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포. 한자로는 茁浦로 표기한다. 茁자를 자전에서 찾아보면 “1. 풀이 처음 나는 모양 2. 싹이 트다. 풀이 싹트는 모양 3. 동물이 자라는 모양 4. 성 5. 풀 이름”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한자를 들여다보면 사물의 움직임에 대해 상당히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줄포의 역동성을 미리 예견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조 말엽 줄포는 건선(乾先)면으로 불리었으나 1875년 항만이 구축되면서 건선면에서 줄포면으로 개칭되었다. 이전부터 부른 줄래포를 개칭한 것이다. 줄포는 1900년대 초 서해안 조기의 3대어장 중의 하나인 칠산어장을 안고 근대의 항만으로 발전하였다. 곡창지대 호남평야의 쌀이 일본으로 수탈당하는 출구로서의 기능이 컸으며, 그러다보니 줄포항은 상업적으로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토사의 축적으로 항구기능을 점차 상실해가면서 1958년에는 어업조항과 부두노조가 곰소항으로 이전되면서 급기야 1990년대에는 폐항조치되기에 이른다. 지금의 ‘자연생태공원’이라 부르는 곳을 막은 방파제 공사가 완료되면서 줄포는 이제 바다 구경을 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줄포만도 점차 곰소만으로 불리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건설되면 줄포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예상했던 것도 실패한 예상이었을 뿐이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관광객들은 곰소로 직행한다. 곰소는 활성화되는데 줄포는 점점 쇠퇴해간다. 전통적으로 줄포시장과 5일장이 컸었던지라 아직은 곰소나 보안 사람들이 남부안의 상권을 줄포로 여기고는 있으나 줄포의 상권도 쇠락해가고 있다. ‘한때의’ 줄포였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한때였을지언정 줄포는 한국 근대사의 한 줄기를 차지하는 지역적 근거지였음은 틀림없다. 아직도 줄포 특히 줄포항을 기억하는 쉰세대들은 더러 있다. 강인한은 “줄포는 옛날에 항구였느니라, / 고깃배, 소금배 둥싯거리던 포구가 / 바로 여기였느니라”라고 애잔하게 줄포항을 노래했다. 그러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적합한 지리적 장소들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데, 그렇다고 사람들마저 다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흔적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새로운 경제권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항구와 갯벌이라는 근대의 흔적들이 상실되고 있는 오늘날 줄포는 항구가 있던 마을(서빈동)에 ‘살기좋은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느라 한창이다. 정부의 대규모 지원이 뒷받침되고 있는 이 사업이 애초 행정자치부 등이 기획했던 취지를 망각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이 사업에 줄포항의 근대를 기억하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새로운 시대정신이 부여된다 하더라도, 자연생태공원이 저지른 오류처럼 개발주의 논리로 싸그리 밀어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취지에서 줄포항을 기억하는 글을 하나 발굴하여 소개한다.
줄포항의 엣모습은
북쪽으로는 부안군의 보안면, 진서면, 남쪽으로는 고창군의 흥덕면, 부안면, 심원면으로 이어지는 해안선 일대가 줄포만이고 이 줄포만에 위치한 줄포는 정읍, 고창, 부안과 각 오십리 거리에 있어 교통의 요지로 물자의 집산이 용이했던 것이다. 천혜의 항구로 예로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진 줄포항은 어항으로 명성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전북쌀의 대일 수출항으로까지 알려져 있어 “조선 줄포항 아무개”로 서신 왕래를 했었다.
호남의 명문이요 조선의 재벌 인촌 김성수의 일가가 구한말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에서 시내 현 교하동으로 이사와 살았고(아들 상만과 상협은 줄포 태생임) 만석꾼 지주 신세원 씨를 비롯하여 수천석 수백석꾼의 지주가 많은데다가 금, 만경들판에서 쏟아져오는 곡식이며, 변산의 목재와 숯, 보안면의 유천리 신복리 앞바다에서 대량생산되는 소금 등이 풍부하여 생거부안, 사거순창의 생거는 줄포를 두고 일컬음이라 해서 과장된 말은 아니다.
