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도예문화
1.序 言
부안은 산림이 무성하고, 주위에 도토(陶土)가 풍부하며, 해안을 이용한 뱃길이 있어 자기를 생산함에 있어 전남 강진과 유사한 좋은 입지를 갖추고 있어 예로부터 많은 가마가 운영되었다. 통일신라 이전의 가마를 제하고도 고려시대의 것으로 진서면 진서리 · 보안면 유천리요지가, 조선시대의 것으로는 보안면 우동리 · 상서면 감교리 · 진서면 석포리요지가 알려져 있다.
부안 지역에 있는 옛 가마를 통칭하여 부안요(扶安窯)라 하는데, 이는 주로 유천리 가마를 일컫는 것이며, 1914년 일본인 末松熊彦에 의해 발견된 강진요와 함께 고려시대 도자기의 양대 생산지로 또 조선시대 초기 분청기의 중요한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부안에는 유천리 가마 외에도 고려시대 청자를 생산했던 진서리 가마와 조선시대 초기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우동리 가마가 있어, 한국 도자기의 흐름을 연구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지역 중의 하나이다.
그 중 유천리와 진서리요지는 1939년에 강진 대구면 요지와 함께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호령(朝鮮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護領)에 의해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결과 예로부터 세간의 관심은 있었으나 전남 강진요에 대한 조사가 일찍이 진행된 것에 비해, 본격적인 지표조사나 발굴조사가 시행된 것이 1990년대에 들어서이며, 그 규모도 강진에 비해 작았다.
이들 중 가마가 밀집되어 있고 다른 요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한 진서리와 유천리, 우동리요지에 대하여 기왕에 알려진 내용을 정리해 두고자 한다.
2. 진서면 진서리 요지
진서면 진서리 요지군은 사적 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진서리는 물론 인근의 연동과 신 · 구작도리(新.舊 鵲島里)에 있는 청자 요지를 총칭하는 것으로 모두 40여 개소의 요지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산록에 있는 요지들은 경작지 개간으로, 해안에 있는 요지들은 해파로 인한 파괴가 계속되고 있다. 진서리 요지가 본격적으로 조사된 것은 1990년과 1993년 그간 지표조사를 통해 18호와 20호로 정해진 가마가 원광대학교에 의해서 발굴된 것이다.
18호 발굴 결과 가마는 경사진 자연 구릉을 이용해서 진흙으로 축조한 토축 등요(土築 登窯)로 3번 개축하였으며, 가마의 규모는 수평길이 19.7m, 폭 1.3~1.5m로 확인되었다. 요상(窯床)의 경사도는 18”-il5”-il2”로 점차 낮아졌다. 출토된 청자들은 대개가 포개 구운 상번(常燔) 청자로, 발(鉢)과 대접 접시 등 일상용기가 주류를 이루며, 순청자와 함께 음각 양각·퇴화·상감청자가 출토되었다. 태토(胎土)에는 사립(砂粒)이 섞여 있고 유약(펀)은 비교적 얇게 입혀졌고 암록색을 띠는 등 청자의 질이 인근의 유천리 청자나 강진 청자보다 떨어진다. 인종 장릉출토 접시와 유사한 접시 등 출토된 파편들의 기종과 형태 및 수습 파편 중에 햇무리굽이 없는 점, 또 굵은 모래를 뭉치거나 규석 등을 번조 받침으로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가마 운영시기를 12세기 중엽으로 추정하였다.
20호 발굴에서는 3기의 가마가 확인되었다. 가마의 잔존 길이 각각 다르나 가마의 폭은 1.3m 내외로 유사하여 18호와 크게 다르지 않은 크기의 토축 등요로 요상의 경사도는 15”이다. 출토된 청자는 대접 · 완 · 발 · 접시류가 주종을 이룬다.
녹청 · 회녹색을 띠는 조질 · 무문청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 등이 해남 진산리나 인천 경서동에서 제작된 청자와 유사하기 때문에 상한은 11세기 후반으로 추정했다. 또 무문이 주류이고, 상감으로 문양을 시문한 것이 한 점도 없으며, 문양이 있는 것은 압출양각으로 시문한 몇 점에 불과한 점으로 미루어 하한을 12세기 전반으로 추정했다.
특히 20호에서는 완의 비율이 16%인 점에 비해, 상감청자가 있어 12세기 중엽으로 추정한 진서리 18호 요지에서는 완의 비율이 3%인 점에 주목하여 20호 시기에는 차를 마실 때 완을 주로 사용하다가 18호 시기에는 주전자와 잔을 사용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3.보안면 유천리 요지
1929년 일본인 神田藏解 野守健에 의한 보안면 우동리 요지 조사 시에 우연히 세상에 알려지게 된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가마터는 고려시대 청자는 물론 백자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자기를 만들던 가마터였다.
