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에 묻힌 줄포항

 

▲줄포에서 본 칠산바다

칠산바다 한자락이 곰소만을 이루며 북으로 해송이 울울창창한 변산을 이고 내륙으로 깊숙히 파고든 끝에 줄포가 있다. 줄포읍 주변의 영전리, 남포리 일대에까지 조수가 드나들었는데 저습지에 줄풀이 1~2미터 정도로 무성히 자라 '줄래', 또는 '줄래포(茁萊浦)'라 불리다가 포구를 강조하는 뜻에서 '줄포'로 굳어졌다.

배후에 고창, 무장, 흥덕, 고부, 김제, 부안 등의 고을을 끼고 있었으며, 옆으로 곰소만을 통해 칠산어장에 닿을 수 있어 줄포는 자연스럽게 도로망이 집중되고 연안항로의 중심지가 되어 이들 지역에서 나는 물산의 집산지가 되었다. 이곳을 통해 오고간 산물은 쌀, 조기, 각종 젓갈류와 옹기 등이었다. 그리하여 고려 때부터 이곳에 12창 중 하나인 안흥창이 있었으며 이를 지키는 제안포가 있었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조운(漕運)조에 '國初南道水軍十二倉.....保安曰 安興(국초에 남도의 수군에 12창을 두었다. ......보안에 있는 것을 안흥이라 하였다.)'이라 하였으며, '濟安浦前號無浦 保安郡安興倉在焉(제안포는 전에 무포라 불렀는데 보안군 안흥창에 있다.)'의 기록이 있다.

▲갯벌에 묻힌 폐선_뒤로 줄포 시가지가 보인다.

제안포는 줄포읍에서 십여리 떨어진 영전리에 있었다. 또한 고려 성종 11년에 정한 '조선수경가(漕船輸京價)'라는 것이 있는데, 멀리 떨어진 곳은 5섬을 운반해주면 1섬을 운임으로 쳐주고, 전라도 남쪽 해안에서 군산에 이르는 해역은 9섬을 운반하면 1섬을 운임으로 쳐주는 제도이다.

▲김상만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50호)_줄포리에 있으며 1895년에 건축한 초가로 안채, 곡간채, 안사랑채, 헛간채와 대장간까지 갖춘 10여 동의 건물이 있다. 총 건평은 172평이며 안채, 사랑채는 우신각 지붕이고, 곡간채는 맞배지붕이다. 지붕은 샛대로 이었다. 인촌 김성수의 양부 김기중은 줄포를 통한 미곡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이처럼 수륙 교통의 요지였던 줄포는 객주 5~6명이 머물러 상권을 지배했으며, 일제에 의해 군산항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목포, 제물포, 남포와 함께 서해 4대 항구로 인정받았다. 일제는 일찍이 이곳에 눈길을 돌려 수탈의 중심지로 삼았다. 구한말부터 이곳에 헌병대를 주둔시켜 의병의 습격으로부터 일인들을 보호하고, 미곡 무역을 통해 호남평야의 쌀을 빼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객주들은 차츰 사라지고 1910년 합병 후부터는 일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바다를 매립하고 택지를 조성하여 경찰서, 식산은행 줄포출장소, 우편국, 곡물검사소, 남선전기주식회사 줄포출장소, 소방서 등의 기관을 들여앉혔으며 항만을 축조하였다. 이는 모두 일본의 공산품을 들여오고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내가기 위한 조처였다. 성어기가 되면 어족이 다양하기로 유명한 칠산어장의 생선들이 수백척의 배에 실려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위도에서 잡은 조기는 이곳에서 염장가공되어 굴비로 만들어져 내륙으로 들어갔다.

조기잡이 철이 되면 줄포항엔 수백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었고, 집집마다 조기를 절여 말리느라 지붕까지 허옇게 뒤덮이곤 하였다. 또한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에서 잡히는 선도 높은 생선으로 담근 각종 젓갈은 줄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전성을 구가하던 줄포항은 토사가 밀려들며 선박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서 차츰 그 위치를 곰소항으로 넘겨 주게 되었다.  위도로 가던 연락선도 곰소에서 출발하게 되고 1958년도에 어업조합과 부두노조가 곰소항으로 이전하면서 활기를 잃고 말았다. 1980년 이후로는 간간히 오가던 소형 선박마저 닿지 않는 완전한 폐항이 되고 말았다.

 

이완용 휼민선정비

자를 경덕(敬德), 호를 일당(一堂)이라 한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인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우봉(牛峰) 이씨 호석(鎬奭)과 신씨(辛氏) 사이에서 태어나서 열 살 때부터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의 양자가 되었고, 1870년에 양주 조씨 병익(秉翼)의 딸과 결혼했으며, 1882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규장각 대교 검교, 홍문관 수찬, 동학교수, 우영군사마, 해방영군사마 등을 거쳐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고,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거쳐 1887년에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이 되어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 5월에 귀국하여 이조참의를 지냈다. 이 해 12월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1890년 10월에 귀국하여 우부승지, 내무참의,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육영공원 판리, 외무협판 등을 거쳐 1895년 5월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이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바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는데, 미국으로 가려다가 당분간 정세를 관망하는 사이에 아관파천(1986. 2)이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불려간 그는 재빠르게 친러파로 변신하여 여러 벼슬자리를 누리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자 그는 친러파로 몰려 한직인 평안남도 관찰사와 전라북도 관찰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는 전라북도 도백이 되어 임지에 내려와서 변산 구경을에 나섰다. 가마를 타고 고개를 넘어 내변산으로 들어갔는데 변산면 지서리에서 쌍선봉을 바라보고 내변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남여치(藍輿峙)'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1898년(무술년) 어느 가을 밤이었다. 갑자기 줄포에 큰 해일이 들이닥쳐 주민들은 가재도구를 잃고 인근 야산으로 피신하였으며, 줄포항의 배들은 지금의 십리동 마을과 장동리 원동 마을의 똥섬으로까지 밀렸다. 이 가운데에는 비단을 실은 중국 배도 있었다 한다.
이 때 도백인 이완용은 줄포에 와서 참상을 살피고 난민 구호와 언뚝거리 제방을 중수토록 하였다. 제방을 더욱 견고하게 수리되었고 이 후 일제 때 서빈들 매립공사가 이어져 오늘의 줄포 시가가 형성되었다.
이듬해 정월 부안 군수와 주민들은 이완용의 구호 사업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장승백이(현 장성동) 당산나무 아래에 세운 이 비석의 앞면은

觀察使李公完用恤民善政碑
郡守兪候鎭哲
己亥正月 日

이라 새겨 있고 뒷면은

海若不  我公巡審我候董築
民庶基兼一奚一驢民奠舊閭
軫厥凍  澤流一坊勒石銘口
惠俱損泳焉涵焉蘇陳岡專

이라고 새겨져 있다.

광복이 되자 매국노를 칭송하는 이 비석은 수난을 맞기 시작했다. 유실 위기에 처한 이 비석은 한 개인(신창근)에 의해 보관 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에 당시 줄포 면장(김병기)이 이 비석을 3,000원에 구입하여 줄포면 청사 뒷편에 세워두었다. 20여년을 면청사 뒷편에서 사람들의 눈길도 끌지 못하던 비석은 1994년에 '나라 바로 세우기 및 일제 잔재없애기 운동'의 일환으로 군의 지시에 따라 다시 철거되어 지금은 면사무소 지하 어느 창고에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