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과 이매창, 우반동, 그리고 홍길동전

 

▲홍길동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허균은 재주가 출중해서 여러 차례 과거에 장원급제했지만 굽힐 줄 모르는 대쪽같은 성격 탓에 다섯 차례나 관직에서 파직을 당했다. 그런 그는 외가가 강릉, 친가가 한양이었지만 파직 기간 중 대부분의 기간을 호남에서 보냈다. 허균이 자신의 심신을 달래 줄 휴식처로 선택한 호남은 국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홍길동전’ 등 주옥같은 작품이 잉태한 곳이며, 조선왕조의 성리학적인 봉건질서에 항거하는 개혁세력의 요람이었다. 또 1,3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기축옥사(1589)의 현장이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황량하기 그지없던 곳이었다.

호남 중에서도 부안은 허균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는 부안의 명기이자 시인인 이매창과 애틋한 사랑을 나눴고, 또 그가 공주목사직에서 파직당한 후에는 보안의 우반동 선계안골에 있는 정사암에서 쉬며 심신을 달랬다. 이러한 이유로 정사암이 홍길동전의 산실로 추정되고 있다.

허균과 이매창

허균은 그의 큰형 허성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1601년, 충청도·전라도 지방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운판관으로 호남지방을 순시하면서 부안의 명기이자 시인인 계생(매창)을 만나 애틋하고 순수한 사랑의 씨앗을 뿌린다. 허균이 33살, 매창이 29살 때의 일이다. ,

그때를 허균은 그의 ‘조관기행’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축년(辛丑年) 1601(선조34)년 벼슬을 내놓고 동작(銅雀) 나루를 건넜다. 7월 壬子(23일)에는 부안(扶安)에 도착했는데 비가 쏟아져서 그곳에 머물렀다. 고홍달(高弘達)이 찾아왔으며 기녀 계생과도 만났다. 그 얼굴이 비록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재주가 있고 정이 많은 여인이어서 가히 종일토록 더불어 詩, 歌를 주고받으며 즐길 수가 있었다.”

허균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부안에 오기 전인 1599년 황해도사(종5품)로 있을 때만 해도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면서 물의를 일으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우를 하였고 더구나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매창을 보았다.

“계생은 부안의 창녀라.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1610년 매창이 죽었다는 소문이 허균에게 들리자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 시를 남겼다.

계량(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 하고
밝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무렵
누가 설도의 무덤곁을 찾아 오려나

허균의 이 시를 보더라도 매창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매창은 비록 천한 기생이기는 하지만 남다른 시 재주를 지녔던 여자로 허균과 오랫동안 사귈 수 있었던 것이다. 허균이 두 차례나 계생에게 보낸 서신과 ‘학산초담’, ‘성수시화’에서 계생의 시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아도 짐작이 된다.

 

허균과 우반동 정사암, 그리고 홍길동전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은 시기를 대략 1612년경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 시기는 허균이 부안과 인연을 맺은 해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세월이며, 그 무렵 허균은 큰형인 성이 죽은(1612년 8월 9일)후, ‘칠서의 옥’과 ‘기축옥사’가 일어났던 1613년까지 부안의 우반동 정사암에 칩거하며 홍길동전을 집필했던 것 같다.

그 무렵의 허균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허균이 부안에 와 이매창과 만난 때는 1601년 7월 23일이었다. 그 후, 1604년 수안 군수에 부임되었다가 곧 파직되고, 1607년 3월에 삼척부사 부임 5월만에 파직되었으니, 벼슬길에 들어선지 십년 쯤만에 세 번이나 벼슬자리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런 허균은 1607년 12월 9일 또 다시 공주 목사로 등용되었다. 이때부터 허균은 서류들과 더욱 가깝게 지내면서 개혁의 꿈을 키운다. 이때 서류들은 허균의 뒷바라지에 힘입어 ‘서류를 허통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허균은 서류출신인 심우영, 박응서 등과 교유했다는 이유로 1608년 8월에 다시 공주목사직에서 파직 당하는데, 당시 부안 현령으로 있던 심광세는 낙심하고 있던 그에게 부안의 주을래리(줄포) 부근에 전답을 마련해 주었고, 허균은 부안의 보안 우반동 정사암에 와 쉬었다. 허균은 그때를 산문집「성소부부고」卷6 文部三 記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에 남겼다.