삼양재벌의 삼양사는 방대한 농장에 전국적인 규모의 삼양사 정미소를 운영하였는데 여기서 도정하는 쌀은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발동선에 실려 일본으로 직접 운송했고 군산항의 모선에 실리기도 했다. 일본에 간 배가 돌아올 때는 각종 생활필수품을 싣고오니, 상업이 또한 크게 발달하였다. 지금의 삼화양로원 자리에 일본인 야스다는 금정상점을 차리고 커다란 이층건물에 상품을 가득 채워놓고 조선인 점원 여럿을 거느리면서 도산매를 했는데 부안군, 정읍군, 고창군의 3개군에 도매상을 했다. 40여세대의 일본인은 일부 기관장을 제외하고는 주로 선구(船具)점, 잡화점, 제과점을 했고, 큰 요정을 운영한 자도 있었다. 중국인도 7~8세대가 살며 요리점을 한 사람은 하나 둘 쯤이었고 비단, 포목 등 송방을 했다. 조선인 상점도 많이 있었으나 상권은 일본인과 중국인이 장악했다. 선창(船艙)은 어선, 화물선이 들고나며 바다를 메웠고 원둑거리는 즐비하게 늘어선 어물가게, 젓갈가게에서 비린내가 진동했고 사람의 물결이 넘쳤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오색찬란한 풍어깃발을 휘날리며 풍물을 울리면서 고깃배가 속속 들어닥치면 갈매기들이 제 세상인 양 날뛰고, 짐꾼(배에서 고기를 바작에 담아 어업조합 공판장으로 운반하는 지게꾼)들은 대기중인 가족에게 고기를 몇 마리씩 슬쩍 던져주는 것쯤은 보통이었다. 여기에다 화물선에서 짐을 내오고 짐을 싣고 야단법석을 이루는데 때로 수백명의 핫바지(조선옷 입은 농촌사람) 부대까지 뒤범벅이 되어 아수라장을 이루는 것이었다. 위도면은 당시 전라남도 영광군에 딸려 있었는데 1963년 1월 1일 부안군에 편입되었다. 지리적으로 줄포와 가까운 관계로 어획물의 판매와 생필품의 조달, 어업자금의 융통 등 일체를 줄포항에 의지하고 있었다. 위도 근해는 많은 어물 중에도 칠산어장과 더불어 조기가 무진장하게 잡혔다. 수십척의 조기배가 입항하면 원둑거리는 조기로 뒤덮힌다. 생조기는 소매도 하고 전주 등 여러 지방으로 트럭, 달구지에 실려 나가고 생선장수집 마당에는 걸대를 여러개 만들고 조기를 엮어 층층으로 주렁주렁 매달아 굴비를 만들고 조금 상할 듯 싶은 것은 배를 갈라 간조기를 만들었다. 소금에 절여 간조기를 만드는데 추석, 설 명절과 제사에는 간조기만은 빠지지 않는다. 가지각색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물이라 이름붙은 고기가 지천으로 많아서 어물 전시장과도 같았고, 요즘 각광을 받는 광어나 아구 같은 건 천덕꾸러기로 어물 측에 들지도 못했다.
부안군청은 부안에 있고 부안경찰서는 줄포에 있었으니 줄포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군내에 유일하게 은행(조선식산은행 줄포지점)이 있었음은 금융경제가 괄목할만하였으니 당시의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부안군 곡물검사소가 줄포에 있어 대일 수출미의 검사를 전담했다. 이외에도 부안읍에 없는 여러기관이 있었고 줄포는 도시인데 반해 부안은 보잘것 없는 곳이었는데 오늘날은 정반대로 뒤바뀌었으니 상전벽해라고나 할까…
사거리에서 삼양사에 이르는 지점과 사거리에서 지서를 지나 부안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의 서남쪽은 바다였고 농협에서 삼양사에 이르는 지점은 뚝을 쌓아 바닷물을 막었기 때문에 원둑(언둑)거리라 했고 지금도 나이든 층에는 원둑거리로 통하는데 90년 전인 1898년 늦가을 해일이 일어 둑이 무너지고 시내와 지금의 대포들(당시는 들판이 아님. 시내에 인가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일대가 바다가 되어버렸는데, 전라감사 이완용(한일합방 때는 내각총리대신)이 현지 독찰하고 유진철 군수의 휼민사업으로 둑을 다시 쌓았고, 그후 일제치하에서 1927년 일본인 몇 사람의 자본으로 앞에서 말한 바다(서빈동 일대)를 매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립지에 어업조합, 운송회사(대한통운의전신), 노동조합 등 건물과 술집 등이 들어서기 시작하다가 1956년 7월 26일 이곳으로 시장이 이전되었다. 상설시장(노점상을 유치하기 위함)을 꿈꾸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장날도 아주 한산하다.
줄포면은 부안군 건선면으로 줄포리, 장동리, 우포리, 신리, 난산리, 파산리, 대동리의 7개리 행정구역으로 각 리에 구장을 두고 줄포리만은 동편을 강동리, 서편을 강서리로 불렀고 후에 1구, 2구로 개편하여 구장 두 사람을 두었으니 여덟명의 구장이 각 리의 책임자였는데, 일제시대 중엽 자연마을 단위로 이장을 두어 29개 마을로 나뉘었는데, 그후 여러 차례 변천되다가 지금은 줄포리(12개 마을), 장동리(4개 마을), 신리(4개 마을), 우포리(4개 마을), 난산리(5개 마을), 파산리(5개 마을), 대동리(4개 마을) 계 38개 마을로 나뉘어졌다. 1931년 7월 1일 행정구역 명칭 변경으로 건선면이 줄포면으로 변경되었다. 1930년(호남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던 해)인가 서너집만이 있던 곰소섬을 일본인 개인자본으로 축항하여 줄포어업조합 곰소 위탁파매소를 설치했고 항구의 면목을 갖추었다. 줄포항은 유입되는 토사로 자연매립되어 항구의 구실을 잃어갔으며 1962년경에는 반대로 곰소어업조합 줄포출장소로 전락되었다가 1966~1967년경 폐쇄되고, 줄포항의 세 글자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부안생태문화활력소 부안지역문화연구팀
(2008·02·01)
* 이 글은 1987년 7월 29일 당시 줄포면 줄포리에 사는 김장순 씨(당년 66세)가 작성한 것으로 변산바람꽃 2호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