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름있는 고요(古窯)가 이 근처에...
부안의 유천리 청자가마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청자를 굽던 곳인데도 잘 알려지지 않은 채 700여 년을 내려오다 1900년대에 들어서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발간된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버드내」로 하야 야영(野營)같이 산재한 염막(鹽幕)을 보면서 포변(逋邊)으로 나가노라면 「실음거리고개」라는 소나무 등성이 하나를 넘어 옛날의 검모포진(黔毛浦鎭), 오늘의 진서리에 당도하니...중략, ... 길바닥에 반짝거리는 것이 모두 고청자(古靑瓷)의 파편임은 어찌할진지, 집어보면 매우 훌륭한 유질(釉質)이 많으니 혹시 이름 있는 고요(古窯)가 이 근처에 있었던 것 아닌가…”“고요(古窯)가 이 근처에 있었던 게 아닐까...”하고 최남선이 궁금해 했던 이곳은, 1929년대 일본인 野守健에 의해 보안면 우동리 분청자요지 조사시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일대 가마터(유천리 가마터)를 조사한 야수건은 1934년 학계에 그 개략을 보고하면서 강진 청자에 버금가는 요지로만 소개하였다. 그러다가 1938년 6월 조사시, 이 일대 가마터에서 수습된 자편을 보고 유천리의 것이 강진보다 섬세하고 기교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때 발굴된 가마터는 33개소로 순청자, 상감청자, 철회청자, 진사청자, 백자, 철유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기형(器形)과 수법도 다양한 매병(梅甁), 주병(酒甁), 호(壺), 탁잔(托盞), 완(梡), 주자(柱子), 합(盒), 접시 등에 음각, 상감으로 시문된 국화문,
모란문, 운학문, 수금문, 인물문양 등으로 고려청자 최성기(最盛期)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우수한 파편을 가진 가마터의 퇴적층은 거의 파괴되었으며, 이곳에서 나온 수백 점의 국보급 고려자기는 대부분 일본으로 빼돌려졌다. 또 해방 후에는 이 일대에 개간 허가가 내려져 더욱 파괴되고 말았다.
두 번째로는 1967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세 번째로는 1998년 원광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윤용이 단장)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때 유천리 일대가 전성기 고려 상감청자의 대표적 제작지임을 재확인했을 뿐 아니라, 이곳 유천리 청자가마에서 제작된 상감청자들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것들임이 밝혀졌다.
참고문헌.전라북도 문화재지, 심춘순례, 부안의 역사문물전(전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