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바다 수호신
서해상으로 깊숙히 돌출되어 있는 이곳 변산반도 서쪽 맨 끝 지점(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해안가 높은 절벽 위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58호인 수성당이 있다. 이 당집은 서해를 지키는 여해신(女海神)인 개양할미(수성할미라고도 함)를 모신 곳이다. 개양할미를 서해를 관장하는 성인(聖人)으로 여겨, 수성(水聖)을 모신 당집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설에 의하면 개양할미는 키가 매우 커서 굽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걸어 다니면서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어부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언제부터 이 당집이 있어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전의 건물 상량에 "道光 三拾年 庚戊 四月二十八日 午時 二次上樑"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850년 훨씬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량의 기록으로 보아1804년 훨씬 이전부터 당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1864년에 3차로 중수하였으며 지금의 당집은 1996년 4월에 다시 지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개양할미'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는데 이것마저 없어져 아쉬움을 더한다. 당집 바로 옆은 원통 모양으로 파낸 듯한 두 벼랑이 맞보고 있다. 밀물이 파도와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 안으로 휘들이칠 때 수십길 되는 벼랑 위에서 이를 내려다 보면 한여름에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곳이다. 이곳을 여울굴이라 한다.
이 여울굴 안에서 개양할미가 나왔는데, 딸 여덟을 낳아 일곱은 각 도에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았다. 개양할미는 키가 워낙 커서 서해바다를 걸어다녀도 버선목까지 밖에 물이 차지 않았다 한다. 다만 곰소(熊淵) '게란여'란 곳이 하도 깊어 치맛자락을 조금 적셨다 한다. 그래서 개양할미는 치맛자락에 바위를 담아 날라다 곰소 게란여를 메웠다고 한다. 이 개양할미는 서해바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수심을 재고 길을 잃은 고깃배들을 인도하여 이곳 어민들 로부터 수호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도 대막골에서는 정월 보름이면 개양할미를 모시는 동제를 지내고 있다.
대마골의 철마
여울굴에는 수성할미의 전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대막골에 어느 형제가 눈먼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형은 날마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오고, 동생은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면서 지성으로 어머니를 돌보며 의좋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로 나간 형이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바닷가에 나가 밤새도록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동생은 형을 찾아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생마저 소식이 없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앞 못보는 어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두 아들을 향해 더듬거리며 바닷가쪽으로 나간 곳이 여울굴의 벼랑 위였다. 이곳에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두 아들의 이름을 외쳤으나 여울굴을 휘돌아오는 메아리 뿐이었다. 메아리 소리를 아들이 대답하는 소리로 착각한 어머니는 바닷가쪽으로 걸음을 한발짝씩 떼어놓다가 여울굴 깊은 물에 빠져 영영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로 몇 달이 지난 날씨가 좋은 어느 날, 순풍에 흰 돛을 단 배 한 척이 이곳에 닿았는데 그 배에는 건장한 두 청년이 얼굴이 고운 두 색시와 함께 타고 있었다. 배에서 두 청년이 내리는데 몇 달 전에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던 두 형제가 아닌가. 두 형제가 배에서 내려 여울굴 벼랑 위에 서자 물이 차 오르는 여울굴 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분이 나와 두 청년 앞에 나타났다. 형제는 노인에게 큰 절을 올렸다. 노인은 먼 외딴 섬에서 그동안 두 형제를 가르친 스승이었던 것이다. "자, 이제 너희에게 황금 부채 한 개씩을 줄터이니 한 개를 가지고는 나라를 구하고 또 한 개로는 마을을 평안히 하도록 하여라. 너희 모친은 편안한 곳에 잘 모셨으니 염려말고 선행을 베풀도록 하여라" 라고 말을 마치자 노인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노인이 사라진 곳을 향해 절을 올리고 난 뒤 형은 황금부채를 부쳐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며 성난 파도가 일었다. 이번에는 동생이 가진 부채로 부치자 풍랑이 금새 잠잠해졌다. 두 형제는 그 곳에 수성당을 짓고 노인의 은덕을 기렸다. 그러자 여울굴 안에서 철마 한 마리가 나왔다. 이 철마는 평상시에는 작았으나 형제가 타기만 하면 큰 말이 되어 왜구가 나타나면 형이 타고 비호처럼 달려가 황금 부채로 풍랑을 일으켜 적의 배를 모조리 부셔버렸으며, 마을 사람들이 고기잡이 하러 나간 뒤 풍랑이 일면 동생이 타고 나가 황금 부채를 부쳐 많은 사람을 구했다.
