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반동을 사들인 김홍원

 

▲우반동 부안김씨 고문서 중의 하나로, 반계 유형원의 할아버지 되시는 유성민이 김홍원에게 우반리 동변 일대를 팔면서 작성한 매매 문서이다. ‘證 長孫 學生 德彰’ 학생 덕창이 이를 증했는데 덕창은 반계 유형원의 소년기 이름이다.

 

우반동을 사들인 김홍원

내가 긴히 돈 쓸 일이 있기 때문에 부안 입석면(立石面) 하리(下里) 우반(愚磻)에 있는 전답을 김홍원에게 판다. 이 전답은 나의 6대조이신 우의정 문간공(柳寬)께서 태조조에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어 왕으로부터 받은 사폐지이다.
그런데 이곳이 서울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관리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궁벽한 산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고 방치해 둔 지가 어언 수백 년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 임자년(1612) 가을에 내가 비로소 이곳으로 내려와 … 논과 밭을 만들었는데… 그 후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이 땅을 경작해 오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에 장천(長川)이… 있다…. 내를 기준으로 그 서쪽은 그대로 두어 나의 농장으로 삼고, 내의 동쪽에 있는 집과 전답은 모두 김홍원에게 방매한다. 다만 그 가운데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가노(家奴) 삼충(三忠)이 김윤상으로부터 구입한 논 6마자기 15점… 등이다.
이것을 제외한 그 나머지 논과 밭은 모두 김홍원에게 방매하며… 새로 지은 기와집 20칸과 집 뒤 정자터, 누른 대나무 밭(黃竹田) 및 가노 삼충의 집 뒤에 있는 대나무 밭을 아울러 주되 가격은 목면(木棉) 10동(同)으로 흥정하고 서로 주고받은 후 영영 방매한다.

– 의역 : 전경목 박사(전북대 박물관)

이 문서에서
유성민은 그의 집안에서 우반동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 것은 6대조인 유관(1346~1433)이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어 이곳을 왕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반계 유형원(德彰)이 할아버지 유성민 곁에서 문서에 증(證) 했다. 이 문서가 작성 된 해는 인조 14(1636)년으로 유형원이 광해 14(1622)년에 태어났으니까 16세 때의 일이다.

우반동을 지금의 우신리, 우동리로 부르게 된 게 이 문서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김홍원이 유성민으로부터 구입한 땅이 우반동을 관통하여 흐르는 장천(長川)을 기준으로 그 동쪽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우반동 내에서 동쪽’이라는 뜻으로 ‘우반 동변리(愚磻 東邊里)라고 불렀다. 이러한 사실은 김홍원의 손자인 김번의 준호구를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이 문서에 의하면 김번이 주을래리(지금의 줄포)로부터 이거하여 정착한 곳이 바로 ’우반 동변리‘였다. 그후 이를 약칭하여 ’우동(愚東)‘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나중에 발음이 같은 ’牛東‘과 ’寓東‘ 등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김홍원은 유성민으로부터 기와집 등을 포함하여 우반동 동변리의 땅을 ‘목면(木棉) 10동(同)’을 주고 구입하였다. ‘목면’이란 ‘무명베(布)’를 가리키며 ‘동’이란 베를 세는 단위인데 50필(疋)을 1동으로 셈하였다. 따라서 김홍원은 유성민에게 무명베 500필을 주고서 위 당을 매입하였던 것이다.

유성민들으로부터 우반동 일대를 사들여 우반동에 뿌리를 내린 김홍원은 김석필의 증손으로, 약관에도 못 미치는 18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3년 후인 21세에 별시 문관 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초시에 합격한 이듬해에 임진왜란.그리고 몇 년 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창의의 깃발을 높이 내세웠다. 그는 먼저 변산으로 피난와 있던 사람들을 설득하여 의병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이어 도내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뜻있는 사람들에게 의거에 참여하도록 촉구하고, 전라도 순천부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르는 등, 곳곳에서 혁혁한 전승을 거두었다. 과장된 면이 없지는 않으나 당시에 그를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와 견주어 ‘영남에는 곽재우, 호남에는 김홍원’이라고까지 칭하였던 사실을 통해서도 그가 얼마나 커다란 전공을 세운 의병장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료출처 : “고문서를 통해서 본 우반동 김씨의 역사”(전경목 저)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