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띠배 깨끗해진 마을
매해 정월 초사흗날 위도면 대리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빌고 그해의 풍어를 기원하는 마을 공동제의를 연다. 이 중에서 띠배굿은 1978년 10월 강원도 춘천에서 열린 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뒤 1985년에 무형문화재 '제82-다'호로 지정되었다. 동제는 원당제, 주산돌기, 용왕제에 이어 띠배에 액 띄워 보내기 순으로 진행되는데 육지에서 정초에 지내는 당산제와 성격이 같으며, 띠배에 액 띄워보내기는 서남 해안 지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섣달이 되면 대리 사람들은 동네 어귀에 왼새끼에 백지 조각을 낀 인줄을 치고 동네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당집 주위도 깨끗히 청소하고 금줄을 쳐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는 산막으로 옮겨 가도록 했다고 한다. 이렇게 동네를 깨끗히 한 다음 정월 초사흗날 원당굿을 지내는데 원당은 마을 동쪽 높은 언덕에 있다. 당집 안에는 산신상, 원당마누라상, 본당마누라상, 옥적부인상, 애기씨상, 수문장장, 장군서낭상 등의 마을과 바다를 수호하는 7위의 신상이 모셔져 있다. 초사흗날 이른 아침 기잡이를 선두로 무당, 화주, 화장, 선주 등이 흥겨운 농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원당에 오른다. 회식밥, 쌀 두 말, 콩 한 말, 돼지머리, 술, 과일, 포 등의 제물을 진설하고 무당이 축수를 한다. 이 때 마을 사람들은 엎디어 절을 하며 저마다의 소원을 빈다. 무당의 축수가 끝나면 산신상 앞에서 당굿이 시작된다.
굿이 끝나면 제물을 당 앞으로 내다놓고 음복을 하는데 이 때 무당은 선주들에게 산(算)쌀을 집어주어 짝수가 되면 그해 무사안녕하고 고기를 많이 잡는다는 '산점'을 친다. 이 때 선주들은 성의껏 금전을 젯상 위에 놓아 준다. 원당굿이 끝나면 그 해에 배에 모실 신을 지정하는 깃굿을 하고 농악을 치며 내려온다. 오는 도중에 바다로 돌출한 용바위에 올라 제수로 쓴 음식을 바다에 던져 바다에서 죽은 무주고혼들에게 풀어 먹인다.
이어서 마을 앞 당산나무 아래에 모여 주산돌기를 시작한다. 이는 일종의 지신밟기의 성격인데 마을 사람들이 동아줄을 어깨에 메고 농악에 맞추어 에해용 소리를 부르며 마을을 돈다.
달도 밝다 달도 밝어 정월 대보름 달도 밝어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노다가자 노다가자 달밝은 밤에 노다를 가자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놀아보자 놀아보자 에해용 줄메고 놀아보자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돌아보세 돌아보세 대장주산을 돌아보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빌어보세 빌어보세 용왕님 전에 빌어보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잡어보세 잡어보세 칠산바다 청어잡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청어를 잡세 청어를 잡세 대장앞도 청어잡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청어엮세 청어엮세 위도군산 청어엮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청어풀세 청어풀세 위도군산 청어풀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잡어보세 잡어보세 대장앞도 조구잡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황금같은 내조구야 니가 나를 찾어왔냐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갈치잡세 갈치를 잡세 대장앞도 갈치잡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백파창랑 푸른 물결 물결따라 니가 왔냐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병치를 잡세 멸치를 잡세 잡어각색을 잡어보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돈실러 가세 돈실러 가세 사진 줄포로 돈실러가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돈실러 가세 돈실러 가세 영광 법성포 돈실러 가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놀아보세 놀아보세 춤을 추고 놀아보세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에 희망도 많다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이별없이 나는 간다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에해용
주산돌기에 이어 오후 2시쯤 만조가 되면 마을 앞 백사장에서 용왕제를 지낸다. 용왕제는 무당이 "바다를 향해 제배" 하면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바다를 향해 절을 하면서 시작된다. 이어 무당의 춤과 사설이 계속되며 여인들은 용왕님에게 먹일 회식밥을 내오고 남자들은 띠배를 메고 나온다. 회식밥은 제수로 쓰인 음식들을 거두어 모아 물을 부어 만든 물밥이다. 마을 사람들은 농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띠배를 돌며 가래로 회식밥을 퍼서 띠배에 담는다. 이 때 어낭창 가래질 소리를 한다.
