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류성-1] 나뭇개 마을의 ‘배맷돌

누가 이곳에 와서 바다를 연상하겠는가? 그러나 이곳은 ‘목포’라는 마을 이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1900년대 초까지도 중선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었다. 사진은 그 당시 배를 매었던 ‘배맷돌’이다.

 

부안에서 개암사 가는 길에 ‘나뭇개’라는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상서면 고잔리 목포(木浦)-, 지명에서 느껴지듯이 이곳은 1900년대 초까지만해도 중선배가 드나들던 바닷가 마을이었다.

나뭇개 부근은 부안에서도 간척이 꽤 일찍 시작되었던 것 같다. 1770년대에 간척이 시작됐고, 1910년과 1934년에는 일인들에 의해 삼간리, 청서리까지 간척이 이루어져 두포천이 완전히 농토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대에 시작된 계화도간척공사로 인해 해안선은 예전에 섬이었던 계화도까지 멀리 후퇴해 있다. 계화도간척공사 이전만 해도 지금의 큰다리 부근과 궁안리 일대가 염전이었고, 창북리는 계화도를 드나들던 포구마을이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행안들판을 지나 주산의 배메산 밑까지 바닷물이 들고나는 만을 이루고 있었다. 또 지금의 청호저수지, 큰다리, 나뭇개, 사산저수지로 이어지는 갯골(두포천)은 유정재 밑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구암리, 용서리, 지석리 일대의 고인돌이 세워질 무렵에는 그 일대 모두가 바닷가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행안면 진동리 고인돌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이곳을 지나며, 이곳이 예전에 바다였다는 흔적이 뭐 없을까? 찿던 중에 효산스님으로부터 배를 매었던 ‘배맷돌’ 이 나뭇개 마을 어디엔가 있노라는 말씀을 듣고 문화관광과 노성일과 찿아 나섰다. 마침 마을 안길 포장공사를 하고 있는 현장이 있어서 가봤더니, 1.5m 정도의 높이에 지름 40∼50cm 정도의 돌기둥이 현장 한 켠에 있었다. 포크레인 기사 말에 의하면 마을 안길 땅 속에 묻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부안문화원 채규병 국장에게서 고증을 얻고, 상서농민회 회원들의 도움으로 1998년 12월 24일, 마을 입구 모정에서 서쪽으로 300여m 지점, 두포천 수문 옆에 배맷돌을 세워 놓았다. 마을 분들의 말에 의하면 논 가운데 깊숙한 곳에 한 기가 더 있다고 한다. 그까짓 돌기둥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이곳이 바로 663년 백제멸망을 가져 온 주류성·백강전투지로 비정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자 의자왕은 소정방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백제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다. 항복의 대열에서 튀쳐나온 흑치상지가 항전의 횃불을 올리자 곳곳에서 백제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복신, 도침 등은 일본에 가 있던 백제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하고, 이후 3년동안 주류성을 왕성으로 삼아 백제부흥을 꾀했다. 그 후 두량이성 싸움의 승리로 기세를 떨치며 백제부흥도 목전에 두는 듯 했으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등, 내란으로 인해 그 세력이 쇠하여 가던 중, 663년 소정방은 덕적도를 떠나 고군산에 대 부대를 주둔시키고, 금강하구로 가 설진하고 있던 김법민과 주류성 공격작전을 세운 다음 백강으로 침입하여 왔다. 일본 원정군과 백제 부흥군의 주력부대는 지금의 상서면 가오리에 진을 치고 나당연합군을 맞아 싸웠으나, 663년 9월 7일 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주류성은 무너지고 백제는 망하고 말았다. 이 무너진 주류성·백강 전투에서 살아 남은 백제인들은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다 하였으니 어찌 능히 고향땅에 돌아갈 수 있으리요. 데례성으로 가서 일본군장과 만나서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할 수 밖에 없도다.,라고 한탄하며 보트피플 신세가 되어 일본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백제, 일본, 신라, 당 등, 동아시아 4국이 운명의 일전을 벌인 국제전이었음에도, 주류성 백강전투지는 전국 도처에 있는 형편이다. 망한 백제는 역사를 남기지 못했고, 역사가들은 ‘구당서’ ‘일본서기’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만 의존하다 보니 홍성설, 한산설, 연기설, 심지어는 경기도 광주설까지도 주장하는 이가 있다.

개암사 사적기나 연혁에 의하면 634년에 묘연대사가 개암사와 묘암사를 창건하였고, 645년에는 의자왕이 백제의 별궁인 주류성을 둘러보고 갔다고 한다. 676년에는 원효대사가 나라 잃고 실의에 빠져있는 이곳 주민들을 위무하고자 원효방에 와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1199년 이규보가 이곳을 둘러 본 후 쓴 ‘남행월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487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부안 산천조 우진암 란에서도 재확인 된다.

