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사람들에게 성황산 서림공원은 어머니의 품처럼이나 아늑하고 넉넉한 휴식공간이다. 그런가하면 조선조 이래 부안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적으로 배어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정서를 한층 더 풍요롭게 하여 주는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이곳 서림공원에는 부안이 낳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이매창의 시비가 두 기 세워져 있다. 한 기는 1974년 4월 27일에 매창기념사업회(회장 金泰秀)에 의하여 서림정(西林亭) 옆 금대(琴台) 아래에 세워졌는데, 이매창의 대표 시라 할 수 있는 <이화우(梨花雨) 흩날일 제>를 새겨 세운 시비이고, 또 한 기는 1997년 7월 1일에 부안군에서(군수 강수원) 세운 것으로 처음 세운 시비로부터 100m 쯤의 위쪽 등성이 마루, 옛 망해루(望海樓)가 있었던 동편의 너럭바위 옆에 세워졌다.
나중에 세운 이 이매창 시비에는 <백운사(白雲寺)>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시는 어처구니없게도 이매창의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안 향토사학자이신 김형주 선생님은 “가짜 이매창 시비”라며 안타까워 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시비에 새겨진 <백운사(白雲寺)>라는 한시는 그의 유일한 한문시집인 <매창집(梅窓集)>에 없는 시 일뿐만 아니라 그의 시라는 아무런 전거(典據)도 없고, 논증된 바도 없는 시로 작자 미상의 떠돌이 유전시(流轉詩)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여 이 시가 이매창의 시로 끼어들었고 그것도 그의 대표적인 명시(名詩)로 격상시켜 시비에까지 새겨져 버젓하게 공원에 세워질 수 있었을까. 더욱이 한 고을의 최고 행정기관에서 군민의 혈세를 드려서 세웠다는데 우리는 놀라움을 금하기 어렵다…<중략>…
지금까지 매창의 문학작품으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시조(時調)로는 규장각본(奎章閣本) <가곡원류(歌曲源流)>나 <청구영언(靑丘永言)>, <여창유취(女唱類聚)>, <대동풍아(大東風雅)> 등에 실려 있는 「이화우 흩날일 제」 한 수와 매창이 죽은 지 58년 후인 1668년 부안의 이배(吏輩, 아전)들에 의하여 개암사(開岩寺)에서 간행한 <매창집(梅窓集)>에 수록된 한시(漢詩) 57 수뿐이다. 이 <매장집(梅窓集)>에 실려 있는 한시는 모두 58수지만 이중 「윤공비(尹公碑)」라는 시는 매창의 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가 잘못 끼어들었음이 최근의 연구 결과 밝혀져 학계가 인정하고 있는 이매창의 한시는 그 한수를 제외한 57수만을 인정하고 있다.
매창의 시집 원본은 지금 세 권만이 남아 있다. 원본 외에 필사본과 이본(異本)이 수십 종이 있는데 이들 필사본 이본 등은 오류도 많고 남의 시가 잘못 끼어든 시들도 있어서 모든 연구자들은 <매창집(梅窓集)> 원본을 근거로 하여 공부와 연구를 하고 있다. 매창집 원본은 지금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있는 두 권과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 권만이 남아 있어서 매창의 시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를 참고로 할 수 밖에 없다.
매창이 죽은 58년 후인 1668년(현종 9년 무신년)에 부안의 아전들이 매창의 시들이 자꾸만 산실되는 것이 안타까워 그때까지 전해저오고 있는 그의 시들을 모아 개암사(開岩寺)에서 <매창집(梅窓集)>을 간행하였다. 그런데 당시 매창의 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 즉 교산(蛟山) 허균(許筠)의 친구 이원형(李元亨)의 작품인 <윤공비(尹公碑)>라는 시가 여기에 잘 못 끼어들었음을 3백 수년이 지난 최근에 밝혀냈다. 이 시가 매창의 시가 아니라는 것은 허균의 문집에 의하여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허미자(許米子) 교수는 1988년 그의 역저 <이매창연구(李梅窓硏究)>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자세하게 밝히고 매창의 시 57수를 해설하였으며 1986녀에 허경진교수가 펴낸 이매창의 한시 대역본(對譯本) <매창시선(梅窓詩選)>에도 매창의 시가 아닌 윤공비(尹公碑)」시는 빼버리고 57수만을 정확한 매창의 시로 인정하여 출간 하였다. 그러나 이 어디에도 매창의 시비에 새겨진 <백운사(白雲寺)> 시는 보이지 않는다.