(메김소리) 어낭창 가래야
(받음소리) 어낭창 가래야
(메김소리) 이 가래가 뉘가랜가
(받음소리) 어낭창 가래야
정도사네 가래라네
어낭창 가래야
이 가래가 뉘 가랜가
어낭창 가래야
박첨지네 가래라네
어낭창 가래야
황금같은 내 조구야
어낭창 가래야
어디 갔다 인자 왔냐
어낭창 가래야
만경창파 너른 바다
어낭창 가래야
어느 구석에 숨었다가
어낭창 가래야
니가 나를 찾아왔냐
어낭창 가래야
벽파창랑 푸른 물결
어낭창 가래야
봄을 따라 이제 왔냐
어낭창 가래야
처음에는 진양조의 느린소리로 시작하다가 차츰 자진모리로 농악의 장단이 빨라지면서 매김소리와 받음소리가 흥겹게 이어진다.
조기 갈치 민어 하면
어낭창 가래야
병치 준어 삼치로다
어낭창 가래야
잡어각색 많은 곳에
어낭창 가래야
거망득어 하여보세
어낭창 가래야
어낭창 가래야 어낭청 가래야
어낭창 가래야
가래질 소리란 만선을 이룬 배가 육지에 있는 그릇에 고기를 퍼담을 때 가래를 이용해 퍼서 담게 되는데 이 때 부르는 노동요이다. 가래질 소리가 계속되며 회식밥이 띠배에 퍼서 담겨지는 동안 부녀자들은 무당과 함께 몇 번이고 절을 하며 한 해의 재수를 빈다.
회식밥을 다 퍼담으면 농악소리가 더 요란하게 울리며 마을 사람들은 '술배소리'와 '배치기소리'를 한다. 이는 만선이 되어 돌아올 때 배를 저어가면서 즉흥적으로 느끼는 것을 엮어서 부르는 흥겨운 노래다. 배치기 소리가 장단이 더 빠르며 더 흥겹다.
어하 술배야
어하 술배야
흔헌씨가 배를 모아
어하 술배야
이제불통 하신 후에
어하 술배야
우리들이 본을 받어
어하 술배야
배타기를 시작했네
어하 술배야
구곡간장 안하련은
어하 술배야
회암선생 도통귀라
어하 술배야
우리들이 본을 받어
어하 술배야
구곡도가로 고기잡세
어하 술배야
우리배 뱀재님 재수좋아
어하 술배야
오천칠백냥 단물에 벌었네
어하 술배야
뱀재네 마누라 술동이 이고
어하 술배야
발판머리서 춤을 추네
어하 술배야
어적수성 명월야에
어하 술배야
법성포로 내려간다
어하 술배야
경상도는 북어배
어하 술배야
강화 원산 홍어배
어하 술배야
이배 저배 각처 배
어하 술배야
선주 모양이 능난허네
어하 술배야
어하 술배야 어하 술배야 어하 술배야
-술배소리-
닻케라(예) 노저라(예) 돛 달어라(예)
돈벌러 가세 돈벌러 가세 칠산바다로 돈벌러 가세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칠산바다 들어오는 조구 우리배 마장에 다 떠 실었단다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우리 배 사공님 신수 좋아 오만 칠천냥 단물에 벌었네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뱀재네 마누라 술동이 이고 발판머리서 춤을 춘다네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오동추야 달밝은 밤에 정든님 생각이 절로나 나네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노자노자 젊어노자 늙고 병들면 못노나니 그드럼거리고 놀아나 보자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어기여차 닻둘러 매고 연평바다로 돈실러 가자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오동추야 달밝은 밤에 아남팟 네물에 불꼬리 떴다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칠산바다는 잔조기요 연평바다는 큰조기란다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구월산에 둘러싼 조기 서울 장안에 금빛이란다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연평바다 갈린 조기 우리배 사공님 애태운다네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세월아 봄철아 가지를 마라 아까운 청춘이 다 늙는다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청춘은 가고 늙어만지니 이내 백발이 무정하고나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잘허는 동무는 상금 주고 못허는 동무는 벌을 준다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입하 소만에 날 못잡고 날쌘 사공아 내꼬리 잡어라
