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면 유천리 가마터
1929년 일본인 神田藏解 野守健에 의한 보안면 우동리 요지 조사 시에 우연히 세상에 알려지게 된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가마터는 고려시대 청자는 물론 백자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자기를 만들던 가마터였다.
부안군 유천리 가마터들은 사적 69호로, 약 45개소의 요지가 알려져 있다. 대부분 유천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 남측에 밀집해 있으며, 그 주변 산록에도 수 개소가 널려 있다.
일제 때부터 심한 도굴로 인하여 최고의 파편을 간직한 요지군의 퇴적층이 많이 파괴된 상 태이며, 가마터들도 지표는 거의 전답으로 변하여 보존 상태는 좋지 않은 편이다.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파괴된 퇴적층을 수습 조사한 후, 지표조사 이외에 별다른 조사는 없었으며, 1998년 원광대학교에서 27호와 28호로 지정된 곳을 발굴하여 모두 5기의 가마를 확인하였다. 발굴 결과 가마는 진서리와 같이 자연 구릉을 이용한 토축등요로, 가마의 폭은 1.3m 내외로 밝혀졌다.
출토된 유물의 기종은 대접 · 발· 잔 · 접시 등 소형의 일상용기가 주종이었 다. 문양 시문기법은 음각 · 양각 · 음양각 · 압출양각 · 퇴화 · 철화 · 흑백상감기법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특히 흑백상감된 매병편과 각종 상감편이 수습되었다.
유색은 녹청색 · 담록색 · 회청색을 띠며, 드물게 비색의 예도 있었다. 번조 받침은 점토가 섞인 내화토를 접지면 4~5곳에 받쳐 구운 것들이 많으며, 규석받침과 모래받침도 혼재하고 있었다. 요도구로는 원통형 갑발과 각종 형태의 도침이 수습되어 상품 자기를 구웠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수량에 차이는 있으나 무문 · 음각 · 양각 · 퇴화 상감기법이 공존하며, 조질청자와 양질청자가 같은 퇴적층에서 공반(共伴)되고 있어 이들은 시기의 차이가 아니라 수요계층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가마의 운영 시기는 유천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청자들을, 하한이 각각 1146.1157.1202년인 인종 장릉 출토의 청자들 · 청자와(靑瓷瓦)와 함께 출토된 청자들 · 명종 지릉 출토의 청자들과 비교하면서, 12세기 후반의 명종년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 산록에 위치한 가마터의 발굴조사 결과가 유천리 요지군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처음으로 유천리 가마터를 발견하여 조사한 野守健은 1934년 학계에 그 개략을 보고하면서 강진 청자에 버금가는 요지로만 소개하였다. 그러다가 1938년 6월 조사시에 유천리 12호 요지의 퇴적층이 도굴된 것을 보고 바로 그 부분에 탐색구를 넣어 자편을 수습하면서 순 청자 · 상감청자 · 순백자 · 상감백자와 함께 동화자기가 혼재된 층위를 발견하였다고 하면 서, 강진 사당리 7호 요지 수습 자편들과 유사점이 많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당리 7호는 강진요에 서도 가장 전성기의 청자를 생산했던 가마이다. 그와 동시에 두 가마터에서 수습한 자편의 음각국화문을 비교하면서 유천리의 것이 사당리보다 섬세하고 기교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현재 유천리 요지군은 지표면의 현상 변경이 심하여 지표조사에 의한 결과만으로는 유천리에서 제작된 자기를 지역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또는 청자요지와 백자요지로, 나아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명확히 구분하여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野守健수습 자편과 일제 때 정읍에 살았던 후까다(深田泰壽)가 유천리에서 도굴하여 사장하였던 자편 및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과 1993년 원광대학교에서 수습한 자편들을 살펴봄으로서 그 개략만을 유추할 수 있다. 후까다의 도편 중 일부가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유물 전부를 기증하신 동원(東垣)선생에게 흘러들어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파편을 살펴보면 유천리에서는 강진 요지군에서 제작된 것들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문양을 가진 청자와 백자들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현재 사적비가 세워져 있는 12호 요지에는 소문 · 음각 · 양각 · 투각 · 상감 등 전성기의 청자가 제작되었으며, 또한 상감이나 동화 · 철유청자와 함께 제작된 백자 · 상감백자 등은 강진 사당리보다 그 양이 많으며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천리 가마의 