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리 청자가마터
진서면 진서리 요지군은 사적 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진서리는 물론 인근의 연동과 신 · 구작도리(新.舊 鵲島里)에 있는 청자 요지를 총칭하는 것으로 모두 40여 개소의 요지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산록에 있는 요지들은 경작지 개간으로, 해안에 있는 요지들은 해파로 인한 파괴가 계속되고 있다. 진서리 요지가 본격적으로 조사된 것은 1990년과 1993년 그간 지표조사를 통해 18호와 20호로 정해진 가마가 원광대학교에 의해서 발굴된 것이다.
18호 발굴 결과 가마는 경사진 자연 구릉을 이용해서 진흙으로 축조한 토축 등요(土築 登窯)로 3번 개축하였으며, 가마의 규모는 수평길이 19.7m, 폭 1.3~1.5m로 확인되었다. 요상(窯床)의 경사도는 18”-il5”-il2”로 점차 낮아졌다. 출토된 청자들은 대개가 포개 구운 상번(常燔) 청자로, 발(鉢)과 대접 접시 등 일상용기가 주류를 이루며, 순청자와 함께 음각 양각·퇴화·상감청자가 출토되었다. 태토(胎土)에는 사립(砂粒)이 섞여 있고 유약(펀)은 비교적 얇게 입혀졌고 암록색을 띠는 등 청자의 질이 인근의 유천리 청자나 강진 청자보다 떨어진다. 인종 장릉출토 접시와 유사한 접시 등 출토된 파편들의 기종과 형태 및 수습 파편 중에 햇무리굽이 없는 점, 또 굵은 모래를 뭉치거나 규석 등을 번조 받침으로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가마 운영시기를 12세기 중엽으로 추정하였다.
20호 발굴에서는 3기의 가마가 확인되었다. 가마의 잔존 길이 각각 다르나 가마의 폭은 1.3m 내외로 유사하여 18호와 크게 다르지 않은 크기의 토축 등요로 요상의 경사도는 15”이다. 출토된 청자는 대접 · 완 · 발 · 접시류가 주종을 이룬다. 녹청 · 회녹색을 띠는 조질 · 무문청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 등이 해남 진산리나 인천 경서동에서 제작된 청자와 유사하기 때문에 상한은 11세기 후반으로 추정했다. 또 무문이 주류이고, 상감으로 문양을 시문한 것이 한 점도 없으며, 문양이 있는 것은 압출양각으로 시문한 몇 점에 불과한 점으로 미루어 하한을 12세기 전반으로 추정했다.
특히 20호에서는 완의 비율이 16%인 점에 비해, 상감청자가 있어 12세기 중엽으로 추정한 진서리 18호 요지에서는 완의 비율이 3%인 점에 주목하여 20호 시기에는 차를 마실 때 완을 주로 사용하다가 18호 시기에는 주전자와 잔을 사용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국립전주박물관 ‘전북의 역사문물3 부안’에 실린 글을 따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