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소젓갈
곰소에는 원래 범섬, 곰섬, 까치섬 등의 무인도가 있었다. 곰섬 앞에는 큰 못이 있었는데 명주실꾸리 하나가 다 풀어져 들어갈 만큼 깊었다 한다. '곰소 둠벙 속 같다'는 이 지방 속담도 있다. 그래서 곰섬을 '웅연도'라 하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도 '昑毛浦 在扶安懸南熊淵(금모포는 부안현 웅연 남쪽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곰소로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熊淵釣臺(웅연조대)'는 변산팔경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줄포항을 통하여 물자를 수탈해가던 일제는 줄포항이 차츰 뻘로 메워져 큰 배가 드나들기 어렵게 되자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위의 세 섬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아 육지로 연결한 다음 항만을 축조하였다. 그리하여 줄포항을 대신하여 물자를 반출해가는 한편 칠산어장의 어업전진기지로 삼았다.
제방 안쪽으로 염전을 만들고 제빙공장도 세웠다. 200여톤 급의 배가 드나들게 되고 1958년에는 어업조합과 부두노조가 줄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줄포항은 폐항이 되다시피 했지만 곰소항은 군산에 이어 전라북도에서 두번째로 큰 항구로 떠올라 전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연근해의 어족이 줄어들고 곰소만의 수심이 낮아지면서 곰소항도 줄포항과 비슷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1987년 1종항으로 승격된 격포항으로 주요 시설들이 옮겨갔다. 특히 하루 두 차례씩 위도를 오가던 정기여객선마저 1989년부터 격포항으로 옮겨가면서부터 곰소항은 활기를 잃기 시작했다. 이제 곰소항은 곰소염전과 젓갈로서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곰소항 어귀에 들어서면 곰삭은 젓갈냄새가 후각을 사로잡는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젓갈은 멸치액젓을 비롯해 새우젓, 바지락젓, 황석어젓, 갈치속젓, 조기젓, 멸치젓, 고노리젓, 밴댕이젓, 잡젓 등 20여종인데 젓갈만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가게가 20여 곳이 넘는다. 3천여드럼의 멸치 액젓을 숙성시킬 수 있는 지하탱크를 갖춘 업소도 있다. 10여년 전만 해도 젓갈가공업은 부업형태에 머물렀었지만 이제는 연간 판매액이 70억원에 달해 이곳 어민들의 주소득원으로 되었다. 물량의 대부분은 곰소젓갈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팔린다. 1992년부터 변산반도 일주 해안관광도로가 개통되어 관광객들의 발길도 잦아지게 되었다.
곰소젓갈이 미각을 사로잡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곰소만은 주변의 육지가 300여 미터의 산지로 되어있고 큰 강물이 유입되지 않으며 인근에 공장이 없어 갯벌이 아주 깨끗한 편이다. 이곳에 바지락, 해방조개, 백합, 죽합등의 조개가 묻혀있고 운저리, 쇠빙어, 오징어, 꼴뚜기, 낙지, 쭈꾸미, 전어, 갈치, 밴댕이, 새우, 숭어, 도다리 등은 굳이 배를 타고 나가지 않아도 잡을 수 있다. 이곳에서 잡히는 이들 각종 잡어들은 대부분 곰소항으로 들여와 바로 소금에 절여져 젓갈로 가공되는데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에서 잡기 때문에 맛이 좋을 뿐 아니라 선도가 뛰어나다. 또한 곰소 염전에서 나는 양질의 천일염으로 가공한다. 그리고 질좋은 소금과 생선의 선도도 중요하지만 소금을 얼마 만큼 넣고 버무려 어떻게 저장하여 숙성시키느냐가 맛을 좌우한다고 이곳 상인들은 말한다.
맛과 질이 뛰어난 곰소 젓갈에 관한 필자가 겪은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작년 김장 때의 일이다. 김장을 한다고 배추 다섯 포기를 가지고 부산을 떠는 아내를 도와주다 12시경 먼저 잠에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내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광호아빠, 큰일났어. 엉엉~~. 어떡해"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내의 얼굴, 손, 발을 살펴보았다. 아무 이상이 없다.
"왜, 왜그래"
"김치 다 망쳤어. 흐흑~"
계속 흐느껴 우는 아내를 데리고 주방으로 나왔다. 김장 속을 버무려 절인 배추 사이사이에 비벼 넣는 일이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김장 속을 버무리면서 액젓 통을 비우겠다는 일념으로 통에 삼분지 일쯤 남은 액젓을 다섯 포기 김장을 담그는데 다 쏟아부은 것이었다. 아내는 평소 음식을 만드는데 유난히 손이 크다. 먹다 만 음식으로 늘 냉장고가 가득 차있다.
지금은 내가 다 포기하고 살지만 이는 늘 부부간에 분쟁거리가 되었었고 때로는 험악한 상황으로까지 발전하곤 하였다. 그래도 전라도 액젓을 사용하게 된 것만도 고마웠다. 처음 신혼 때에는 고향에서 보내온 젓갈류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결국 내다버리게 되더니만 지금은 젓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친정집을 비웃는다. 음식에 있어서는 나의 분투 덕분에 완전히 전라도화(?)가 된 것이다.
하여간에 큰 손이 결국 큰 일을 벌이고 만 것이다. 김치를 맛을 보니 짠 것보다는 써서 먹기가 어려웠다.
"이 젓갈 점섭이가 보내준 거 맞지? 그려. 그러면 좋은 수가 있어. 걱정하지 말어" 마침 주말 농장에 가서 캐다놓은 고구마를 큰 놈으로 골라서 깎았다. 이를 가늘게 채썰어 넣게 하였다.
