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소만의 조기잡이

▲곰소굴비_나일론 끈에 묶었다. 짚으로 묶어야 제격일 것이다.

천혜의 입지조건

칠산바다 한 자락이 변산과 선운산 사이를 뚫고 내륙으로 쑥 들어와 크게 만을 이룬 것이 곰소만이다. 이곳은 천혜의 입지조건이 만든 우리나라 최대의 조기잡이 어장이었다. 이곳에서 잡힌 조기는 연평도에 비해 시장조건이 불리하여 대부분 염장가공되어 굴비라는 이름으로 줄포, 법성포 등지를 통하여 내륙으로 들어가 널리 판매되었으며 영광굴비라는 명성을 얻었다. 곰소만을 중심으로 조기잡이와 굴비 가공업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4월 중순에서 5월 상순까지 이곳의 수온은 11-14도로 조기산란의 최적온도여서 산란을 위해 3, 4월에 흑산도를 거쳐 조기떼가 이곳으로 회유해 들어왔다. 칠산 어장의 넓은 갯벌은 이들에게 풍부한 먹이를 대어 주었다. 이들 밀려드는 조기떼를 대량으로 포획하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곰소염전(왼쪽) 노래재에서 바라본 썰물때의 곰소만_갯골이 모습을 드러냈고 곰소항과 곰소염전이 보인다.(오른쪽)

우선 어살, 주목망 등 정치성 어구를 설치하는 데에 다량의 대나무가 필요하였다. 변산 인근의 대나무와 싸리나무는 어살 등의 어구를 제작하는 데 충분한 원료를 대어주었다. 또한 옛날에는 냉동시설이 없었으므로 잡은 고기를 바로 절여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하였으며 소금을 구우려면 소나무 장작이 필요하였다. 변산의 소나무는 이에 필요한 장작을 대어주었다.
서해안의 여느 갯벌과는 달리 곰소만에는 갯골이 발달해 있어 썰물 때에도 배가 다닐 수 있었는데 이 또한 조기잡이에 유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 갯골을 따라 포구가 발달하였다. 이처럼 곰소만은 일시적으로 밀려오는 조기떼를 짧은 기간 동안에 잡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조기의 여러 친척들

동해에서 잡힌 명태가 고삿상의 필수품이라면 조기는 제삿상에 없어서는 안될 생선이다. 오늘날에도 명절 때면 젯상에 올릴 참조기를 구입하기 위해 사람들은 거금을 아까와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조기를 식별해낸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슷한 종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자어로 석수어(石首魚)로 통칭하던 조기를 자산 정약전은 그의 저서 <자산어보>에서 크기에 따라 보구치(백조기), 조기, 반애(盤厓), 황석어(黃石魚)의 네 등급으로 나눈 바 있다. 석수어란 이름은 조기의 머리에 뼈가 변해서 된 돌과 같은 것이 들어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을 마찰시켜 울음 소리를 낸다. 농어목 민어과에 속하는 조기류를 어류학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쪾수조기(꽃조기, 조구:大黃魚, 大鮮) 쪾황조기(참조기, 노랑조기, 기름조기, 황조구:小黃魚, 小魚, 花魚) 쪾보굴치(보졸치, 보구치, 흰조기:白石首魚) 그러나 서해 도서 지역에서는 참조기를 중심으로 그 아류로 부세, 백조기, 반어, 황새기, 강다리(깡치) 등으로 구별한다. 맛에 있어서는 부세가 참조기 다음이며 모양도 참조기와 유사하여 일반인들이 분별하기에 매우 어렵다.
부세는 몸에서 황금빛이 돌지 않고 등이 검다. 반어는 몸매가 날씬하고 머리도 옆으로 납작하며, 비늘이 뻣뻣하다. 몸은 전체적으로 흰빛이며 비늘 끝에 검은 점이 박혀 있어 검은 점의 무늬가 온몸에 퍼져 있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다. 백조기는 색깔 자체가 하얗고 머리와 몸이 약간 납작하며 체형이 긴 타원형으로 쉽게 구별을 할 수 있다. 아가미 뚜껑에는 검은 점이 있고, 모든 지느러미는 흰색으로 거의 투명하다. 황새기와 강다리는 크기가 작다. 강다리도 머리가 몸체보다 더 크지만 황새기는 더 크다. 주로 젓갈로 많이 쓰인다. 노랑조기, 황금조구 등으로 불리는 참조기는 몸 빛깔이 황금빛을 띤 회색이고, 입술은 홍색이다. 육질이 향긋하고 쫄깃쫄깃하여 그 맛이 일품이다. 황금빛 비늘로 갈아입고 산란을 위해 수억 마리씩 떼를 지어 칠산어장으로 회유해 들어왔던 황금조기가 바로 참조기이다.

