得安城이 있는데 城方은 一里요, 此其東方이라. 國南三百六十里에 卞城이 있는데 城方一百三十步, 此其南方이라, 國西三百五十里에 刀先城이 있는데 城方二百步 此其西也라. 國東北六十里에 熊津城이 있는데 固麻城이라고도 부르는 이 성은 方이 一里半이요, 此其北方이라‘ 한 것이다.”

북방성이 웅진성이라면 이미 사비성에 천도한 이후의 상태를 적은 것인데 동방 득안성은 지금의 은진이요, 중방고사성은 ‘國南二百六十里’라 한 거리상으로 보아도 지금의 고부가 틀림없다. ‘삼국사기. 지리3편’을 보면 ‘古阜郡 本百濟古沙夫里郡 景德王改名今因之, 領縣三, 扶寧縣本百濟皆火縣…..喜安縣本百濟欣良買縣 今保安縣 尙質縣本百濟上柒縣’이라 하여 고부군에는 부령. 희안(후에 합쳐서 부안), 상질(후의 흥덕)의 3개현이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본기’에서 ‘삼월오일 지중로’라 한 것도 중로란 말이 어떤 루트를 뜻하는 게 아니고 ‘中房’이란 지방을 달리 적은 표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두량이성은 고부 부근 즉 부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두량이성은 부안군 주산면에 있는 ‘사산’

개암사 뒷산에 있는 주류성(울금바위)에 올라 고부 쪽을 바라보노라면 바로 발아래에 삿갓모양의 산(해발 100여 미터) 하나가 누워 있고, 그 산 너머의 들판은 고부에 이어져 있다. 오늘의 지도에는 삿갓 笠자를 써서 ‘笠山’이라고 표기해 놓았으나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산이 도롱이를 닮았다하여 ‘도롱이뫼’라 부르며, 한문으로는 도롱이 사(蓑)자를 써서 ‘蓑山’, 또는 ‘뉘역뫼’라고 부른다. 패망한 백제는 역사를 남기지 못했고, 백제패망 역사는 당, 신라, 일본에 의해 쓰여졌다. 그러니 우리 말 ‘도롱이 뫼’를 한문으로 옮길 때 ‘豆良伊’로 표기할 개연성은 높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산 정상에 토루(土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백제군이 주류성의 전방위 진지인 이 천험의 요새를 지키며 시간을 끌자 나당군은 식량이 떨어져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 사산에 이엉을 엮어서 낟가리처럼 쌓아놓고 군량미를 많이 쌓아놓은 것처럼 위장하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는 전설이 이 지방에 남아있다. ‘뉘역뫼’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한다.
위의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신라군은 고사비성에 진을 치고 고부천을 중간에 둔 채 7km 떨어진 두량이성을 36일동안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패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전설이 또 하나 있다. 주산면 사산리 산돌마을 동쪽을 ‘맷돌리’라고 부른다. 백제군이 이 마을에 진을 치고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마을 뒷산에 보리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쌓아 노적가리인 양 위장을 해놓고 산 밑에서는 큰 맷돌을 돌려 이 소리가 멀리 들리게 하여 군량미가 충분하고 병사도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신라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백제군이 승리하였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신라가 총력전을 편 두량이성 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곤경에 처한 당군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대병을 출병시켜 백제의 근거지를 선점하여 당군의 기세까지 꺾어 백제 영토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김춘추의 전략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그러니 660년부터 백제가 완전히 망할 때인 663년까지 부안의 동진강 하구(백산성 포함), 계화도, 대벌리.창북리 연안, 상서 일대, 사산, 배메산 등 부안 일대는 당, 신라, 일본, 백제 4국의 국제 전쟁터였던 것이다.

설인귀에 답하는 문무왕의 글에 당시 두량이성 전투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익년(현경 6년)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이 점점 많아지고 웅진 강동의 지방을 침략하므로 웅진에 있는 한병 1,000명이 가서 적도를 치다가 도리어 적에게 대패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패배한 이래로 웅진에서의 청병이 밤낮으로 상계(相繼)하였소. 이 때 신라에서는 역병이 돌아 병마를 징발하기 어려웠으나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서 주류성을 공격하였소. 그러나 적은 아군의 과소함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우리는 병마를 크게 잃고 이득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 편에 귀속하였소. 복신이 승세를 타고 재차 부성을 에워싸니 이로 인해 웅진과 통하는 길이 차단되어 염시의 절핍을 보게 되었소. 우리는 곧 건아를 뽑아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핍곤을 구하였소. — 중략 —

이에 이르러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은 국토의 전역을 거의 수복하고 수도인 사비성의 수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고립된 유인원 등은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복신은, “대사(大使)들이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는지,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전송하겠노라.”고 조롱하였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그러나 눈앞의 성공을 앞두고 내분이 일었다. 두량이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복신이 도침을 처형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까지 부흥운동은 복신과 도침의 두 세력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승려 도침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는 승려 출신으로서 사원 세력을 장악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미륵사는 2천여명의 승려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라 하는데 이 승려들의 집단은 유사시에 군사적 조직으로 바뀔 수 있었다. 도성이 함락되자 도침은 이들 승려들을 주축으로 한 부흥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독자적으로 부흥운동을 펼치다가 복신과 연합하였던 것이다.
지휘 체계가 이분화 되어 일사분란한 작전 수행에 어려움을 느끼던 복신이 두량이성 전투를 승리를 이끌고 주도권을 장악하자 도침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의 모든 병권이 복신에게 돌아갔으나 백제부흥은 끝내 무산되고 만다./참고문헌:‘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전영래)’


/허철희
2003년 0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