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루(門樓)에서 피어난 명인(名人)들의 시문(詩文)-2

부안읍성 남문루의 이름은 취원루(聚遠樓)다. 이 취원루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안현의 누정(樓亭) 조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취원루(聚遠樓) :곧 성의 남쪽 문루인데 서쪽으로 변산을 대하고 북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며 동쪽과 남쪽은 큰 들을 임하였다. <聚遠樓 : 卽城南門樓 西對邊山 北望大海 東南臨大野> 하고 이행(李行)과 허종(許琮) 두 사람의 남문루에 올라 지은 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1887년에 부안의 유림들에 의하여 간행된 군지 <부안지(扶安志)>의 누정 조에는 남문루를 후선루(侯仙樓)라고 기록하고 일명 취원루 라고도 한다 하였으며 1932년에 역시 유림들이 간행한 군지 <부풍승람(扶風勝覽)>의 누정 조에도 <부안지(扶安志)>와 같은 내용으로 적고 …

문루(門樓)에서 피어난 명인(名人)들의 시문(詩文)-1

부안읍성에는 동․서․남 세 곳에 외부로 드나드는 성문의 다락(城門樓)이 있었으며 동문의 다락은 청원루(淸遠樓)라 했고, 서문의 다락은 개풍루(凱風樓)며 남문 다락은 취원루(聚遠樓)또는 후선루(候仙樓)라 하였다. 이들 성문은 성안 사람들이 외부로 나다니는 문이요, 외부인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로 안과 밖의 경계점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계(淨界)와 부정계(不淨界)를 구획 짓는 문으로 깨끗하고 착한 것만 받아들이는 성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성안에서의 삶은 안온(安溫)하며, 평화스러워야 하고 풍요와 자손의 번창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성문거리에는 성안 사람들의 지킴이신인 오리 솟대당산과 성문 지킴이인 장승신장(長丞神將) 한 쌍씩을 돌로 조성하여 세워 놓고 있다. …

부안읍성(扶安邑城)의 규모와 특징

부안의 진성(鎭城)이라고도 하는 부안읍성이 15세기 초에 어떤 이유로 주변의 다른 여러 고을의 읍성들 보다도 그 규모가 4․5배 이상 더 크고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읍성(全州邑城)보다도 3배가 넘는 큰 성곽으로 축조 되었을까에 대하여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부안지방에는 백제(百濟)때부터 고려(高麗)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많은 성곽들이 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 확인 실측된 성지(城址)의 수만도 15개소나 된다.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부안진성(扶安鎭城)인 부안읍내의 읍성을 비롯하여 흔히 고성(古城)이라 하는 행안면 역리산 토성지(驛里山土城址)와 옛 보안현의 치소성 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안면 영전리 …

부안의 치소(治所)의 변천과 부안읍성(扶安邑城)

  전통사회에서 읍성(邑城)이라 함은 그 고을의 행정치소(行政治所)가 있는 곳을 말한다. 수렵의 시대에서 벗어나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된 농경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국가의 형태가 갖추어지고 점차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지방으로 미치게 되면서 지방의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형성되니, 어느 고을이나 거기에 성을 쌓아 통치의 권위와 위용을 세웠기 때문에 흔히 이를 읍성(邑城)이라 한 것이다. 부안을 다스렸던 행정의 치소(治所)는 조선조 이전에는 두 곳에 있었는데 그 하나는 백제시대의 개화현(皆火縣)에서 부령현(扶寧縣)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고을의 치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행안면 역리(驛里), 송정리(松亭里) 근처였으며, 다른 한 곳은 백제시대의 …

나루터에 묻혀있는 민초들의 이야기

  부안읍내를 중심으로 서울이나 전주방면을 가려면 우선 부안읍성의 동문인 청원문루(淸遠門樓)를 나서야 한다. 동문인 청원루 성문거리에는 돌솟대의 오리당산과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한쌍의 수문장격 부부 장승이 조성되어 있어 성안사람들의 안위를 수호하고 있으며 동문을 나서 덕다리 방죽을 지나면 장승백이다. 장승이 박혀 있는 곳이란 뜻의 지명으로 지금은 장승의 흔적은 없지만 나그네의 이정(里程) 안내와 여정을 수호하는 노신격(路神格) 장승이었다. 지금의 해성병원 앞 언덕배기다. 장승백이를 지나 고마제 방죽을 좌측으로 하고 동진장터를 지나면 청운동의 동진원(東津院)에 이른다. 원(院)이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제도로서 통행의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문 곳에 나라에서 원을 두어 공무로 …

부안의 큰 대문 동진나루

  지금 동진대교가 놓여진 동진강 하구에 있었던 옛 나루터는 먼 옛날부터 부안고을의 시작이요 이곳을 드나드는 첫 대문이었다. 부안 사람들이 전주나 서울등지로 나들이 할 때도 이 동진나루를 건너 죽산(竹山)을 지나 내재역(內才驛)을 거쳐 김제, 금구 또는 이서를 지나 전주에 갔으며, 또 울렝이(鳴良里)의 해창을 지나 만경의 사창나루를 건너 임피(臨陂)의 소안역(蘇安驛)으로 하여 충청도 논산 땅을 지나서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마찬가지로 외지의 사람들이 부안을 찾을 때에도 부안을 중심으로 동북지방 사람들의 대부분은 동진나룻배를 타야 들어올 수 있었으니 동진나루는 부안의 대문이었고, 교통의 요지였으며 나루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

봉래동천(蓬萊洞天)

  묻혀있는 유물이나 사료들을 발굴하는 일은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망실되기 쉽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지정 보존되어 있는 유물이나 유적들의 보존조차도 부실한 곳이 많고 비록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한 지정문화재 외의 자료들에는 거의 눈도 돌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부안의 이러한 몇 가지 사례들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안타깝게 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부안군청 뒤 옛 관아(官衙:오늘날의 군청 청사) 앞 진석루(鎭石樓)가 있었던 반석위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쓴 “봉래동천(蓬萊洞天)”이라는 초대형의 초서(草書)와 그 아래 해서(楷書)로 쓴 “주림(珠林)”, 그리고 예서(隸書)로 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