어전어업

▲어살도(정조 때 김홍도의 그림):1960년대에 와서 나일론 망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대나무나 싸리나무로 만든 어살이 대량의 조기를 잡는 데 있어서 가장 유효한 수단이었다. 원시적인 방법이라 어획량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지만 '좋은 어살 자리는 못자리하고도 안바꾼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고려와 조선을 통해 권문세가들은 어살을 요즘 재벌들이 땅투기하듯 장악하였으며,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세원이었기에 궁궐에서 직접 경영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일론 그물이 나오기 이전의 옛날에는 그물을 이용하여 짧은 기간 동안에 대량으로 고기떼를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곰소만에서는 일찍부터 대나무, 싸리나무 등을 엮은 어살이라는 일종의 정치망을 갯벌에 설치하여 밀물을 따라 밀려온 고기떼가 썰물을 따라 나가면서 걸리도록 하여 고기를 잡았다. 이러한 형태의 어업을 어전어업이라 하는데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전국에 설치된 어전(漁箭) 중에서 이곳의 어전이 가장 컸으며 해세(海稅)의 납입도 가장 많았다. 따라서 곰소만이 전국 어전어업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해변에서 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는독살(石箭)이 있었다. 이는 밀물이 들어왔다 썰물이 빠져나가는 곳에 돌을 두세 자 높이로 쌓아두고 고기를 잡는 가장 원시적인 고기잡이 방법이다. 지금도 변산면 마포리 일대의 해안에서 독살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마을에 사는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살에 조기떼가 가득 찬 적이 더러 있었다는 것이다.
어살은 겨울 동안 제작하여 2월경에 갯벌에 설치, 3~5월의 봄조기잡이를 하였으며, 여름에 제작하여 9-10월의 가을조기잡이를 하였다. 어살 제작용 대나무는 멀리 장성, 담양 등지에서 조달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위해 장성, 담양 등지의 집안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이 지방에는 장성댁, 담양댁 등의 댁호를 쓰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어전어업은 조선말기에 이르러 어족자원이 차츰 줄어들면서 갯골 중앙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갯골 중앙에 주목망을 설치하고 꽁댕이배라는 작은 무동력선을 이용하는 형태로 발전하다가 중선망 어업에 밀리기 시작했다. 망어업은 처음에는 면망에 송진이나 감물을 들여 사용하다 나일론망이 등장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망어업이 보편화되자 어전어업은 차츰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왕도, 대항리 등지의 해안에서는 나일론망을 이용한 어살을 볼 수 있다.

▲대항리 어살
▲어살에 갇힌 고기를 꺼내고 있다.
▲어살에 걸린 고기
▲변산면 격포리 궁항 해안에 있는 독살의 흔적. 해안에 돌이 있는 곳에는 독살이 있었다.

 

조기의 가공

▲조기 가공에 사용되었던 초대형 항아리

곰소만 일대에서 잡은 조기는 냉동시설이이나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선어(鮮魚)로 소비지까지 운반될 수 없었기 때문에 굴비라는 이름으로 염장가공되어 내륙으로 운반되었다.
굴비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정주(靜州:지금의 영광군)땅은 법성포 모래벌판과, 그 강산의 수려함으로 예로부터 소동정호(小洞庭湖)라 불리었다. 이곳에서 고려 시대에 이자겸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이른 봄부터 이곳 저곳의 포구에서 어선들이 줄을 지어 돛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정주땅에서는 이른 봄부터 조기잡이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칠산바다에서 조기는 너무 많이 잡혀서 처치 곤란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남은 고기를 아무렇게나 소금에 간했다가 모래바닥이나 바위에 널어 물기를 뺀 후 말려놓았다. 그리고 갈무리해두었다가 1년 내내 먹었는데 그 맛이 아주 좋았다. 이자겸은 이런 좋은 맛을 왜 여태 모르고 개경에서 아웅다웅하며 살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석수어라 해서 진공해온 것을 먹어보긴 했으나 소금에 절여 말린 것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자겸은 한 생각을 떠올렸다. '정주굴비(靜州屈非)' 이 네 글자를 건석수어에 써서 임금에게 진상했다. 정쟁에 밀려 비록 이곳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결코 굴하거나 꺾이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담아 보냈던 것이다. 이를 맛본 임금 인종은 '이것이 정주 굴비인가' 했을 뿐이었다.
이자겸의 '정주굴비'의 뜻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인종은 정주굴비를 해마다 보내라고 진상품목에 추가시켰다. 이후 정주는 지명이 영광으로 바뀌고 영광굴비는 멀리 원나라에까지 진상되어 왕후장상들의 입맛없는 한여름의 반찬으로 빠지지 않았다 한다.
굴비는 민족의 지혜가 담긴 우리 고유의 생선 가공품이다. 그 방법에는 염수법과 살염법이 있다. 염수법은 조기를 포화식염수에 7-10일간 담가 염분이 충분히 배어들게 한 다음 건져내어 말리는 방법이다. 소금물에 담겨있는 동안 공기와 닿지 않기 때문에 산패(酸敗)를 막을 수 있고 색깔도 좋은 잇점이 있지만 소금의 소비가 많으며 큰 항아리 등이 필요하다.

살염법은 조기에 소금을 직접 뿌려 1개월 정도 용기에 담아두는 방법이다. 소금에 절일 때 공기에 닿아 품질에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소금이 크게 절약되고 건조시간을 단축시켜 대량의 조기를 단시간에 처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굴비생산이 가능했던 데에는 무엇보다도 곰소만 일대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전오염(煎熬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칠산어장에서는 조기가 거의 잡히지 않는다. 동지나해상에서 잡은 조기가 4-5월경 줄포나 곰소 등지에 반입되어 가공 판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