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으로 점철된 김홍원의 일생
우반동 김씨들이 현조로 손꼽는 인물 중의 한 명이 바로 김석필의 증손인 김홍원이다. 그는 약관에도 못 미치는 18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3년 후인 21세에 별시 문관 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초시에 합격한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결국 문과에 급제하지는 못했다. 그가 과거에 합격하거나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받았던 합격증서와 임명장이 현재 32장 남아 있다.
이러한 합격증서와 임명장을 통하여 볼 때, 김홍원의 관직 생활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실은 그가 벼슬생활을 통정대부로부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통정대부는 동반 정 3품 당상에 해당하는 품계이다. 김홍원과 같이 이전에 관직이나 관품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당상 품계인 통정대부를 받는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처음 관리가 되면 으레 종 9품의 품계와 관직이 주어졌으며 중견 문관 채용시험인 문과에서 장원에 급제한 경우에만 특별히 6품에 해당하는 관직이 주어졌다. 그러한 관례와 비교해 보면 비록 진사에 합격한 몸이긴 했지만, 백면서생인 김홍원에게 갑자기 정 3품 당상의 품계가 내려졌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우선 그가 이때 받았던 교지를 살펴보자.
교지
김홍원을 통정대부로 임명함
만력 26년 3월 22일
특별히 당상으로 승품 시킴
관직이나 품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김홍원이 이와 같이 단번에 통정대부를 받게 된 것은 그가 정유재란 중에 전라도 순천부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는 정유재란 당시에 곳곳에서 혁혁한 전승을 거둔 의병장이었다. 과장된 면이 없지는 않으나 당시에 그를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와 견주어 ‘영남에는 곽재우, 호남에는 김홍원’이라고까지 칭하였던 사실을 통해서도 그가 얼마나 커다란 전공을 세운 의병장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혁혁한 전승을 거둔 의병 활동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홍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잠시 거주하던 용담현의 농장을 떠나 부안의 본가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의병을 일으켜 임금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아버지마저 집상 중에 병환이 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선유사 윤승훈을 통하여 군량미만을 행재소로 보내고 자신은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였다고 한다.
그 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또 복상 기간도 끝났기 때문에 그는 곧바로 창의의 깃발을 높이 내세웠다. 그는 먼저 변산으로 피난와 있던 사람들을 설득하여 의병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이어 도내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뜻있는 사람들에게 의거에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다.
정유재란은 왜군이 임진왜란 중에 함락시키지 못한 호남을 공략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기 때문에 왜군의 주력부대가 곧바로 호남을 향하였다. 이에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한 김홍원은 당시의 전라감사인 추포 황신을 만나 적을 막고 민심을 진정시킬 방책을 건의하였다. 방책을 들은 황신은 그를 크게 신임하여 그에게 왜군을 물리치도록 장사 수십 명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방장 원신・휘하사 채춘봉과 더불어 변산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전공을 모두 채춘봉에게 돌렸으며 그 결과 채춘봉은 검모진 만호에 임명되었다.
그 후 김홍원은 충청도 직산에서 명군에게 패하여 남쪽으로 퇴각하던 왜군을 순창군에서 맞이하여 크게 패퇴시켰다. 또 왜군이 순천부의 왜교로 퇴각하자 그곳까지 따라 내려가 그들을 무찔렀다. 그런데 때마침 순천의 석보창에는 울산으로부터 퇴각한 왜군의 한 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는데 기세가 대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적진에 출입하는 백성을 시켜 적진 곳곳에 몰래 화약을 묻도록 하는 한편 포로로 잡혀있는 백성들과 내통하여 전투가 시작되면 내응하도록 하였다. 또 날랜 군사를 매복시켜 도망치는 적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며, 어선 백여 척을 동원하여 뒤에서 후원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치밀하게 작전을 짠 후 한밤중에 전투를 시작하여 적을 모두 섬멸 시켰다.
김홍원이 석보창 전투에서 이와 같이 대승을 거두자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백면서생이던 그를 단번에 통정대부로 임명하였다. 이것은 전례에 없는 특별한 대우였다. 물론 이는 그가 커다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김홍원이 이러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그의 장래가 이미 어느 정도는 보장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임금으로부터 받은 표리일습
김홍원의 관력을 살펴볼 때. 눈에 띄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가 탁월한 목민관으로 인정받아 왕으로부터 표리일습 즉, 겉옷과 속옷 한 벌을 하사받았다는 점이다. 우선 이와 관련된 유지를 살펴보자. 유지는 왕의 구두 명령을 승정원의 담당 승지가 직접 받아 적어 피명자에게 전달하도록 되어 있던 명령서이다.
지금 어사가 올린 서계를 살펴보니 그대(김홍원을 가리킴-인용자 )는 국가를 위하는 충성심이 깊고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가 뛰어나도다. (백성들에게)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하고 (침탈을 일삼는) 아전과 (얼굴을) 마주 치지 않도록 하니 (그 결과)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고 (버려 두었던) 토지가 모두 개간되었도다. (또 수령인 그대가) 자신의 사사로운 일로 백성을 부리지 않는다고 하니 (이는) 매우 가상한 일이다. 이에 (국왕인 내가) 겉옷과 속옷을 한 벌 내리노니 그대는 이것을 받을지어다.
이 유지는 선조 33년(1600) 4월에 내린 것으로 김홍원은 당시에 전라도 금산군수로 재임하고 있었다. 선조는 왜란이 종식된 후 민심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어사를 지방에 파견하여 민정을 시찰하도록 하였다. 이 때 한음 이덕형과 백사 이항복이 연이어 어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삼남 지방의 민정을 샅샅이 살피고 돌아가 왕에게 보고서 즉 서계를 올렸다. 이들은 모두 서계에서 김홍원의 치적에 대해 크게 호평을 하였다. 선조는 서계를 살펴본 후 유지를 내려 김홍원의 치적과 노고를 칭찬하고 ‘표리일습’을 내렸던 것이다. 왕이 신하에게 이와 같이 표리일습을 내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써 신하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광영이었다.
더군다나 유지의 내용을 보면, 선조는 더할 나위 없는 찬사로 김홍원의 치적을 찬양하였기 때문에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가문에서도 이를 큰 영광으로 여겼다. 백성들에게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하고 아전들이 백성을 착취하지 못하도록 하여 흩어졌던 백성들이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오고, 또 힘을 합해 산과 들을 개간하여 부지런히 농자를 짓는 모습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수령들로서는 항상 이루고 싶어하는 광경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왕으로부터 그러한 치적을 이루었다고 칭찬을 받고 여기에 더하여 표리일습까지 받게 되었으니 김홍원으로서는 그 얼마나 큰 영예이었겠는가…2부로 이어짐.
<고문서를 통해 본 우반동 김씨의 역사> 전경목 박사의 글을 전제해 올림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5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