개요(開窯) 시기는 초기청자 가마터에서 표지적(標識的)으로 출토되는 햇무리굽 완이나 전접시 등의 청자가 없어 11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1269년부터 중앙정부에서 공물(貢物)로 받아들이는 ‘가지(干支)’명(銘)이 있는 청자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점이나 고려 말로 편년되는 자편이 수습되는 요지가 아직까지는 없는 점으로 미루어 13세기 말 이나 14세기 전반에 폐요(廢窯)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 유천리요의 운영을 무신집권 과 연결시켜 ‘가지(干支)’명(銘)’ 청자가 생산되기 이전에 폐요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유천리에서는 명문(銘文)이 있는 청자나 백자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가. 청자 굽안바닥 한쪽에 음각으로 쓴 ‘효문(孝文), ‘소청조(照淸造)’, ‘갑(甲)’, ‘의장(義藏)’, ‘동장(敦章)’, ‘장(莊찼)’ 등의 명문이 알려져 있다. 특히 명문이 쓰여진 편들은 거의 매병 계통의 저부로 추정되며, 음각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상감으로 문양이 시문되어 있는 것은 ‘장(莊)’명(銘)이 있는 것이 유일하다. 음각이나 상감으로 문양을 시문하고 초벌구이 한 후, 그 표면에 철화로 동자회(桐紫灰) 명문이 쓰여진 색견편(色見片))도 있다. 흑상감(黑象嵌)으로 ‘하(下)’, ‘유(兪)‘ 명을 백상감으로 ’게묘..별..(癸卯..別..) 명을 쓴 자편도 있다.
유천리 요지에서 직접 만들어진 사실은 확인할 수 없으나 부안의 사찰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철화청림사천당화? 명화병(靑磁鐵畵靑林寺天堂花? 銘花甁)도 있다. 나. 백자 굽 안바닥 한쪽에 음각으로 쓴 ‘의장(義藏)’, ‘지(志)’, ‘보아(甫?)’, ‘응지(應志)’· ‘존(存)‘ 명이 알려져 있으며, 작자명(作者名)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국립전주박물관 ‘전북의 역사문물3 부안’에 실린 글을 따 옮김]
부안 유천리 청자요지 발굴조사 성과 및 의의
1. 전북 부안 일대에 산재해 있는 가마터들은 전성기 고려 상감청자의 대표적인 제작지로 전남 강진 일 대의 가마터들과 함께 우리나라 고려청자 가마터의 쌍벽을 이룸.
2. 강진은 여러차례에 걸쳐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부안 유천리 청자가마터의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이번이 처음임.
3. 발굴조사 구역내에서 모두 5기의 가마가 확인되었으며, 이는 유천리 청자가마구조와 성격, 도자의 편닌을 밝힐 수 있는 최초의 예임.
4. 제 2구역에서 조사된 3기의 가마는 1호가마, 3호가마, 2호가마 순으로 조성되었던 것 으로 판명되어 고려도자의 편년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 됨.
유천리 요지에서 직접 만들어진 사실은 확인할 수 없으나 부안의 사찰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철화청림사천당화? 명화병(靑磁鐵畵靑林寺天堂花? 銘花甁)도 있다. 나. 백자 굽 안바닥 한쪽에 음각으로 쓴 ‘의장(義藏)’, ‘지(志)’, ‘보아(甫?)’, ‘응지(應志)’· ‘존(存)‘ 명이 알려져 있으며, 작자명(作者名)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5. 그동안 순청자와 상감청자는 어느 정도 시간차를 두고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번 발굴조사에 따르면, 수량에 차이는 있으나 무문, 음각, 양각, 상감기법이 공존하고 있음이 밝혀짐.
6. 부안 유천리 청자가마에서 제작된 상감청자들은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것들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들임. 이번 발굴조사에서 이러한 상감청자들이 제작된 가마와 제작용구 등 귀중한 자료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주목됨. 특히 12세기 후반 상감청자의 시작을 알려주는 자료들이 출토되어 우리 나라 상감청자의 발생을 보여주고 있음.
7. 조질청자와 양질청자가 같은 퇴적층에서 공반되고 있어 이들은 시기의 차이가 아니라 수요계층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됨.
8.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부안의 청자제작 기술은 강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나라, 고창 용계리 청자요지에서 초기청자의 기술을 익히고, 이들이 줄포만을 건너와 진서리에 자리를 잡은 후 제작기술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며, 이를바탕으로 유천리에서 상감청자 등 고려시대 가장 뛰어난 청자를 제작했던 것으로 확인됨.
[1998.09.22 원광대학교 박물관(윤용이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