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류성-5] 주류성(周留城)과 백강(白江)은 어디인가?

 

 

▲개암사 뒷산에 있는 우금산성 (삼국시대, 일명 주류성)/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이곳이 백제가 망한 후 백제 부흥을 위하여 복신이 일본에 망명해 있는 왕자’부여풍’을 받들고 유민을 규합하여 최후 항쟁을 벌였던 「주류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곳이다.

662년 총력을 기울인 두량이성(豆良伊城) 싸움에서 백제부흥군한테 패한 신라는 타격이 컸다. 당군이 백제부흥군에 포위되어 곤경에 빠진 틈에 독자적으로 백제부흥군 세력을 발본색원하려던 태종무열왕의 야망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패전 충격으로 인해 태종무열왕은 통일의 웅지에 불을 당겨 놓고 아직 그 귀결을 보지 못한 채, 태자 법민에게 마무리과업을 물려주고 죽고 만다.

이처럼 백제부흥군은 두량이성 싸움 승리로 기세를 떨쳐 백제 부흥도 눈앞에 두는 듯 했으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복신이 모반하지 않을까 의심한 풍왕은 복신을 죽이는 자중지란에 빠지게 된다. 이때의 상황을 <구당서>백제전 용삭2년조의 진현성싸움 기사에 이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때에 복신은 이미 병권을 쥐고 흔들어 부여풍과의 사이에 서로 시기가 생겼다. 복신은 거짓병을 칭하여 (*1)굴실(窟室)에 숨고 부여풍이 병문안 오기를 기다렸다가 기습, 왕릉 살해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먼저 눈치차린 부여풍은 심복을 이끌고 복신을 끌어내어 살해하고 말았다.”

이렇게 내분으로 인해 백제의 상층부가 흔들리자 신라와 당은 이를 백제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부리뽑을 기회로 보고 총공격을 서둘렀다. 유인궤가 본국에 구원병을 청하자 당고종은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로 하여금 군사 7,000을 거느리고 가서 유인원을 돕도록 하였다.

당군은 총공격 목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가림성(加林城:부여군 임천면)을 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유인궤는 ‘병법에 실한 곳은 피하고 허한 곳을 치라 하였는데 가림성이 굳고 험하니 공격하자면 군사가 상하고 지키자면 날짜가 걸리게 되지만,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그 떼가 모였으니 만약 이긴다면 여러 성이 저절로 항복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며 주류성을 먼저 치기를 주장했다. 결국 나당연합군의 공격 목표는 백제군의 중심 거점인 주류성으로 결정되었다.

백제의 풍왕은 고구려와 왜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응하여 일본은 선박 1천여 척에 군사와 물자를 싣고와 백강 어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마침내 나당연합군은 육로와 수로로 나누어 주류성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663년 8월의 일이었다.

17여척의 전선을 거느린 당 수군은 1천여척의 전선을 거느린 일본 수군을 향하여 감히 공세를 취하지 못했는데, 10여일이 지나자 성급한 일본의 여러 장수들은 “우리가 돌격한다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하며 전선을 이끌고 당 수군의 한가운데를 돌파하려 했다. 당군이 이를 보고 좌우로부터 협격하니 뱃머리를 돌릴 수 없게 되어 잠깐 사이에 일본 수군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 때의 상황이 <구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인사, 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 및 별장 두상, 부여융은 수군과 식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2)웅진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함께 주류성으로 향하였다. 인궤가 부여풍의 무리를 백강 어귀에서 만나 네 번 싸워 다 이기고 배 400척을 불태우니 적의 무리는 궤멸하였고, 부여풍은 몸을 피해 도망하였다.”

또, 당시의 처절했던 백강 전투를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을 8월, 임오(壬午)가 초하루인 달의 갑오(13일)에 신라는 백제왕이 자기의 양장(良將)을 베인 까닭에 곧바로 백제에 들어가 먼저 주유를 빼앗으려고 도모하였다. 이에 백제는 적의 계략을 알고서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지금 듣자하니 대일본국의 구원장수인 이호하라노 기미오미가 용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여러 장수들은 미리 도모함이 있기를 바란다. 나는 스스로 백촌(白村)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접대하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무술(17일), 적장이 주유에 와서 그 왕성을 에워쌌다. 대당(大唐)의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白村江)에 진을 쳤다. 무신(27일), 일본의 수군 중 처음에 온 자와 대당의 수군이 합전하였다. 일본이 불리해서 물러났다. 대당은 진을 굳게 하여 지켰다. 기유(28일), 일본의 여러 장수들과 백제왕이 (*3)기상(氣象)을 보지 않고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저들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중군의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대당의 군사를 쳤다. 대당은 즉시 좌우에서 선박을 내어 협격하였다. 눈깜짝할 사이에 관군이 잇따라 패배하였는데 물속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갈고는 수십인을 죽이고는 마침내 전사하였다…..”/천지2년 8월조

어떻게 1천여척의 일본 군선이 170여척에 지나지 않는 당 수군에게 무너지고 만 것일까? 그리고 백제왕의 ‘不觀氣像’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위의 기록에서 보듯 백강 전투의 패배 원인은 지리적 조건과 기상을 고려치 않은 백제왕과 일본 장수들의 무모한 작전에 있었다. 즉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가 없었다 했는데 이는 썰물로 인해 수심이 급격히 낮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후 당은 부흥군의 총본영인 주류성을 공격하였고 9월 7일 마침내 함락시켰다.

663년 9월 7일 주류성이 무너짐으로써 백제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풍왕은 고구려로 몸을 피하고 잔여세력은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 때의 모습을 <일본서기(日本書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9월 신해가 초하루인 정사(7일)에, 백제의 주유(州柔)성이 비로소 당에 함락되었다. 이 때에 나라 사람들이 서로 ‘주유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가 있겠는가. 다만 저례성(저禮城)에 가서 일본 장군들을 만나 사건의 기밀한 바를 논의하자.’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본래 침복기성(枕服岐城)에 있는 처자들을 가르쳐 나라를 떠날 생각을 알리게 하였다. 신유(11일)에는 모저(牟저)를 출발, 계해(13일)에 저례에 이르렀다. 갑술(24일)에 일본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餘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晉首), 억례복류(憶禮福留)는 백성들과 함께 저례성에 이르렀다. 이튿날 배가 처음으로 일본을 향해 떠났다.”
(<일본서기> 권 27, 천지2년 9월조)/참고문헌: 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전영래)


/허철희
2003년 0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