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

 

▲반계유적지

박지원(1737~1805)이 쓴 소설 <허생전>을 보면 허생에게 선뜻 만냥을 빌려주었던 변씨가 있다. 그는 허생과 같은 큰 그릇을 초야에 썩힐 수 없다고 생각하여 허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야흐로 지금 사대부들간에는 지난날 남한산성에서 받은 호란의 치욕을 씻으려고 하고 있네. 지략과 재주를 갖춘 선비로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한번 일어나서 슬기를 펼쳐볼 만한 때가 아닌가. 자네와 같은 재주를 가지고 어째서 묻혀 살며 그대로 썩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에 허생은, “허허, 예로부터 한평생을 묻혀 산 사람이 어찌 한둘에 그치겠는가. 저 조성기로 말할 것 같으면 적국에 사신으로 가더라도 솜씨있게 일을 처리할 사람이었지만 한평생 베잠방이로 세상을 마치지 않았던가. 유형원은 족히 어려운 전장에서 수만명 군졸의 군량을 댈 만한 재주를 가졌으면서도 들쭉날쭉한 바닷가에서 소요하고 있지 않은가. ”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은 그의 뛰어난 경륜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반계수록>을 집필하며 20여년을 보낸 `들쭉날쭉한 바닷가’가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이다. 이곳은 본래 우반동(愚磻洞)이라 하였는데 ‘반계(磻溪)’라는 호는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우반동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1346~1433)의 사폐지지(賜弊之地)였는데, 유관은 반계 선생의 9대조이다. 이 때부터 문화유씨들이 내려와 살기 시작하였다. 그의 증조 위(違)는 현령을 지냈고, 조부 성민(成民)은 정랑(正郞, 후에 참판으로 추증)을 지냈으며, 부친 흠(欽)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외조부 여주 이씨 이지완(李志完)의 벼슬은 참찬(參纂)이었다.

그의 조부 때부터 변산을 떠나 서울로 옮겨와 살았는데 유형원은 서울 정릉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4년 전인 1622년(光海君 14년)이었다. 부친은 28세에 어우당 유몽인의 옥사와 연루되어 억울하게 매를 맞아 죽었는데 이 때 유형원의 나이는 두 살이었다. 비록 어려서 부친을 잃었지만 명문 사대부 가문의 좋은 환경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의 경전을 읽으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의 스승은 외삼촌과 고모부였다. 외삼촌 이원진은 성호 이익의 당숙으로 하멜표류사건 당시 제주목사로 있었던 사람이다. 고모부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 감사를 역임하였고 대사헌까지 지낸 당대의 이름높은 외교관이기도 하였다.

▲위 왼쪽/반계 유형원이 손수 팠다는 우물, 우물은 울밖과 울안에 하나씩 있는데, 지금도 맑은 물이 솟고 있다.
위 아래쪽/돌기둥 우동리 입구, 즉 만화동에서 곰소쪽으로 500여m 가다가 평지뫼, 반계주유소를 끼고 반계 유형원 유적지를 지나 오른쪽 논가운데에 돌기둥 하나가 서 있다. 마을사람들 말에 의하면 이 돌기둥은 반계 유형원이 병사들을 훈련 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여러 개의 돌기둥 중 하나라고 한다. 여러개의 돌기둥 중 또 하나는 우신마을의 정자나무 옆에 있었다가 해방되던 해에 태풍으로 나무가 부러지면서 함께 넘어졌다고 한다. 이 돌기둥의 높이는 3m, 동서 0.9m, 남북 0.4m의 사각 형태이다. 논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농사짓는데 불편하여 한때 뽑아내려고 했으나 아주 깊이 박혀 있어 그대로 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래/반계수록

그러나 당시의 사회 형편은 암울하기만 하였다. 그가 15세 되던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형원은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피난을 갔었고, 다음해에 지금은 경기도 양평땅인 지평(砥平) 화곡리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이듬해에는 여주 백양동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이어 가정의 불행이 닥쳐왔다. 반계가 스물 세 살 되던 해에 조모상을 당했고 스물 일곱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다. 20대의 젊은 시기를 가정의 불행 속에 보낸 그는 탈상을 마치고 스물 아홉, 서른에 연달아 과거를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 해에 마지막 육친인 조부상을 당하였다.

