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백제 도성이 함락되자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자 융 등 포로들(구당서 58명, 유인원의 平百濟碑에는 7백여명,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장사 88명, 백성 12,807명, 김유신전에는 왕과 신하 93인 군졸 2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을 당에 끌고 가서 고종에게 바쳤다. 당 고종은 의자왕 일행을 접견했으나 죄를 묻거나 벌을 주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금자광록대부위위경’이란 벼슬을 주어 예우했다. 그러나 며칠 뒤 의자왕은 억울하고 분통터지고 한 많은 망국의 설움을 감내하기 벅차 이국땅에서 허망하게도 지존의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렇다고 백제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다. 투항을 거부한 백제군은 남잠, 정현(사비성 남쪽 부여 외곽) 등의 성책에 의거하고 항쟁하였으며, 좌평정무(佐平正武)는 여중을 규합하여 두리원악(금산)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당군에 붙들렸던 흑치상지는 왕족을 겁탈하고 백성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소정방군의 무도함을 보고 도망쳐 나와 임존성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10여일만에 3만명이 몰려들었다. 이후 백제부흥군은 2백여 성을 탈환하였다.
소정방은 먼저 임존성을 공격하였으나 병다지험(兵多地險)하여 이기지 못하고, 9월 3일 당장 유인원으로 하여금 사비성에 남아 지키게하고 당으로 돌아갔다. 소정방이 돌아가자 백제부흥군은 사비성을 더욱 가열차게 공격하였고, 애꿎은 정림사 5층석탑에 ‘평백제국비(平百濟國碑)를 새기고 있던 유인원은 허겁지겁 막아내긴 하였으나, 백제군은 사비성 남령 위에 겹겹이 성책을 쌓아 도성을 내려다보며 포위망을 늦추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당 고종은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새로 파견하였다. 삼년산성(보은)에 머물러 있던 신라왕은 기세를 얻어 도성 외곽의 백제군 포위망을 깨뜨렸다. 그리고 그 이듬 해 정월, 당은 하남, 하북, 회남 등 67개주에서 4만 4천여명 모집하여 칩입했고, 4월에는 위글족 등 호병(胡兵) 35만을 동원하였다.
이때 백제부흥군의 양대산맥인 복신과 도침은 주류성에 웅거하고 일본에 머물고 있는 왕자 부여풍을 맞아들여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렇게 되자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백제군들이 호응해 와 세력이 떨침으로 복신은 또다시 도성에 있는 유인원을 포위하여 고립무원 상태에 빠뜨렸다. 당에서는 대방주사 유인궤를 보내어 신라군과 함께 유인원을 구하도록 했다. 이에 백제군은 661년 3월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돌아가 지켰다.
이렇듯 백제부흥군은 왕도 함락 직후부터 다음해 3월까지 여러 차례 왕성 수복을 시도하여 당군을 곤경에 빠뜨리게 했다.
662년 백제부흥군은 또다시 사비성을 포위하였다. 이때를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년(신라 太宗) 2월에 백제잔적들이 사비성에 침공하므로 왕은 이찬(伊湌), 품일(品日)을 대당(大幢) 장군으로 삼고 잡찬(迊湌) 文王과 대아찬(大阿湌) 양도와 아찬 충상 등을 부장으로 삼고…(하략)…나가서 사비성을 구원케 하였다.”
“3월 5일에 중로(中路)에 이르러서 품일은 휘하군사를 나누어 먼저 두량이성(豆良伊城, 또는 豆良尹城으로도 불림)의 남쪽에 이르러 진을 칠 곳을 물색케 하였다. 백제군사들은 신라군의 진영이 정비되지 못한 것을 내려다보고, 갑자기 나타나서 공격하므로 신라군은 놀라 무너져 도망치고 말았다.”
“12일에 주력부대가 고사비성(古沙比城)밖에 도착, 그곳에 진을 치고 두량이성 공격에 나섰으나 한 달 하고도 엿새동안 서로 노려만 보고 있었을 뿐 이기지 못하자 군대를 거두어 돌아가고 말았다. 4월 19일에 부득이 군사를 돌이켜 대당과 서당은 먼저 보내고 하주 군사가 뒤에 떨어져 빈골양(賓骨壤:정읍 태인)에 다다를 때 백제 군사를 만나 서로 싸우다가 패퇴하여 죽은 사람이 비록 적었으나 무기와 군수품을 매우 많이 잃었다. 상주낭당은 적을 각산(角山:임실 관촌의 성미산으로 비정)에서 만나 진격하여 이기고 드디어 백제의 진중으로 들어가 2000여명의 목을 베었다. 왕이 대군의 패보를 듣고 크게 놀라 김순, 진흠, 천존, 죽지 등을 보내 군사를 증원케 했는데 가시혜진(加尸兮津, 거창부근)에 이르러 군이 퇴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 돌아왔다. 왕은 여러 장군의 패적(敗績)을 논하여 차등을 두어 벌을 주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인궤는 군사가 적으므로 인원과 합군하여 사졸을 쉬게 하고 고종에게 글월을 올려 신라와 합하여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신라왕 김춘추가 당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하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沙)에 이르렀는데 복신이 요격하여 이를 파하니 흠이 갈령도(葛嶺道:갈재 즉 노령산맥)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왔다.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두량이성, 주류성의 한산설은 피상적 억측
주류성(周留城)이 어디냐 하는 문제풀이에 최대의 걸림돌이 되어 온 게 바로 이 두량이성에 관한 기록이다. 그것은 후세학자들이 이 전투가 백제부흥군에 포위되어 양식이 바닥난 당나라 군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판단을 그르쳤다는 점과, 김부식이 豆良伊城의 별사인 豆陵伊城을 정산(定山)에 붙였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을 헤매게 만들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 부여군 속현중에 ‘悅城縣 百濟悅巳縣 景德王改稱 今定山縣’이라 보이는데, 다음 지리지(4)에서는 ‘悅巳縣 一云 豆陵尹城. 一云 豆串城. 一云 尹城’이라고 적어 놓았다.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豆良尹城은 지금의 定山’이다고 하였으나 ‘古沙比城은 미상‘이라고 했다.
