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나루 이야기

  예전에 부안에 들어오자면 지금의 동진대교가 있는 동진나루, 백산의 군포나루, 고부천의 나루들을 건너야 했다. 이 나룻터에는 뱃사공이 나룻배와 더불어 연중 대기하고 있다가 길손들을 건네주는 일을 해왔다. 그들은 세습하여 뱃사공 노릇을 하였는데 정기적, 항시적으로 이용하는 주민들이 거두어 주는 뱃새경과 외지인들에게서 받는 선임(船賃)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뱃새경은 이용하는 횟수에 관계없이 근처 주민들은 한 가구당 1년에 보리 1말, 또는 5되씩 2회에 걸쳐 부담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특례가 있어 지방의 관원이나 양반에게는 뱃새경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관원이나 양반들을 일일이 다 못 알아보아 시비가 생기는가 하면, …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

  박지원(1737~1805)이 쓴 소설 <허생전>을 보면 허생에게 선뜻 만냥을 빌려주었던 변씨가 있다. 그는 허생과 같은 큰 그릇을 초야에 썩힐 수 없다고 생각하여 허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야흐로 지금 사대부들간에는 지난날 남한산성에서 받은 호란의 치욕을 씻으려고 하고 있네. 지략과 재주를 갖춘 선비로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한번 일어나서 슬기를 펼쳐볼 만한 때가 아닌가. 자네와 같은 재주를 가지고 어째서 묻혀 살며 그대로 썩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에 허생은, “허허, 예로부터 한평생을 묻혀 산 사람이 어찌 한둘에 그치겠는가. 저 조성기로 말할 것 같으면 적국에 사신으로 …

허균과 이매창, 우반동, 그리고 홍길동전

    허균은 재주가 출중해서 여러 차례 과거에 장원급제했지만 굽힐 줄 모르는 대쪽같은 성격 탓에 다섯 차례나 관직에서 파직을 당했다. 그런 그는 외가가 강릉, 친가가 한양이었지만 파직 기간 중 대부분의 기간을 호남에서 보냈다. 허균이 자신의 심신을 달래 줄 휴식처로 선택한 호남은 국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홍길동전’ 등 주옥같은 작품이 잉태한 곳이며, 조선왕조의 성리학적인 봉건질서에 항거하는 개혁세력의 요람이었다. 또 1,3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기축옥사(1589)의 현장이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황량하기 그지없던 곳이었다. 호남 중에서도 부안은 허균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는 …

영남엔 곽재우, 호남엔 김홍원

    영욕으로 점철된 김홍원의 일생 우반동 김씨들이 현조로 손꼽는 인물 중의 한 명이 바로 김석필의 증손인 김홍원이다. 그는 약관에도 못 미치는 18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3년 후인 21세에 별시 문관 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초시에 합격한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결국 문과에 급제하지는 못했다. 그가 과거에 합격하거나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받았던 합격증서와 임명장이 현재 32장 남아 있다. 이러한 합격증서와 임명장을 통하여 볼 때, 김홍원의 관직 생활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실은 그가 벼슬생활을 …

우반동을 사들인 김홍원

    우반동을 사들인 김홍원 내가 긴히 돈 쓸 일이 있기 때문에 부안 입석면(立石面) 하리(下里) 우반(愚磻)에 있는 전답을 김홍원에게 판다. 이 전답은 나의 6대조이신 우의정 문간공(柳寬)께서 태조조에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어 왕으로부터 받은 사폐지이다. 그런데 이곳이 서울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관리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궁벽한 산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고 방치해 둔 지가 어언 수백 년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 임자년(1612) 가을에 내가 비로소 이곳으로 내려와 … 논과 밭을 만들었는데… 그 후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이 …

꽃밭시암

      사람이 사는 땅이나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사람이 땅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그 땅의 지형이나 지물을 다른 곳, 다른 물체와 그 개념을 구분하기 위하여 이름을 붙였다. 이는 사회적 계약인 동시에 언어기호인 것이다.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5월 13일

우반십경(愚磻十景)

    우반동에 들어서며… 우반동이 속해 있는 보안면은 부안군의 남서부 곰소만에 인접하여 위치하며, 동쪽은 정읍시 고부면, 남쪽과 서쪽은 줄포면과 진서면, 그리고 북쪽은 상서면과 주산면에 접해 있는데 면적은 41.9㎢이다. 이곳의 산들은 노령산맥이 서해를 향해 달려서 우뚝 멈춰 선 형국으로 먼저 옥녀봉을 만들고, 계속 나아가 변산반도를 이루게 된다. 우반동은 호남 명산의 하나인 변산의 한줄기를 감싼 채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서 한눈에 그 형세를 짐작할 수 있다. 우반동을 감싸고 있는 산으로는, 북서쪽은 해발432.7m인 옥녀봉이 있으며, 이 산은 감불마을 위쪽에 있는 삼예봉(390m)에 연결되어 있다. 이 …

검모모각(黔毛暮角)

    저 당산나무는 수군들의 호각소리를 들었겠지… ‘변산의 얼’이라는 책에 부안의 노거수 3그루가 소개되어 있기에 찾아 나선 적이 있다. 내소사 마당과 운호리에 있는 당산나무는 그동안 많이 봐 온 터라 무심하게 사진만 찍고 말았는데, 구진 마을 뒷산에 있는 거대한 당산나무를 처음 보는 순간의 느낌은 달랐다. 산 중턱에 떡 버티고 서서 곰소만을 굽어보고 있는 그 위용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죽하면 오줌을 싸려고 바지 지퍼로 손이 가다가 ‘이크크! 신령스런 나무 밑에 오줌 싸다 벼락 맞을라~’는 생각에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구진은 40~50여 가호의 …

가짜 이매창 시비

    부안사람들에게 성황산 서림공원은 어머니의 품처럼이나 아늑하고 넉넉한 휴식공간이다. 그런가하면 조선조 이래 부안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적으로 배어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정서를 한층 더 풍요롭게 하여 주는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이곳 서림공원에는 부안이 낳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이매창의 시비가 두 기 세워져 있다. 한 기는 1974년 4월 27일에 매창기념사업회(회장 金泰秀)에 의하여 서림정(西林亭) 옆 금대(琴台) 아래에 세워졌는데, 이매창의 대표 시라 할 수 있는 <이화우(梨花雨) 흩날일 제>를 새겨 세운 시비이고, 또 한 기는 1997년 7월 1일에 부안군에서(군수 강수원) 세운 것으로 처음 세운 …

계화도봉수대(界火島烽燧臺)

  -위치: 계화면 계화리 산 119 ( E 126。38′,N 35。47′) -재료: 석축 -시대: 삼국시대 부안에서 14호 군도를 따라 창북리에 이르면 확트인 넓은 벌판 너머로 산뭉치 하나가 섬처럼 떠있다. 이 산뭉치가 계화도 계화산(246.3m,봉화산이라고도 한다.)이고, 이 드넓은 들판이 “계화미”로 유명한 계화도간척지평야이다. 계화도는 원래 문자 그대로 섬이었다. 1963년 제1차경제개발 5개년 사업의 하나로 간척공사가 시작되어, 계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제1호 계화도-문포간 방조제 9,254m, 제2호 계화도-돈지간 방조제 3,556m를 순수 우리 기술진으로 막아 광활한 평야를 만들어 내었다. 이후 인구가 늘어나서 1976년 10월 2일에는 행안면에서 분리되어 계화출장소가 개소되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