"자아 됐어. 이 액젓은 다른 액젓하고는 틀려. 두고 보라고. 지금 먹기에는 좀 쓰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날것이고, 봄쯤되면 아주 맛있는 김치가 될 터이니 근심 걱정 다 끊어버리더라고 잉" 과연 나의 예측은 적중하였다. 김치가 익어가면서 맛이 나기 시작하였다. 쓴맛은 사라지고 약간 짜기는 하였지만 밥이랑 같이 먹으면 아주 훌륭하였다. 특히 김치찌개를 끓이면 더 맛있었다. 애들도 김치찌개만 끓이면 밥을 잘 먹었다. 우리는 이 김치를 아껴가면서 말국 한방울도 안남기고 아주 잘 먹었다.
액젓가공 공장 부부식품
변산에서 장인 정신으로 액젓을 만드는 윤점섭씨가 있다. 변산면 마포리에서 태어나 줄곧 변산에서만 살아온 그는 5년전부터 액젓 가공업을 시작하였다. 나는 그를 믿는다. 그는 다음 3가지를 철저히 지킨다는 것을 믿는다. 첫째, 선도 높은 재료만을 엄선하여 젓갈을 담는다는 것. 둘째, 3년 이상 숙성시킨다는 것. 셋째, 물타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그가 만든 젓갈은 한번 맛보면 다시 찾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재료는 주로 멸치와 새우를 쓰는데 멸치 70%에 새우나 까나리 30% 정도 섞인 혼합액젓이
더 맛이 뛰어나다. 그의 액젓가공공장은 변산면 마포리 성천포구입구에 있다. 고사포해수욕장을 지나 격포쪽으로 500여미터 가면 성천포구로 가는 길이 나온다. 전화번호는 063-582-8325(변산액젓공장 부부식품)이다. 그는 1998년 5월에 여수에 가서 40노트짜리 쾌속정을 계약하고 99년 5월에 진수시켰다. 모두 선도높은 재료를 얻기 위함이었다. 막 배에서 내린 멸치는 아낙네들의 능숙한 솜씨로 소금에 버무려지는데 항상 곰소염전에서 나는 소금을 쓴다. 이렇게 버무려진 멸치는 큰 통에 담겨 야지에서 2년간 발효시킨 후에야 비로소 건물 안에 있는 대형 탱크로 옮겨진다. 여기서 다시 1년 이상을 더 숙성시킨 후 병입을 한다. 멸치액젓과 멸치와 새우, 까나리 등을 섞은 혼합액젓이 생산되는데 10리터들이 통과 1.8리터 짜리 페트병에 담아 판매하고 있다. 가격은 10리터들이 1통에 2만원 정도 하는데 부안군의 농협이나 젓갈 판매장에서 구입할 수 있고 김치 공장 등 대량으로 소비하는 곳에서 주문을 받아 공급해 주고 있다고 한다.
소금의 문화인류학
소금의 주성분인 염화나트륨은 우리의 신체에서 체액의 삼투압 균형유지, 신경계의 전기적 산도 유지, 혈액의 압력과 양의 유지, 근육세포에 출입하는 물의 조정, 탄수화물과 단백질의 신진대사 등에 필수적인 화학 물질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염화나트륨, 즉 소금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북미 대륙의 태평양 연안의 원주민들은 해조류를 주로 먹었고, 내륙 지방에서는 풀을 태워 그 재를 먹기도 했다. 뉴기니의 고산지대에서는 사탕수수를 태운 재에 물을 통과시켜 간수를 얻고 이 간수를 진흙 가마에 넣어 증발시켜 덩어리 소금을 얻는다. 인류가 수렵·어로생활을 하다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더욱 치열해졌다. 채식을 위주로 하는 사람은 더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하였다.
농업혁명을 겪으며 곡물과 채소류를 주식으로 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소금 결핍증을 겪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발명해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최초로 시작한 곳도 해안지방일 것이라는 것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즐문토기(빗살무 늬토기)는 해안이나 강 하구에서 출토되고 있다. 농업의존도가 더욱 높아진 청동기 시대에 와서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무문토기가 강의 중·상류지역에서까지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해안에서의 소금 공급이 내륙에까지 공급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소금의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했던 지역에서 농경이 발달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 시기에는 돼지 등의 가축을 집 울안에서 기르고 있었는데 이들도 야생동물과는 달리 소금을 필요로 하므로 소금의 소비량은 더욱 증대되었다.
사람은 곡물과 채소 위주의 일상 식단일 경우 하루 약 12g의 소금을 섭취해야 한다. 따라서 500명의 인구를 가진 마을 공동체에서 필요한 하루 소금의 양은 500명*12g=6kg이며, 1년이면 365일*6kg=2190kg이다. 예를들어 동진강 중·상류지역에 이러한 공동체가 100 곳이 있었다면 강하구의 해안지방에서는 년간 219톤의 소금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선사시대에 이미 내륙지방의 곡물·채소와 해안지방의 소금의 교역이 공동체 생활의 중대사였으리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후 소금은 왕조의 성쇠를 좌우하는 주요 품목이 되었고 제염업은 고대국가의 주요 기간산업으로 내려왔다. 또한 소금은 긴 겨울을 나야 하는 한반도에서 식품의 저장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김치, 된장, 젓갈류, 굴비 등은 이 땅 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염장가공 식품들이다.
*영어의 salt는 어원이 salarium인데 이는 군인들의 봉급이란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