노도양(盧道陽) 교수는 그의 ‘百濟周留城考(1979)’에서 周留와 豆陵尹은 같은 지명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동국여지승람, 정산 고적조의 ’雞鳳山城 石築周一千二百尺 內有一井 又有軍倉 今癈‘라는 기록을 들어 豆陵尹城은 계봉산성이 틀림없다고 단정하였다.(이에 대해 전영래 박사는 “노교수가 틀림없다고 단정한 근거로는 1. 주민들이 지금도 ‘두능성’이라고 부른다. 2. 삼국식 산성이다. 3. 백제시대 기와편도 발견되었다.‘ 등등을 열거하고 있으나 근거치고는 미약하고 보편적이다. 주민들이 삼국사기 이래 정산에 ’一云 豆陵尹城‘이란 단서가 붙어 다녔기에 생긴 이름이었지 요즘 ’두릉성‘이라 부른다 해서 고증자료는 되지 못한다. 삼국시대 산성에 백제와편이 발견되는 예는 수백 군데에 이르므로 이게 豆陵尹城이라는 특정명제는 될 수 없다.“)
일본학자 ‘쓰다(津田左右吉)’는 신라본기의 문무왕 2년조의 ‘攻豆陵(一云良)尹城. 周留城等諸城 皆下之’라는 대목을 들어 두량이(豆良尹)와 주류(周留)는 같은 성 이름이라며 한산 부근이라는 가정설을 세웠다.
이병도 박사는 ‘두량이(豆良尹)와 주류(周留)는 같은 성 이름이라며 한산 부근’이라는 일본학자 ‘쓰다(津田左右吉)’의 가정설을 정설화(定說化)했다. 다음은 이병도 박사의 ‘한국사 고대편’의 한 대목이다.
“왕문도의 후임으로는 유인궤가 파견되었다. 유인궤가 도착한 것은 신라 태종 8년 즉 백제가 망한 다음 해였다. 복신 도침 등은 유인궤가 도착한다는 정보를 듣고 임존성으로부터 남하하여 주류성(한산)에 거하고, 웅진강구(白江) 연안에 양책을 세우고 新來의 유인궤군이 사비성의 유인원군과 합세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한편 사비성에 대한 공격도 재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상륙한 유인궤는 來援한 신라군과 합세하여 古沙比城(古沙浦, 錦江下流의 對岸. 沃溝, 臨陂)을 근거로 하여 주류성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백제군은 나당군을 대패시키었고 패배한 신라군은 본국으로 철귀하였다. 이에 유인궤도 주류성의 공격을 중지하고 사비성으로 향하여 백제군의 공략을 받고 있는 유인원군을 구출한 것 같다.”
이에 대해 전영래 박사는
“진단학회가 엮은 ’한국사 고대편(p154)‘의 한 구절은 역사학자가 문헌에도 없는 억측을 함부로 할 경우 얼마나 역사의 진실로부터 유리되는가 하는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주고 있다. 웅진강구 싸움에서 ‘유인궤는 신라병과 힘을 합하여 이를 무너뜨렸다.‘고 한 것을 이병도 박사는 두량이성 공격과 혼돈 시켰다. 물론 이것은 두량이성 곧 주류성이 웅진강구인 한산에 있었다는 일본학자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앞뒤불문하고 이를 혼탕한데서 빚어진 착각에 불과하다.
만약에 이병도 박사의 주장대로 두량이성 곧 주류성이 한산이라면 그리고 남쪽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신라군이 진을 치려했다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 글에서 거리산정의 최대한도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신라군의 진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두량이성이 만약 한산에 있다면 해발 1백20여미터 평지상비고 80미터에 불과한 산성 위에서 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얼마만한 거리가 될까? 10리라고 치자. 남쪽 10리라면 바로 금강변이 아닌가. 그렇다면 신라군이 직접 상륙이라도 했단 말인가. 또 이곳에서 패하고 물러난 곳이 고사비성이다. 4월 19일 철수할 때까지 36일간 신라군이 대치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한산의 건지산성이 두량이성이라면 신라군은 금강을 배후에 둔 이른바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거나 금강의 남쪽 나포 일대의 강기슭에 대진했어야 한다.
’동국여지승람‘의 옥구현 산천조에는 ’고사포는 현남25리에 있다‘고 하였고, 임피현 산천조에서도 ’고사포 현남28리‘라 하였다. 그렇다면 한산-임피간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31리요. 임피에서 옥구까지는 35리, 다시 옥구에서 고사포까지는 25리, 따라서 한산에서 고사포까지는 91리가 되는 셈인데, 상식적으로 말해서 요즘 사용하는 망원경으로도 90리밖의 적을 포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 도대체 두량이성을 공격했다가 물러난 신라군이 무었 때문에 대하를 두 줄기나 건너서 90리밖에 대군을 주둔시킨단 말인가.
결국 김부식은 두량이성이나 윤(尹)성 등이 부여부근이라는 속단아래 이를 정산(定山)에 주기했던 것인데, 아직도 일부 학자에 의해 무비판하게 내려온 반면, 우리나라 물정에 어두운 일본학자들의 한산설이란 가정설이 지도상의 고사리가 김제군 진봉면에 있음을 책상위에서 찾아낸 학자에 의해서 정설화되어 오늘날 숱한 교과서 집필자들이 이를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전영래)’
/허철희
2003년 0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