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龍庵 김낙철金洛喆의 선비정신-동학과 부안기포두목 김낙철

 

▲용암 김낙철 선생 내외분( ‘학산정갑수선생전기’/1994년 천도교호암수도원 발행 자료)

1894년 2월 15일 갑오동학혁명이 고부군에서 일어나니 바로 인접한 정읍, 부안, 고창 등지는 동학군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부안의 동학군은 김낙철金洛喆이란 사람인데 그의 아우 낙봉洛鳳, 辛明彦, 白易九, 姜鳳熙, 辛允德 등과 더불어 동학을 도우며 부안의 치안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동학군이 황토현 싸움에서 관군을 크게 이기고 인접한 고을을 모두 점령한 다음 부안의 백산白山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재정비를 하고 있을 때, 각 고을에서는 크고 작은 보복과 약탈 등이 자심하였으나 부안은 조용하였다고 한다. 이는 이곳인 김낙철 형제의 온유한 선비정신과 바른 치안자세의 덕이라고 한다.

김낙철은 자字는 여중汝中, 호号는 용암龍庵이며 부안김씨扶安金氏로 부안읍 봉덕리 쟁갈에서 살았다. 대대로 학문을 하여 오는 집안에서 태어나 아우 낙봉과 함께 학문에 힘써오다가 관속배官屬輩들의 횡포와 민생고에 허덕이는 상민常民들의 참상을 보다 못해 1890년 6월 7일에 동학에 입교하여 성심으로 동학정신을 익혀오다가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부안의 동지들의 추대로 부안기포두목이 되었다.

이들 형제를 중심으로 한 부안의 동학도들은 민심의 수습과 안정에 힘쓰며 동학군들의 민폐를 엄금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癸巳·甲午 두 해에 걸쳐 전라도 남쪽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어 아사자가 속출하였으며, 특히 제주도의 식량난이 극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도 배들이 부안의 문포와 대벌리항에 와서 많은 양곡을 사들여 배에 싣고 수로로 떠나려 하는데 일부 동학군들이 이들의 식량을 약탈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낙철은 급히 현지로 달려가 동학군을 크게 꾸짖고 단한 홉의 양곡도 빼앗지 못하게 보호하여 무사히 선단을 귀환케 하여 주어 제주도민이 굶어 죽음을 면하였다는 것이다. 또 당시 부안군수 이철화李喆和를 동학군들이 체포하여 살해하려 하는 것을 김낙철이 「인명을 함부로 해친다면 우리가 짐승과 무엇이 다르다 하랴」하고 극력 만류하여 놓아 주었다고 한다.

그후 동학군은 패배하여 흩어지고 김낙철은 향리에서 체포되어 혹한에 맨발로 나주목에 압송되어 매일 혹독한 매를 맞고 쇳조각으로 축족타지蹴足打之(쇠뭉치로 발을 차고 때리는 벌) 하여 여러 차례 기절을 하는 등 처참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급기야는 사형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이 제주도에 까지 전해지자 제주도민 100여명이 나주에 몰려가 「선생이 죽게 되었는데 하늘이 어찌 무심한고 (先生至於死境 天何不願)라고 외치며 나주목사에게 그의 착한 심성과 동학혁명 당시의 행적을 극구 진정하면서 살려 줄 것을 청하니 나주목사도 하는 수 없이 사형을 면케하고 서울로 압송하였다고 한다.

서울로 이송된 김낙철은 다행이 그가 살려준 전 부안군수 이철화가 이를 알고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 하며 동학혁명 당시의 그의 처신과 행적 등을 낱낱이 적어 조정에 청원하였더니 조정에서도 그 인간됨을 아껴 특사로 석방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후 그 는 報恩지방에서 조용히 글 읽으며 정양하다가 1918년 11월 9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제보자: 김형식(金炯湜, 남, 63세, 부안읍 모산리/1990년 당시)
/출처:전설지(1990.820. 전라북도 발행)


/부안21(2009·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