에해해해해야 애해해해해야
-배치기 소리-
술배소리와 배치기 소리가 끝나면 농악과 춤이 계속되면서 띠배를 물에 띄워 모선에 연결시킨다. 띠배는 길이 2미터, 폭 1미터 정도의 판자 위에 짚과 띠풀을 둘러 엮어 만든 모형배이다. 배 안에는 긴 백지 위에 동방청제축액대장군(東方靑帝逐厄大將軍), 서방백제축액대장군, 남방적제축액대장군, 북방흑제축액대장군, 중앙황제축액대장군의 오방신장에 맞춰 쓴 액을 쫓는 깃대를 세우고, 동네 우물가나 당산나무 아래 그리고 동네의 터가 센 곳에 액을 몰아가라고 세워 두었던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거두어 싣는다.
농악과 선주기가 모선에 오르면 배치기소리를 더욱 우렁차게 부르면서 용왕님이 먹을 회식밥과 묵은 해의 재액인 허수아비를 가득 실은 띠배는 모선에 이끌려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간다. 농악소리도 점점 멀어진다. 재액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고 전송하는 환호성도 점점 잦아든다.
심청이 몸을 던진 임수도
격포항에서 출발하여 위도 파장금항을 향해 30여분 가면 임수도를 지나게 된다. 이곳은 지난 93년 서해훼리호 사고로 2백92명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곳 임수도가 효녀 심청이가 몸을 던져 죽은 인당수라는 주장이 있다.
연세대학교 국악 연구실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은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아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꽃다운 나이 16세에 만경 창파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지금부터 3백여년 전 전남 곡성군 옥과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이며, 인당수는 위도면 임수도 부근 해역이라는 것이다.
연세대학교 국악 연구실 책임 연구원 양권승씨에 따르면 <고려사>와 <고려도경> 등 여러 문헌을 볼 때 이곳은 한반도와 중국 절강성과 복건성을 오가던 조공선과 교역선이 주로 이용했던 해로의 요충지로 심청전의 원형인 <관음사 사적기>의 분석 결과 공양미 3백석에 남경상인에 팔고 옥과를 떠난 심청은 섬진강을 따라 승주 낙안포에 이른 후 남해의 금일도에서 대형상선으로 갈아탄 다음부안의 소래포(현 내소사 앞포구)를 거쳐 위도 부근의 임수도 해역에 몸을 던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한편 임수도는 변산도 격포와 위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무인도로 원래는 인수도라고 불렀으며 촌로들의 구전에 의하면 육지에서 떠난 배가 남중국으로 향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야 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또한 이곳은 워낙 물살이 거센데다 안개가 자주 덮혀 있어 해난사고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해역이 물살이 거센 이유는 바로 수면 아래 암초가 있기 때문이다. 파도가 밀려오다 해저에서 급경사를 만나면 갑자기 파고가 높아지는데 격포에서 위도 사이는 해저가 암반으로 되어 있고 곳곳에 암초가 솟아있다. 제주도 남쪽 이어도와 비슷한 해저 지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