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류성-2] ‘장패들‘과 ’신라28장군 묘’

 

 


▲상서면 청등리 개암사 입구 도로변에 있는 고인돌 군. 이 지역에서는 이 고인돌군이 ‘신라28장군 묘’라는 전설이 있다.

상서면 소재지인 감교리 일대의 들판에는 전쟁과 관계되는 지명이 많다. ‘장밭들(長田坪) 또는 將敗坪)’, ‘신라 28장군 묘’, ‘대진터(對陣터)’, ‘되야지터(退倭地터)’ 등이 그것이다. ‘되야지터’는 정유재란 때 왜군을 물리친 연유로 유래된 지명이므로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장밭들 또는 장패평’, ‘신라 28장군 묘’, ‘대진터’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장밭들(長田坪)‘을 살펴보자면 ’將‘자가 ’長‘자로 변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싸움이 벌어졌던 곳에서 연유된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장패평(將敗坪)‘은 너무도 확연하다. 문자 그대로 ’장군이 싸움에서 패하였던 들판‘이란 뜻이다.

그리고 청등리 개암사 입구 동쪽 도로변에는 19기의 고인돌이 몰려있다. 원래 28기 였다고 하나 부안-고창간 도로확장 공사를 하면서 일부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 고인돌은 선사시대 유적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 지방에서는 ’신라 28장군 무덤‘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위의 내용과는 다르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28장군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황제가 위위 장군 손인사를 보내어 병사 40명을 거느리고 덕물도(인청광역시 옹진군 덕적도)를 거쳐 웅진부 성에 오니, 문무왕이 김유신 등 28장군을 거느리고 가서 합쳤다…”

한편 고인돌이 있는 곳에서 남서쪽으로 500여미터 개암저수지 아래에는 ‘보령원’이라는 사당이 있는데,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김유신 장군이 당군과 함께 백제와 싸워 이기자. 신라왕은 이 일대의 땅을 사폐지지로 내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근에서 도대체 어떤 싸움이 무슨 연유로 벌어졌단 말인가?

바로 이곳이 663년 백제 멸망을 가져 온 ‘주류성. 백강전투’지로 비정되는 곳이다. 660년 백제 의자왕이 당군 소정방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백제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다. 무왕의 조카 복신이 솔병하여, 중 도침과 함께 주류성(개암동)에 웅거하고 일본에 가 있던 백제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삼고 백제 부흥을 꾀했다. 이때의 상황을 <구당서>는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백제 승려 도침과 구장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을 근거로 반하였다. 왜국에 사절을 보내 옛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세웠다.(百濟僧道琛 舊將福信 率衆據周留城 以叛 遣使往倭國 迎故王子扶餘豊 立爲王)”

복신이 주류성에 웅거하고 백제부흥의 기치를 들자, 백제의병들은 주류성으로 몰려들었다. 기세가 오른 백제군은 사비성의 남령(부여 금성산)에 올라 4~5개의 기지를 세우고 그곳에 둔취하여 기회를 보며 사비성을 공략하였다. 이에 유인원의 약탈에 시달리던 백제 사람들의 당에 대한 적대의식이 고조되어 20여성이 복신의 부흥군에 호응하였다. 이로써 사비성은 외부와 고립되고 나당군은 위기에 빠졌다. 이 시기에 위기에 처한 사비성에 있는 당군의 상황이 당장(唐將) 설인귀에 답하는 문무왕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굶주린 당군은 인육까지 먹었던 것이다. 다음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5년조의 기록이다.

“대군(소정방의 군대)이 철수한 후에 적신 복신이 강서에서 일어나 패잔병을 취집하여 부성을 위박하면서 먼저 외책을 파하여 군자를 탈취하고 다음에 부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몰될 지경이었으며, 또 복신이 부성에 근접한 사처에 성을 쌓고 위수하여 이로 인해 부성에 출입할 수 없었소. 모(문무왕)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군사를 푸는 동시에 사면의 적성을 죄다 공파하여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양식을 운수하여 드디어 1만명의 한병으로 호구의 위난을 면하게 하고, 진지에 머물고 있는 주린 군사들이 아이를 바꿔 서로 먹는 일이 없게 하였으며(留鎭餓軍 無易子而相食) –하략–”

이에 당고종은 좌위중랑장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백제로 보내고 신라 무열왕은 직접 사비성으로 향하였다. 왕문도가 갑자기 병을 얻어 급사하자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과 함께 10월 9일 이례성(지금 부여의 동남쪽)을 공격하여 10월 18일 함락시키고 사비성 남쪽 백제군의 군책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복신은 무열왕의 친정에 크게 패하긴 했으나, 주류성으로 물러나 도침과 힘을 합쳐 전열을 정비한 후 여러 차례 사비성을 공격하여 위세를 떨쳤다.

위기에 처한 당군은 본국에 급보를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당고종은 신라왕에게 조서를 내려 출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신라왕 김춘추는 당군의 구원 요청에 따라 총력을 다하여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의 주력부대가 있는 주류성으로 향했다. 명분은 사비성의 구원에 있었으나 목표는 백제군의 근거지이자 피난 정부의 도읍지인 주류성이었다.

그 후에도 백제부흥군은 두량이성 싸움에서 승리해 백제부흥도 목전에 두는 듯 기세를 떨쳤으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등, 내란으로 인해 그 세력이 쇠하여 가던 중, 663년 다시 출병한 소정방의 당군과 신라 김법민군을 맞아 지금의 상서면 가오리 일대에 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주류성은 무너지고 백제는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듯 상서의 가오리 일대는 동아시아 4국(백제, 일본, 당, 신라)이 운명의 일전을 벌였던 국제전장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허철희
2003년 0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