“부안현(扶安현) 해안에 변산(邊山)이 있고, 변산 남쪽에 계곡이 있는데 우반(愚반)이라 한다. 그 고을 출신 부사(府思) 김공청(金公淸)이 그 빼어난 곳을 택하여 암자를 짓고 정사(靜思)라 이름 지어 노년에 즐겨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다. 나는 일찍이 사명을 받들어 호남을 왕래하였는데, 그 경치에 대해 소문은 많이 들었으되 미처 보진 못했었다.
나는 본시 영예나 이익을 좋아하지 않아, 매양 상자평(尙子平)의 뜻을 지녔으나 그 소원은 아직 이루지 못했었다. 금년에 공주에서 파직 당하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서 장차 소위 우반이라는 곳에 집을 짓고 살 결심을 하였다. 김공의 아들 진사(進士) 등(登)이란 이가 ‘우리 선군(先君)의 폐려(弊廬)가 있으나 저는 지킬 수가 없으니 공이 수리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고달부(高達夫) 및 두 李씨와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보았다. 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서니 시내가 있어 그 물 소리가 옥 부딪는 듯하여 졸졸 수풀 속으로 흘러나왔다.
시내를 따라 몇 리 안 가서 산이 열리고 육지가 트였는데, 좌우 가파른 봉우리는 마치 봉황과 새가 나는 듯 높이를 헤아리기 어려웠고, 동쪽 산기슭에는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듯 서있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곧장 거처할 곳으로 나아가니, 동서로 언덕이 셋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반반하게 감아 돌고 대나무 수백 그루가 있어 울창하고 푸르러 상기도 인가의 폐허임을 알 수 있었다. 남으로는 드넓은 대해가 바라보이는데 금수도가 그 가운데 있으니,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서림사(西林寺)가 있는데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 동쪽을 거슬러 올라가서 옛 당산나무를 지나 소위 정사암이란 데에 이르니 암자는 방이 겨우 네 칸이며 바위 언덕에다 지어 놓았는데, 앞에는 맑은 못이 굽어보이고, 세 봉우리가 높이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절벽에 쏟아져 흰 무지개처럼 성대하였다. 시내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우리 네 사람은 산발(散髮)하고 옷을 풀어 해친 채 못 가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활짝 피고 단풍은 반쯤 붉었는데 석양이 산봉우리에 비치고 하늘 그림자는 물에 거꾸로 비친다. 굽어보고 쳐다보며 시를 읊조리니 금새 티끌 세상을 벗어난 느낌이어서 마치 안기생(安期生)과 선문자(선門子)와 함께 삼도(三島)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얻어 이 몸을 편케 할 수 있으니 하늘이 나에 대한 보답도 역시 풍성하다고 여겼다. 소위 관직이 무슨 물건이기에 사람을 감히 조롱한단 말인가.
고을 원인 심덕현(沈德顯)이 암자가 피폐하되 보호하는 이가 없음을 보고 승려 세 사람을 모집하여 쌀과 소금 약간 섬을 더해주고 목재를 베어 수리하게 한 뒤 관역(官役)을 바꾸어 거기에 머물러 지킬 것을 책임지웠다. 암자는 이로 말미암아 복구되었다.”

그 후로도 허균은 1610년 10월에는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지만 곧 취소되고, 11월 전시 대독관이 되었으나 조카들을 급제시켰다는 혐의로 그해 12월에 전라도 함열로 유배된다. 이때(1611년 4월 23일)에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다. 11월에 귀양이 풀리자 부안으로 다시 내려왔다. 이 시기에 우반동 정사암에 칩거하며 홍길동전을 집필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6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