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붙듭니다-명곡과 시를 좋아했던 소녀, 김용화

 

▲김용화 할머니, 스물네 살 때 찍은 사진이다.ⓒ부안21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붙듭니다. 그러나 마음은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진 한 장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지요. 지난 10월 19일 백산고등학교 정재철 선생과 돈지 김용화 할머니를 찾아뵈었는데, 그동안 못 보던 사진 한 장이 액자에 고이 담겨 있기에 우선 촬영부터 했습니다. 조카들이 늦게야 이 사진을 발견하고 확대 복사해 한 장씩 나눠 갖고 할머니에게도 한 장 보내주었답니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바로 김용화 할머니입니다. 사회주의 노선의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의 둘째 딸이지요. 할머니는 1919년에 태어나셨으니 올해로 아흔이십니다. 할머니의 원래 출생은 그해 동짓달인데 아버지 지운께서 3.1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3월1일로 출생신고를 했답니다.

사진은 할머니가 스물네 살 때 찍었답니다. 그 해 취직을 해볼까하고 서울 돈화문 근처 어느 사진관에서 이력서에 붙일 사진을 찍었답니다. 그 후 할머니는 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었던 어느 큰 회사에 타이피스트로 취직이 되었답니다.

“사진사가 일본인이었나요.” 내가 물었습니다. “아닐 것이요. 내가 원체 왜놈들을 싫어하는데…, 왜놈사진관에서 찍었겠소…?” 할머니 대답입니다. 할머니가 스물네 살 때라면 1942년의 일인데 참 잘 찍은 인물사진입니다. 사진 크기는 4×5…, 70년의 세월이 흘렀다지만 암실작업 마무리를 정확, 꼼꼼하게 잘 해서 색이 많이 바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일본인 사진사가 찍었느냐고 물었던 이유는…, 그 당시 우리나라 사진사들 수준이 이렇게 높았나…? 확인해 두고 싶어서였습니다.

우선 시선처리가 참 좋습니다. 저러한 시선처리는 자칫 억지스러울 수가 있고, 찍히는 인물의 마음을 놓칠 수가 있지요. 그런데 이 사진사는 어쩌면 저렇게도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야무지고, 꿈 많아 보이는 처녀의 마음을 잘 담아냈는지…, 어리광 다 받아주는 오라버니 앞에서, 혹은 스스럼없는 친구 앞에서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요? 아니면 김용화 할머니에게 배우 기질이 있는 것일까?… 물었더니 젊은 날 한 때 배우도 생각해봤답니다. 그래서 내가 ‘가수는요…?’하고 또 물었지요.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서지요. 예전에 기타 치며 ‘썸머타임’을 즐겨 불렀다네요. 아시겠지만 그 곡이 얼마나 어려운 곡이냐구요. 그것도 기타 치면서…,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물었던 것이지요.

사진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조리개를 개방해 인물 선이 부드러워 보이는 점도 훌륭하고요, 뭣보다도, 마치 햇살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있는 듯한 광선처리가 좋습니다. 얼굴에 진 적절한 음영이 입체감이 나고요. 무엇보다도 왼쪽 상단의 나뭇잎 그림자, 중앙의 소품(화분)처리가 튀지 않으면서도 인물을 잘 받쳐 줘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인물사진입니다.

인상에서도 그렇게 느껴지지만…, 소녀 적에 명곡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던 할머니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곱게 사셨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참으로 고단한 피해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사진을 찍을 그 당시 아버지 지운 김철수는 형무소에 계셨고요. 김용화 할머니는 그 후 아버지의 소개로 만난 남로당 전북도당 조직부장 이복기와 결혼했습니다.

▲아버지 지운 김철수의 묘소 앞에서 김용화 할머니/2005.08.11ⓒ부안21

육이오가 발발하자 남편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1년 6개월여의 짧은 결혼생활이었지요. 나중에, 아주 나중에 ‘1ㆍ4후퇴 때 서빙고 다리 위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전해 듣습니다마는 그래도 할머니는 단념하지 못했답니다. 아니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그나마도 이 정권 바뀌면 북한 왕래가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겠다.’싶어 부랴부랴 조카들과 금강산을 다녀오며 그때서야 비로소 남편을 단념했노라 하시지만…,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아직도 단념하지 못하는 눈치이십니다.

육이오전쟁 광풍으로 가족들은 산산 조각 납니다. 광수, 복수 두 작은 아버지는 월북하고, 형부도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광주학생운동과 관계된 언니도 형부 따라 가고요. 남겨진 언니의 어린 5남매 조카들 대리고 돈지로 내려 와 삼성약방 문 열고 공안의 눈초리 피해가며 어렵게 어렵게 내 자식처럼 키우며 살았습니다. 다행하게도 조카들은 무사히 다 장성했고, 이제 삼성약방 문 닫은 지도 오래됩니다.

해방 후 아버지는 소수의 자발적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민족주의 세력을 도모하던 중 1947년 사회노동당의 해체와 함께 당시 운동의 분파주의에 환멸을 느껴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고향인 부안으로 내려옵니다.

고향으로 내려온 아버지는 선산이 있는 백산면 대수리에 손수 토담집을 짓고 ‘이만하면 편안하다’는 뜻의 ‘이안실(易安室)’이라고 이름 지었지요. 그러나 당호(易安室)만큼 아버지의 생활은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은 공산주의 활동으로 낙인찍힌 채 공안당국의 감시 속에서 유폐되듯 외롭고 고단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둘째 딸만을 의지해 사시다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통일을 못보고 1986년에 서거(94세)하셨습니다. 2005년, 조국해방 60돌을 맞아서야 아버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 받았습니다.

김용화 할머니의 화두도 아버지처럼 통일입니다. 아버지가 1996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삼고 백 살하고 네 살을 살고 싶어 하셨듯이, 할머니도 통일되는 그날을 보기 위해 백 살까지는 살아야겠다고 하십니다.


/허철희(2008·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