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龍庵 김낙철金洛喆의 선비정신-동학과 부안기포두목 김낙철

  1894년 2월 15일 갑오동학혁명이 고부군에서 일어나니 바로 인접한 정읍, 부안, 고창 등지는 동학군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부안의 동학군은 김낙철金洛喆이란 사람인데 그의 아우 낙봉洛鳳, 辛明彦, 白易九, 姜鳳熙, 辛允德 등과 더불어 동학을 도우며 부안의 치안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동학군이 황토현 싸움에서 관군을 크게 이기고 인접한 고을을 모두 점령한 다음 부안의 백산白山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재정비를 하고 있을 때, 각 고을에서는 크고 작은 보복과 약탈 등이 자심하였으나 부안은 조용하였다고 한다. 이는 이곳인 김낙철 형제의 온유한 선비정신과 바른 치안자세의 덕이라고 한다. 김낙철은 자字는 …

부안에서 지킨 조선 유학의 마지막 절개-간재 전우

  공자(孔子)는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道不行 乘 浮于於海:<논어>, 공야장편)” 라고 말하였다. 한말의 격동기에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참담한 좌절 속에서 공자의 이러한 말을 좇아 서해 절해의 고도 왕등도로 들어갔다가 부안의 계화도에서 일생을 마친 도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말의 거유(巨儒), 간재(艮齋) 전우(田愚)이다. 전우(田愚)는 1841년(헌종7) 8월 13일 지금의 전주시 다가동에서 아버님 담양(潭陽) 전씨 청천공(聽天公) 재성(在聖)과 어머님 남원 양(梁)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청천은 충청도 홍주에서 살다가 전주에 이르러 그를 낳았다 한다. 전우는 태어나서 3일 동안 …

“거그서부터는 개를 걸어서 창북리로 가지”-옛 지도 속 부안이야기-활인정(活人亭)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지도 한 장이 눈길을 계속 붙들어 맨다. 변산해수욕장(송포)-해창-돈지-청호-큰다리-대벌리-창북리-새포-문포까지 들쭉날쭉한 해안선을 따라 올망졸망 터 잡은 마을들이 펼쳐지고, 대벌리 조봉산(그때 당시는 섬) 너머로는 계화도가 떠 있다. 계화도 간척 50여 년 전의 지도이다 보니 시선은 자연 그 일대 해안선에 고정된다. 돈지포구, 이 지도가 만들어질 무렵이었으면 꽤나 번창했던 포구다. 거상들도 머물렀고…, 돈지 노인들에 의하면 포구 곳곳에서 걸대에 조기말리는 광경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청호, 돈지포구에서 갯골은 청호로 이어져 두포천과 언독리(큰다리)에서 만난다. 계화도간척 후 청호지가 들어섰으니, 갯골은 청호지 가운데에 묻혔다. 청호지 부근에서는 1960년대 …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붙듭니다-명곡과 시를 좋아했던 소녀, 김용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붙듭니다. 그러나 마음은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진 한 장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지요. 지난 10월 19일 백산고등학교 정재철 선생과 돈지 김용화 할머니를 찾아뵈었는데, 그동안 못 보던 사진 한 장이 액자에 고이 담겨 있기에 우선 촬영부터 했습니다. 조카들이 늦게야 이 사진을 발견하고 확대 복사해 한 장씩 나눠 갖고 할머니에게도 한 장 보내주었답니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바로 김용화 할머니입니다. 사회주의 노선의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의 둘째 딸이지요. 할머니는 1919년에 태어나셨으니 올해로 아흔이십니다. 할머니의 …

사라진 줄포항, 그 근대의 기억

  줄포. 한자로는 茁浦로 표기한다. 茁자를 자전에서 찾아보면 “1. 풀이 처음 나는 모양 2. 싹이 트다. 풀이 싹트는 모양 3. 동물이 자라는 모양 4. 성 5. 풀 이름”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한자를 들여다보면 사물의 움직임에 대해 상당히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줄포의 역동성을 미리 예견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조 말엽 줄포는 건선(乾先)면으로 불리었으나 1875년 항만이 구축되면서 건선면에서 줄포면으로 개칭되었다. 이전부터 부른 줄래포를 개칭한 것이다. 줄포는 1900년대 초 서해안 조기의 3대어장 중의 하나인 칠산어장을 안고 근대의 항만으로 발전하였다. 곡창지대 호남평야의 …