또 1979년 우연히 발견된 개암사중건사적기 “별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원효방의 상량문에 이르기를 이 절은 묘연이 지었는데 도침이 무왕의 조카 복신과 더불어 사람을 모아 솔병하여 이 산의 주류성을 근거지로 왕자 부여풍을 맞이하여 왕으로 받들었다. 왜병 수만과 400척의 전함이 와서 풍을 도우니 그 세력이 크게 떨쳤다. 왜병은 백강의 오른쪽 언덕에 산을 뒤에 두고 설진하였는 바, 신라왕 김법민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수를 보내고, 당나라의 수군과 함께 친히 전장에 왔다. 유인궤, 두상과 부여융(의자왕의 아들로 당나라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은 수군과 군량을 싣고 와 뱃머리를 왼쪽으로 돌려, 즉 동쪽을 향해 백강에 들이닥쳐 뭍의 김유신 등과 합쳐 주류성을 치고, 백강의 입구에 있던 지벌포에서 4회에 걸쳐 싸운 결과, 왜선 400척이 불타고 바닷물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하략.” 이 글을 쓴 밀영은 정유재란 후 개암사를 재건, 중수하고 개암사중수기를 쓴 4명 중의 한 사람으로 개암사 근처에 주류성이 있음을 엄연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1771년 안정복이 청양의 정산설, 1861년에 김정호가 홍주(홍성)설을 들고 나와 이설이 시작되었으나, 타당성이 없어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1928년 일본의 今西龍은 백제사 연구에서 주류성 부안설을 발표하였고, 1930년 안재홍이 조선상고사에 주류성 부안설을 발표하였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논란이 그쳤어야 할 터인데, 느닷없이 단재 신채호가 충남 연기설을 주장하고는 학설은 내놓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이병도는 ‘주류성은 한산 부근에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이 말 한 마디가 발전되어 역사책에까지 오르게 되었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실족사고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1996년 11월 25∼26 양일간, 이병도의 후학 3인이 부안의 향토사학자들과 함께 한산의 건지산성을 답사하는 자리에서 ‘스승(이병도)이 이 곳에 한 번만 와 봤어도 이런 엄청난 과오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한산설’ ‘연기설’ ‘홍성설’ 등 이설을 주장한 역사가들이 단 한번이라도 이곳에 와 봤더라면, 그리고 삼국시대 이곳의 해안선 지도를 그려봤더라면 그런 엄청난 오기를 남길 수 있었을까? 허허벌판에 서 있는 이 자그마한 ‘배맷돌’이 주류성·백강 전적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주류성의 지리적 고찰>
동으로는 전영래 교수가 주장하는 백강인 동진강이 있다.
동진강 밖으로는 김제 피성과 벽골제, 고부(고사비성) 금사동산성과 고부만과 눌제가 있고,
안으로는 반곡리산성(동진 안성리), 구지리토성(동진 구지리), 용화동토성(계화 창북리), 염창산성(계화 창북리), 수문산토성(계화 창북리), 상소산성(부안읍성), 백산성, 사산리 토성(주산 두량이성으로 비정), 소산리산성(주산)이 있으며,
남으로는 일본의 금서룡이 백강이라 주장하는 줄포만이
또 노도양 교수가 백강이라 주장하는 두포천이 사산저수지, 나뭇개, 큰다리, 청호지를 거쳐 바다로 흐른다.
부여와의 거리는 120km, 군산은 해로 30km, 김제 20km, 고부 20km, 덕적도에서 지벌포까지는 93해리 지점으로 변인석 교수가 백강이라 주장한 동진강하구에서 지벌포 하구까지 약 20km 해안이 이어져 있다.

<백강의 지리적 고찰>
백강은 주류성의 방어만이 아니고, 백제권 전방에 영향을 미치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내포설이나 금강하구설 등은 당군이 공주와 부여를 점령한 후 계속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강이라고 볼 수가 없다.
부안에는 동진강, 줄포만, 두포천 등, 세 곳의 강이 백강이라 주장되고 있으며, 변인석 교수는 부안 앞 해안 일대를 백강이라 주장하고 있다.
소정방은 덕적도를 떠나 고군산에 대 부대를 주둔시키고, 금강하구로 가 김법민과 만나 주류성 공격계획을 세운 후 지벌포에 상륙, 동승안인 상소산에 올라 백제 주력부대가 있는 상서면 가오리 대진터의 전황을 살폈다.
백제 일본군 주력 주둔지인 대진터(상서면 가오리)는 두량이성과 대공리산성, 호치산성, 동림산성이 연결되어 있었다. 4차례에 걸친 대진터 장패평 결전에서 승리한 나당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참고문헌:전영래<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 강성채<주류성과 백강>
-주류성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www.puan.pe.kr 허정균의 작은 한반도 변산반도-‘주류성 가는 길’ 참조.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1월 20일 17시 08분 2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