백운사(白雲寺)라는 한시는 작자미상의 떠돌아다니는 유전시(流轉詩)다. 추측컨대 우리나라에 작자 미상의 유전의 시는 수천 수에 이를 것이며 백운사 시도 그중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1974년의 4월 매창의 시비(詩碑)를 처음 세울 때 그의 별이가(別離歌)의 절창 시조 「이화우(梨花雨) 흩날일 제」를 매창이 자주 노닐었을 서림공원 서림정(西林亭) 옆 금대(琴台) 아래에 세울 당시 시비의 양쪽 옆모서리를 이용하여 그의 대표적인 한시 「증취객(贈醉客)과 함께 「백운사(白雲寺)」시를 끼워 새겼는데 이 때도 이 시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었다. 백운사(白雲寺) 시는 우선 매창집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시일뿐만 아니라 매창의 작품이라는 확증이 없기 때문이었다. [증취객(贈醉客)」이야 <매창집>에 들어 있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기류문학(妓流文學)의 특징과 매창의 섬세하고 정(情) 많은 심정을 잘 나타낸 대표적인 작품이어서 당연하다 하겠지만 「백운사」 시는 매창의 시비 건립을 준비할 때 거기 나온 어떤 풍류객 한 분이 한시 몇 편을 줄줄이 외워대면서 이게 모두 매창의 시라 하니 몇 사람이 그 중에서 「백운사」 시가 좋다 하여 당시 이 사업을 주관한 백주(白洲) 김태수(金泰秀)씨가 그렇게 새기도록 하여 이때에도 일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74년의 봄에 김지용(金智勇) 교수가 논문 <매창(梅窓) 문학 연구>를 쓰기위하여 부안을 찾아 매창묘를 찾아보고 부풍율회(扶風律會)에 들려 당시 부안의 시율풍류객인 만함(晩含) 김학윤(金學潤). 봉초(蓬樵) 임기하(林基夏)씨 등으로부터 매창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채록하였는데 이때 매창의 시라 하여 습유(拾遺)로 몇 편을 채록한 바 있다. 그 논문에 제시되어 있는「낙엽시(落葉詩)」, 「초하음(初夏吟)」, 「주중음(舟中吟)」등의 시가 모두 그것인데 이 시들도 위의 백운사 시와 함께 매창의 작품이라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떠돌이 시여서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 두 사람의 구전일 뿐 확증 할만 한 전거가 없기 때문이다.
매창의 시가 수 백 수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되는 설일 뿐이다. 실지로 <매창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보다는 많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라도 “이것도 매창의 시다. 이것도 <매창집>에는 빠진 습유 작품”이다 한다 하여 그가 죽은 390여년이 지난 오늘에 학계의 철저한 논증도 확실한 전거(典據)의 검증도 없이 시비(詩碑)에 매창의 작품인 것으로, 그것도 대표적인 작품인양 새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후세들까지 오도하는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시급히 이 비는 개비를 하거나 아니면 철거되어야 마땅하다. 더욱이 한사람의 시비를 동일한 장소에 두 개를 세우는 일은 유례가 없는 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유명한 국민시인이라 하드래도 그의 고향이나 연고지에 만인이 즐겨 외우는 대표적인 시를 새겨 세우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지나치면 이와 같이 군더더기가 되고 욕이 된다…<하략>…”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4월 30일 17시 1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