마지막 상복을 벗은 서른 두살 되던 해(1653년, 효종 4년)에 조부의 고향인 보안현 우반동으로 이사하였다. 변산에 내려온 그는 이듬해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나 이후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말았다. 당쟁으로 인해 참화를 입은 부친을 보고 어릴 때부터 벼슬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처음 실패한 이후 거듭 과거를 본 것도 조부의 명령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진사과에 급제하기 이전인 서른 한 살 때 과거와는 거리가 먼 음운학에 관한 저술인 <정음지남(正音指南)>을 지은 것으로 보아 이미 과거지학(科擧之學)이 아닌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의 방향을 정했음을 알 수 있다. 진사과에 응시한 것은 선비로서 최소한의 사회적 대우를 받는 진사 정도의 칭호는 그의 저술활동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반계는 우반동에 20년간 묻혀 살며 <반계수록>의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 때의 모습을 후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반동은 변산에 있어 바닷가와 숲이 절승을 이루고 있었다. 삼간초옥을 송죽(松竹) 우거진 속에 지어 세상을 등지고 저술을 업으로 삼았다.—서재에는 서가를 수없이 올려 책을 무수히 쌓았고 대사립문은 항상 닫혀 있었다. 사슴이 낮에도 울안을 찾아들면 선생은 이것을 낙으로 삼았다.…”

조정에서는 변산 땅에 큰 인물이 숨어있다 해서 현종 6년에 관직에 오르도록 천거했으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한번 천거되었으나 ‘내가 지금 재상들을 알지 못하는데 그들은 어떻게 나를 안다고 하는 것일까’하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반계수록> 26권의 성립 연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연보 등을 추정하면. 그가 우반동으로 와서 은거하기 시작한 지 6년 후에서 11년 사이로, 그의 나이 38세에서 43세 사이가 될 것 같다. 임병양란을 겪고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경세제민의 정책론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전제(田制:토지제도)
2. 전제후록(田制後錄:재정, 상공업 관계)
3. 교선지제(敎選之制:향약, 교육, 고시 관계)
4. 임관지제(任官之制:관료제도의 운용관계)
5. 직관지제(職官之制:정부기구 관계)
6. 녹제(祿制:관리들의 보수관계)
7. 병제(兵制:군사제도의 운용관계)
8. 병제후록(兵制後錄:축성, 병기, 교통, 통신 관계)
9. 속편(續篇):의례, 언어, 기타
10. 보유편(補遺篇):군현제(郡縣制:지방제도 관계)

이상의 내용은 국가 체제의 전반적인 개혁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반계수록>에 나타난 내용의 특징은 부민(富民), 부국(富國)을 위해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개혁의 요체를 자영농민의 육성에 있다고 보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입각한 균전제(均田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즉 토지는 국가가 공유하고 일정량의 경지를 농민에게 나누어주자는 것이었다. 세제는 조(租)와 공물을 합쳐 경세(經稅)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며, 경세는 수확량의 20분의 1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병제(兵制)는 병농일치의 군사제도인 부병제(府兵制)를 주장하였다. 이 외에 과거제의 폐지와 공거제(貢擧制)의 실시, 신분제 및 직업세습제의 개혁, 학제와 관료제의 개선 등 다방면에 걸쳐 국운을 걸고 과감하게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개혁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지식인들의 이상론이 되었으며 후학들의 학풍 조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실학사상을 평하여 정인보는 ‘조선 근고의 학술사를 종계하여 보면 반계가 일조(一祖)요, 성호가 이조(二祖)요, 다산이 삼조(三祖)’라고 하였다.

변산에 들어온 지 20년 되던 해인 1673년(현종 14년) 3월 19일에 그는 그의 이상을 <반계수록> 26권에 수록해 두고 뜻을 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지 1백여 년 뒤에 와서야 그의 인물됨과 <반계수록>의 내용이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의 국왕 영조는 그의 초고를 직접 읽어보고 크게 칭찬함과 동시에 인쇄하여 세상에 널리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1770년(영조 46년)에 <반계수록>이 인쇄되어 세상에 나왔으니 그가 죽은 지 97년 뒤의 일이었다. 1753년 조정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통정대부 집의 겸 세자시강원진선을 추증하였고, 1770년에는 다시 통정대부 호조참의 겸 세자시강원찬선에 추증하였다.

참고문헌/허정균의 작은 한반도(www.puan.pe.kr), ‘우반동'(전경목 박사)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