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어장의 중심 위도

위도면은 부안읍에서 서쪽으로 50여km 떨어진 섬으로 격포에서 하루 2회 정기 여객선이 다니는데 50여분 걸린다. 섬의 형태가 고슴도치 모양이어서 위도(蝟島)라 한다.
위도는 본도 외에 식도(食島), 거륜도(車輪島), 정금도(井金島), 상왕등도(上旺登島), 하왕등도(下旺登島) 등의 유인도와 임수도(臨水島)와 형제도(兄弟島) 등의 크고 작은 무인도를 합쳐 30여개의 섬으로 되어 있으며 30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고려조 이래 위도는 부안군에 속하였었으나 1896년에 전라도를 전라남북도로 나눌 당시 고군산군도와 함께 전남 지도(智島)군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고군산군도는 옥구군으로, 위도는 전라남도 영광군으로 속하게 되었다. 그 후 1963년 1월 1일 시행한 행정구역 개편에서 전라북도의 금산군이 충청남도로 편입되고 위도는 다시 부안군으로 편입되었다.

파시(派市)

칠산어장의 중심에 놓여 있는 위도 근해에서는 조기를 비롯하여 홍어, 병어, 회문어, 전어, 가오리, 갯장어, 삼치, 박대, 서대, 장대, 새우, 등뼈가 있는 오징어, 갈치 등 각종 생선이 잡히고 대구와 청어도 잡힌다. 동해안의 청어는 등뼈가 77개이고 이곳의 청어는 등뼈가 53개인데 이는 경상도는 77골이고 전라도는 53고을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칠산어장에서는 각종 어류가 많이 잡혀 동해안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고깃배가 와서 조업을 했었다고 하며, 치도리에는 일본인 어부를 위한 유곽까지 들어서기도 했다.

▲위도 파장금항

특히 조기가 많이 잡히는 3월에서 6월까지 파시가 들어서면 파장금 맞은 편에 있는 식도에까지 칠팔백 척의 고깃 배가 빽빽히 들어서 닻을 내려 밤이 되면 일대가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들이 잡는 조기의 양은 배 한척당 평균 50~60동이었다. 1동은1000마리이니 대략 이곳에서만 4천만 마리의 조기가 잡혔던 셈이다. 파장금항에서는 고기를 매매하는 시장이 섰다. 위도의 파시는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서해의 3대 파시 중의 하나이다. 파시가 들어서면 석유, 장작, 발동기, 각종 어구, 식량, 부식물, 각종 잡화 등을 파는 상인들이 들어오고 요리집, 다방, 여관, 선술집, 이발관, 미용실, 도박장, 떡집 등이 빈터만 있으면 들어서 이십여 호 남짓하던 파장금 마을은 수백 가호가 들어서 수만명이 북적거리는 중도시로 변했다.

이곳에서 잡힌 조기는 대부분 영광군 법성포나 줄포를 통해 굴비로 가공되어 내륙으로 들어갔는데 영광굴비의 명성은 여기서 나왔다.
나일론망이 등장하며 이처럼 대량으로 조기를 포획하자 어족자원이 차츰 줄어들게 되고 선박기술과 어로기술이 차츰 발달되어 어로작업은 차츰 먼 바다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칠산바다로 산란을 위해 회유해 들어오는 조기떼는 거의 사라졌다. 위도의 파시는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들의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형제섬의 전설

위도 대리 마을에는 쌍둥이가 끊이지 않고 태어났는데 쌍둥이를 낳으면 반드시 한 아이는 바다에 버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씨부인은 쌍둥이를 낳고도 한 아이를 버리지 않고 몰래 숨겨두고 키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꿈속에 허연 신령님이 나타나 "너의 아이 둘을 다 데려다가 저 동쪽 바다에 섬 두 개를 만들어 뱃길을 인도하는 표적으로 삼을 것이로다" 하고 사라졌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보니 양 옆에서 자던 아이들은 간 곳이 없고 희미하게 먼동이 터오는 동쪽에 섬 두개가 형제처럼 서 있었다. 동생섬은 공군기 사격장으로 사용되어 절반쯤 닳아 없어지고 말았다.

▲격포해수욕장에서 본 형제섬 일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