벽해(碧海)가 상전(桑田)되다-는들바위와 아기장수 전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다. 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세상일의 변천이 심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벽해상전碧海桑田이라고나 해야 할까?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이 된 곳이 있다. 지난 해 물길이 막혀 바다로서의 그 명을 다한 새만금이 그곳이다. 그 중에서, 위의 사진의 장소는 하서 월포 앞바다이다. 그 좋던 바다, 그 좋던 갯벌은 어느새 잡초가 무성하고…, ‘변산의 제일 높은 의상봉이 잠겨야 이 바위도 잠긴다’고 전해오는그 유명한 는들바위가 잡초 너머로 보인다. 말대로 는들바위는 비록 나즈막하지만 물에 잠길 리 없어 보인다. 는들바위에는 유명한 …

십승지지(十勝之地) 변산-전란기에 난을 피해 살만한 곳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조선 명종 때 이름이 높았던 예언가이다.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그는 역학, 풍수, 천문, 복서, 관상 등에 능하여 관상감에서 종6품 벼슬인 천문교수(天文敎授)를 지냈다. 그는 1575년(선조8)의 동서분당을 예언하였고, ‘임진년에 백마 탄 사람이 남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과연 가토오키요마사(加藤靑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와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였다 한다. 그는 소년 시절에 고향인 울진의 불영사에서 신승(神僧)을 만나 비결을 전수받고 전국의 명산을 둘러보았다 하는데 그가 남긴 글인 <남사고비결>, <남격암십승지론>이 <정감록>에 수록되어 전한다. 그는 어지러운 전란기에 난을 피해 살만한 곳으로 <남격암십승지론>에 다음 열 …

거녀(巨女) ‘개양할미’가 사는 집

  부안 격포리 죽막동 수성당 깎아지른 절벽 위에 집 한 채가 있다. 변산반도의 끝자락인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적벽강 용두암(사자바위). 여해신(女海神) 개양할미를 모신 당집 수성당(지방유형문화재 제58호)이 자리한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수성당 할머니인 개양할미는 아득한 옛날에 수성당 옆 ‘여울골’에서 나와 서해바다를 열었다. 그리고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지나는 선박의 안전을 도모하고, 어부들로 하여금 풍어의 깃발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이러한 개양할미를 물의 성인으로 여겨 수성(水聖)이라 부르고, 여울골 위 절벽 위에 수성당을 짓고 모셔왔다. 개양할미와 개양할미의 딸 여덟을 모신 곳이라 하여 구랑사(九娘祠)라 부르기도 한다. …

장자못 설화 담긴 ‘선돌‘-보안입석

  보안면 상입석리(윗 선돌) 마을 뒤의 언덕에는 사방 한 칸 정도의 우진각 지붕의 비각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비각이 아니라 선돌 보호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선돌은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6호 ‘보안입석’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그래서 마을이름도 선돌(立石)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선돌은 높이가 2.6m, 가로 75㎝에 두께 59㎝로 매우 육중하다. 약간 비스듬히 자른 듯 해 보이며, 윗부분이 약간 넓다. 앞면에는 불상형태의 무속탱화가 음각되어 있는데 조각한 수법으로 보아 근래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선돌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선사시대에 부족간의 …

비전향장기수 허영철 일대기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9월 28일, 남대문에 미 탱크가 들어와서 육탄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돌았다. 퇴각한 미군이 다시 상륙해서 서울을 향해 진격해 온다는 정보도 받았고, 중앙청에 태극기가 올라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지도부에서는 이제 그만 서울을 빠져나와 의정부까지 나오라고 한다. 시내 건물들은 적막하리만큼 고요하고 달빛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그 뒤에 몸을 숨기면서 서울 거리를 빠져나갔다. 나는 그때 달이 휘영청 밝았던 밤. 서울을 빠져나오던 비감한 심정을 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수도가 수십 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다가 이제 겨우 해방이 되었는데, 일제 대신 미국에 점령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