형제가 죽은 후 이 철마는 여울굴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어머니와 아들 형제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정월이면 뱃길의 무사함과 풍어를 비는 동제를 오늘까지 지내오고 있다.
이 전설은 해적과 풍랑에 시달리던 이 지방 어민들의 염원을 잘 말해주고 있다. 93년 10월 10일 바로 이 앞 바다에서 서해훼리호가 위도 파장금항을 떠나 경포항으로 가던 중 임수도 부근에서 거친 풍랑에 휘말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혹시 서해바다의 수호신인 수성할미를 잘 모시지 않아 이런 참사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죽막동제사유적
부안죽막동제사유적은 바로 수성당 옆에 있다. 1992년 전주박물관에서 수성당 주변을 발굴하여 이곳이 선사시대 이래로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제사유물들이 약 30cm 두께로 평탄면에 쌓여 있었다.
다음은 전주박물관이 죽막동제사유적을 소개한 내용이다. "출토된 토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은 절벽 위의 평탄면, 즉 수성당 뒷편의 8× 9m2 범위에 20∼30cm의 두께로 쌓여 있었다. 유물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은 삼국시대의 일부 유물에 한정되어 있고 나머지는 교란상태로 출토되었다. 먼저 삼국시대 유물로는 각종 항아리, 그릇받침, 독 등의 토기류와 쇠창, 쇠살촉, 안장틀, 말띠두르개, 청동방울, 청동거울 등의 금속유물, 도끼, 거울, 손칼, 갑옷등의 실물을 모조한 석제, 토제모조품이 있다. 그 외에도 구슬류, 중국제 도자기가 소량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금속유물은 큰 독의 내부에 넣어져 있는 상태로 출토되었고, 석제 모조품은 좁은 범위에 쌓여 있었다. 그 외의 유물들은 개체별로 좁은 범위 내에서 모여진 상태로 출토되었으나 토제 말, 중국제 청자, 구슬등은 정형성이 없이 흩어져 있었다.
통일신라 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토기, 기와, 백자가 여러 군데 흩어져 있었는데, 이미 교란된 것이었다. 토기들은 주로 단지, 접시, 병이고, 자기류는 접시, 잔, 합, 병과 말모양 자기등이며, 기와류는 막새는 하나도 없이 모두 평기와 뿐이었다. " 지리적으로 봤을 때, 이곳 수성당이 위치한 지점은 선사시대 이래로 중국이나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던 해로상의 중요지점이었다.
항해술이 발달되지 못했던 6∼7세기 이전, 배들은 연안을 따라 섬이나 육지의 주요부분을 추적하면서 항해했을 것이고, 따라서 특이한 형상으로 돌출되어 있는 이곳을 항해상의 주요한 표시지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곳은 삼국시대가 되면 초기백제의 근거지인 한강하류유역으로 북상하는 기점이 되고, 5세기 후반에 백제가 남천한 후에는 웅진과 사비로 들어가는 금강 입구를 감시하기에 용이한 지점이라 여겨진다. 또한 이곳의 해양 환경을 살펴보면 연안 반류(沿岸反流)가 흐르고, 조류가 심한데다 주변에 섬들이 많아 물의 흐름이 복잡하며 바람도 강해서 예로부터 조난의 위험이 컷던 곳이다.
이렇듯 죽막동제사유적은 지리적 위치, 해양환경, 유물의 출토상태를 고려할 때 항해나 어업활동과 관련된 제사유적으로 보는 것이다. 해안가 절벽 위을 선택하여 제사를 지낸 것은 그 대상이 해신(海神)이며, 출토된 유물 중국제 도자기가 출토된 것은 고대에도 이곳 격포는 중국 산동반도에서 황해도, 경기만을 거쳐 서남 해안을 따라 남해, 일본으로 이어지는 연안 항로의 중간 기항지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나 일본으로 항해하는 선박들과 어업활동을 하는 많은 고기잡이 배들은 무사 항해와 안전을 위해 변산반도에서도 바다 가운데로 쑥 들어간 이 지점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