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류성-7] 원효가 변산에 온 까닭

 

 

▲개암사 뒷산 울금바위에는 남. 북. 서 3곳에 굴실이 있다. 사진은 남쪽 절벽 중간에 있는 굴실로 ‘원효방’으로 추정되는 굴실이다.

개암사 뒷산이 이고 있는 울금바위에는 남. 북. 서 3곳에 굴실이 있다. 북쪽의 굴실은 3곳 중 제일 협소하며 백제부흥운동 당시 군사들을 입히기 위해 베를 짰다해서 베틀굴이라 전해오고 있으며, 서쪽의 굴실은 3곳 중 가장 큰 굴로 역시 백제 부흥운동 당시 복신이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던 굴이라하여 복신굴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남쪽의 굴실은 바위절벽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지표에서 20여 미터나 되는 암벽중간에 있어 사다리가 없이는 도저히 오를 수가 없는 곳이다. 굴실의 크기는 6∼7평정도이고, 이 석굴 바로 옆에 3평 크기의 또 하나의 굴실이 있다. 이 굴실에서 바라보면 변산의 산들이 첩첩이 발아래 포개져 들어온다. 3곳의 석굴 중 가장 경관이 뛰어나다. 이렇듯 경관이 좋고, 이규보가 남긴 ‘남행월일기’의 글에서 처럼 암벽 중간에 있어 사다리가 없이는 도저히 오를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종일 햇볕이 들어 안온하다는 점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수도했다고 전해오는 ‘원효방’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대문장가 이규보(1168고려 의종22~1241고종28)는 1199년 12월에 전주목 사록(司錄)에 부임하여 변산의 벌목책임자로 변산에 와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되는데 바로 원효방을 가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먼저, 이규보의 글을 통해 원효방의 모습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부령 현재(縣宰)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명과 함께 원효방에 갔다. 나무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어 다리를 떨면서 올라가니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는 듯 했다. 종종 호랑이와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머물었던 곳이다. 원효가 와서 살자 사포가 모셨는데 차를 달여 원효에게 드리려고 했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게 생각하던 중, 물이 갑자기 바위틈에서 솟아나왔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차를 달였다고 한다.
원효방은 겨우 여덟 자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쳐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헤어진 누비옷에 도통한 모습이 고고하였다. 방 한 가운데를 막아 내실과 외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 하나, 신 한 컬레, 찻잔과 경궤(經軌)만 있을 뿐, 취사도구도 없고 시중드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에 참예할 뿐이라 한다.“

그렇다면 원효는 왜 변산에 왔을까?

663년 9월 7일 백제부흥군은 나당연합군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백제는 완전히 망한 것이다. 그렇다고 白江・伎伐浦 일대에서 전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백제 멸망을 가져 온 결전이 있은 지 13년만인 676년(문무왕 16년), 白江・伎伐浦 일대에서는 또 한번의 전쟁이 벌어졌다.그 해 11월, 沙滄施得의 신라 수군과 설인귀가 이끄는 당 수군 사이에 결전이 역시 伎伐浦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대소 22전 끝에 4천여 명의 당 군의 목을 자름으로써 신라는 드디어 당 세력을 완전히 이 땅에서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이처럼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백제인들의 정서와 생활까지는 일체화할 수 없었다.이 해에 원효는 화엄종을 연 의상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변산 땅에 왔다. 삼국통일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를 지은 것도 삼국통일의 원리와 이념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법화경≫에 ‘부처님이 세 사람에게 각각 다르게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임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 셋은 모두 커다란 한 그릇에 담겨지는 것’이라고 씌어 있음을 찾아내고 주목했던 것이며 이를 널리 폄으로써 사상통일을 꾀하려 하였다. 즉,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다 일시적인 것이며, 보다 더 큰 한 그릇 속에 하나로 뭉쳐 합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셋이 하나로 되어진다는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이야말로 원효가 외친 삼국통일의 이념이었다.

그는 개암사 부근 굴실에서 수행에 정진하며,나라 잃고 시름에 잠겨있는 백제유민들의 유화에 힘썼다. 개암사에는 수많은 백제 유민들이 원효의 설법을 들으려 몰려들었고, 원효는 이들에게 야단법석(野壇法席:야외에서 베푸는 강좌)를 마련하였다. 개암사 대웅보전 앞에는 그때 부처님을 걸었던 괘불대 당간이 아직도 남아있다./참고문헌:주류성과 백강(강성채)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