부안군 유천리 가마터들은 사적 69호로, 약 45개소의 요지가 알려져 있다. 대부분 유천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 남측에 밀집해 있으며, 그 주변 산록에도 수 개소가 널려 있다. 일제 때부터 심한 도굴로 인하여 최고의 파편을 간직한 요지군의 퇴적층이 많이 파괴된 상태이며, 가마터들도 지표는 거의 전답으로 변하여 보존 상태는 좋지 않은 편이다.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파괴된 퇴적층을 수습 조사한 후, 지표조사 이외에 별다른 조사는 없었으며, 1998년 원광대학교에서 27호와 28호로 지정된 곳을 발굴하여 모두 5기의 가마를 확인하였다.
발굴 결과 가마는 진서리와 같이 자연 구릉을 이용한 토축 등요로, 가마의 폭은 1.3m 내외로 밝혀졌다. 출토된 유물의 기종은 대접 · 발 · 잔 · 접시 등 소형의 일상용기가 주종이었 다. 문양 시문기법은 음각 · 양각 · 음양각 · 압출양각 · 퇴화 · 철화 · 흑백상감기법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특히 흑백상감된 매병편과 각종 상감편이 수습되었다. 유색은 녹청색 · 담록색 · 회청색을 띠며, 드물게 비색의 예도 있었다. 번조 받침은 점토가 섞인 내화토를 접지면 4~5곳에 받쳐 구운 것들이 많으며, 규석받침과 모래받침도 혼재하고 있었다. 요도구로는 원통형 갑발과 각종 형태의 도침이 수습되어 상품 자기를 구웠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수량에 차이는 있으나 무문 · 음각 · 양각 · 퇴화 상감기법이 공존하며, 조질청자와 양질청자가 같은 퇴적층에서 공반(共伴)되고 있어 이들은 시기의 차이가 아니라 수요계층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가마의 운영 시기는 유천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청자들을, 하한이 각각 1146.1157.1202년인 인종 장릉 출토의 청자들 · 청자와(靑瓷瓦)와 함께 출토된 청자들 · 명종 지릉 출토의 청자들과 비교하면서, 12세기 후반의 명종년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 산록에 위치한 가마터의 발굴조사 결과가 유천리 요지군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처음으로 유천리 가마터를 발견하여 조사한 野守健은 1934년 학계에 그 개략을 보고하면서 강진 청자에 버금가는 요지로만 소개하였다. 그러다가 1938년 6월 조사시에 유천리 12호 요지의 퇴적층이 도굴된 것을 보고 바로 그 부분에 탐색구를 넣어 자편을 수습하면서 순 청자 · 상감청자 · 순백자 · 상감백자와 함께 동화자기가 혼재된 층위를 발견하였다고 하면 서, 강진 사당리 7호 요지 수습 자편들과 유사점이 많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당리 7호는 강진요에서도 가장 전성기의 청자를 생산했던 가마이다. 그와 동시에 두 가마터에서 수습한 자편의 음각국화문을 비교하면서 유천리의 것이 사당리보다 섬세하고 기교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현재 유천리 요지군은 지표면의 현상 변경이 심하여 지표조사에 의한 결과만으로는 유천리에서 제작된 자기를 지역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또는 청자요지와 백자요지로, 나아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명확히 구분하여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野守健수습 자편과 일제 때 정읍에 살았던 후까다(深田泰壽)가 유천리에서 도굴하여 사장하였던 자편 및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과 1993년 원광대학교에서 수습한 자편들을 살펴봄으로서 그 개략만을 유추할 수 있다. 후까다의 도편 중 일부가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유물 전부를 기증하신 동원(東垣)선생에게 흘러들어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파편을 살펴보면 유천리에서는 강진 요지군에서 제작된 것들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문양을 가진 청자와 백자들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현재 사적비가 세워져 있는 12호 요지에는 소문 · 음각 · 양각 · 투각 · 상감 등 전성기의 청자가 제작되었으며, 또한 상감이나 동화 · 철유청자와 함께 제작된 백자 · 상감백자 등은 강진 사당리보다 그 양이 많으며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천리 가마의 개요(開窯) 시기는 초기청자 가마터에서 표지적(標識的)으로 출토되는 햇무리굽 완이나 전접시 등의 청자가 없어 11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1269년부터 중앙정부에서 공물(貢物)로 받아들이는 ‘가지(干支)’명(銘)이 있는 청자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점이나 고려 말로 편년되는 자편이 수습되는 요지가 아직까지는 없는 점으로 미루어 13세기 말 이나 14세기 전반에 폐요(廢窯)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 유천리요의 운영을 무신집권 과 연결시켜 ‘가지(干支)’명(銘)’ 청자가 생산되기 이전에 폐요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유천리에서는 명문(銘文)이 있는 청자나 백자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청자
