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에 숨겨진 고려비색(翡色)
중국의 영향으로 탄생하여 개발되어 온 우리의 청자는, 머지않아 중국청자의 전성기였던 송나라 청자보다도 품질 면에서 월등히 앞서게 되었다. 북송 말의 태평노인(太平老人)이 편찬한「유중금(釉中錦)」을 보면 천하제일 10가지를 꼽는 대목에서 중국청자를 제쳐놓고 「고려비색(高麗秘色)」을 꼽았다. 이것은 당시 태평노인뿐만 아니라 송나라 지식인들 안목에도 고려청자가 그만큼 훌륭하게 평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청자의 색은 어떤 색이기에 청자의 본고장인 송나라 사람들이 천하명품으로 꼽았을까? 고려인들은 청자를 비취색을 뜻하는 ‘비색(翡色)’이라 불렀다. 중국인들이 고려비색(秘色)이라 부른 것과는 다르다. 고려만의 비밀스런 색이라는 뜻 외에 청자의 색깔에 대해 특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려 인종 1년(1123)에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고려청자를 “사기그릇의 빛이 푸른 것을 고려인들은 비색이라 부른다. 근년에 와서 제작이 정교해지고 유색이 더욱 아름답다”고 평가한 바 있다. 청자는 이렇게 신비하고 오묘한 빛깔을 담고 있다. 그런데 송나라 사람들이 천하제일로 꼽았던 이 시대의 청자를 생산하던 곳이 바로 전남 강진과 부안의 유천리 일대이다. 청자의 시초인 회유토기(灰釉土器)는 중국 고대 은대(殷代)에서부터 만들어졌지만, 소량에 불과했고, 한 대(漢代)에 양자강 입구의 월주요(越州窯)에서 초기적 형태의 청자가 만들어지면서 5~6세기 경부터 차츰 발달하기 시작하여 송대(宋代)에 와서 절정기를 맞게 되었다.
우리의 청자는 전기와 중기,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는 9~10세기로 발전기라 할 수 있으며, 초기의 청자가 자기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이 시기는 통일신라 말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청자에 음각문양과 철회문이 등장하는 등 서서히 고려청자의 특징이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전성기인 중기는 12세기부터 13세기 전반까지로 볼 수 있는데, 12세기 전반 50년 동안은 순청자(純靑磁)의 전성기이고, 12세기 중반부터 13세기 전반은 그 유명한 상감청자(象嵌靑磁)의 전성기이다. 상감이란 문자그대로「형상이나 문양을 새겨 넣은 청자」라는 뜻이다. 12세기 중엽부터 고려도공들의 창의로 개발된 세계도자사상 독보적인 장식기법으로 고려청자의 뛰어난 특색이 되었다. 이러한 청자상감은 비색(翡色)의 그윽함, 곡선의 미끄러움과 더불어 고려청자가 지닌 3대 특장을 이루었으며, 이 기법은 개발된 후 대체로 1231년 몽고의 침입으로 조정이 강화도에 40년간 천도(遷都)하는 무렵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이 무렵에는 이미 정교한 도문을 흑상감한 백자상감도 개발되었는데, 그 주산지가 바로 부안의 유천리 가마였다.
쇠퇴기인 후기는 무신집권으로 문신귀족들이 무너지는 13세기 후반기부터 14세기말 고려의 망국에 이르는 동안 고려청자의 양상은 급격히 퇴조해 갔다. 청자의 태토는 거칠고 두꺼워지며 상감기법은 성글고 대범해졌다. 또한 밝은 유약의 비색이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문양도 퇴보해 가다가, 조선조 초에 이르러서는 새 세대의 새 생명을 안은 분청사기로 탈바꿈하여 임진왜란전까지 백자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자기로 명맥이 이어지는데, 유천리 인근의 우동리 분청자요지는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그리고 우동리 인근 석포리의 백자요지는 분청사기에서 백자로의 이행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요지이다. 이렇듯 부안은 청자-분청사기-백자로의 맥이 이어져 온 명실상부한 도예의 고장이다.
참고문헌:한국미술전집, 전라북도 문화재지, 부안의 역사문물전(전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