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모모각(黔毛暮角)

 

 

저 당산나무는 수군들의 호각소리를 들었겠지…

‘변산의 얼’이라는 책에 부안의 노거수 3그루가 소개되어 있기에 찾아 나선 적이 있다. 내소사 마당과 운호리에 있는 당산나무는 그동안 많이 봐 온 터라 무심하게 사진만 찍고 말았는데, 구진 마을 뒷산에 있는 거대한 당산나무를 처음 보는 순간의 느낌은 달랐다. 산 중턱에 떡 버티고 서서 곰소만을 굽어보고 있는 그 위용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죽하면 오줌을 싸려고 바지 지퍼로 손이 가다가 ‘이크크! 신령스런 나무 밑에 오줌 싸다 벼락 맞을라~’는 생각에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구진은 40~50여 가호의 한적하기 그지없는 바닷가 마을이다. 그러나 바닷일로 먹고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칠산바다가 부려다주는 풍요를 만끽하며 마을 주민 모두는 바닷일로 생계를 이었으나, 1942년 일제가 범섬, 까치섬 등의 무인도와 곰소(일명,웅연도)를 연결하고 곰소항을 만들면서 부터 이 마을의 어업은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1960년대 말 칠산바다에서 조기, 갈치가 사라지면서 부터는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작은 마을 치고는 역사문헌에 이 마을만큼 많이 등장한 마을은 없을 것이다.

몽고는 고려를 짓밟은 다음 일본을 치기 위해 장흥의 천관산과 변산에서 배를 만들게 했다. 그렇다면 변산 어디에서 만들었단 말인가? 향토사학자들은 바로 이 구진마을로 비정하고 있다. 실제로, 육이오 후에 마을 앞 갯벌에 무수하게 묻혀 있는 통나무를 캐내 썼다고 한다. 통나무는 1.5미터 깊이에 묻혀 있었는데, 조선소의 도크처럼 넓게 바닥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을사람들은 증언한다.

조선시대에는 수군이 주둔했던 진(鎭)이 있었다. 문헌에 나오는 검모진 또는 검모포진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된 지명이다. 그 당시 바다에 정박해 있는 군함이나 수군의 훈련 모습, 호각소리 등은 꽤나 이색적인 풍경이었던 듯하다. 조선 선조 때 부안의 유학자 동상 허진동은 우반동 일대의 경승 10곳을 골라 ‘우반10경’을 지었는데, 그 중의 1경이 ‘검모모각’이다. 또한 사암 박순(선조 때 영의정)은 허진동의 우반10경에 붙여 시를 지었다.

 

우반10경 중의 1경인 ‘검모모각’을 아래에 소개한다.

검모모각(黔毛暮角) 검모 저물녁 호각소리

지는 해 산 너머로 그림자 거두고
화각 소리 옛날의 수자리에서 날려오네
그 소리 흩어져 들어오며 어둠 재촉하고
머물던 구름 다 돌아가 봉래산을 감싸네

<역주>
– 검모(黔毛):검모포로 부안현 남쪽 50리에 있으며 그곳에 수군이 주둔했던 진(鎭)이 있었다. 지금의 진서면 진서리 구진(곰소 옆)
– 화각 : 울긋불긋 채색한 호각. 즉 피리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5월 01일 06시 1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