굽안바닥 한쪽에 음각으로 쓴 ‘효문(孝文), ‘소청조(照淸造)’, ‘갑(甲)’, ‘의장(義藏)’, ‘동장(敦章)’, ‘장(莊찼)’ 등의 명문이 알려져 있다. 특히 명문이 쓰여진 편들은 거의 매병 계통의 저부로 추정되며, 음각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상감으로 문양이 시문되어 있는 것은 ‘장(莊)’명(銘)이 있는 것이 유일하다. 음각이나 상감으로 문양을 시문하고 초벌구이 한 후, 그 표면에 철화로 동자회(桐紫灰) 명문이 쓰여진 색견편(色見片))도 있다. 흑상감(黑象嵌)으로 ‘하(下)’, ‘유(兪)‘ 명을 백상감으로 ’게묘..별..(癸卯..別..) 명을 쓴 자편도 있다.
유천리 요지에서 직접 만들어진 사실은 확인할 수 없으나 부안의 사찰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철화청림사천당화? 명화병(靑磁鐵畵靑林寺天堂花? 銘花甁)도 있다.
백자
굽 안바닥 한쪽에 음각으로 쓴 ‘의장(義藏)’, ‘지(志)’, ‘보아(甫?)’, ‘응지(應志)’· ‘존(存)‘ 명이 알려져 있으며, 작자명(作者名)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4. 보안면 우동리 요지
우동리의 조선 초기 분청사기 요지군은 현재 감불과 신리 마을 주위에 있어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부안군 토산조의 ‘자기소일재현남감불리품중(磁器所一在縣南甘佛里品中)’ 내용에 있는 자기소 중품 감불(磁器所 中品 甘佛)이라는 주장이 있다. 전기(前記)한 유천리요지 자판을 소장하게 된 것과 같은 경위로 우동리에서 수습된 것으로 알려진 분청사기 파편이 이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그 생산품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우동리 요지에서는 대호. 편병(大壺. 扁甁) 등 다양한 기종의 분청사기가 만들어졌다. 문양은 상감이나 인화기법이 주로 사용되어 초기 분청사기의 특징이 두드러지며, 문양 종류는 어문. 모란문. 연화문. 우점문(魚紋.牧丹紋.蓮花紋.雨點紋) 등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어문이나 연화문은 흑 · 백 선상감(線象嵌)으로, 대호 등의 모란문은 백면상감(白面象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태토가 잡물이 없이 치밀하며 유색이 좋고 문양이 정성스럽게 시문되었으면서도 소재나 시문기법이 한정되어 있어 우동리요만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가마의 운영시기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 분청사기 ‘정통오년(正統五年)’명어연문대반(銘魚蓮文大盤) 등 여타의 분청사기 편년작과 문양의 시문기법이나 소재 등을 비교하여 대체로 1420~145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동리요지는 인근에 조선 초기의 백자 요지도 있어 분청사기에서 백자로의 이행을 살펴 볼 수도 있는 중요한 요지이다.
5. 結語
이처럼 부안 지역에는 예부터 지금까지 도자공예의 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전기에는 전국의 어느 지역과도 견줄 수 있을 만한 자기 생산지였다. 이들 가마터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여, 근래에 조사가 활발해지고 있다. 또 종래 요지로 추정되는 지역의 지표가 현상 변경이 심하여 가마터가 심하게 파괴되었을 것으로 여기지기도 한다. 하지만 단편적인 예로 상기한 ‘계축(癸丑)’명(銘) 청자와(靑瓷瓦)와 같은 유물이 최근의 지표조사에서 수습된 것으로 보아, 지역에 따라서는 퇴적층이나 가마가 잘 보존된 곳이 있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부안지역의 도자공예를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1차적인 자료가 되는 가마터의 지표조사나 발굴조사가 보다 정밀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하겠다. 더불어 그러한 1차 자료를 이용해서 정치적인 또는 사회 · 경제사적인 원인이나 결과로 인해 부안의 도자공예가 걸어온 길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하겠다.
[출처] 구일회 국립전주박물관 학예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