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사회에서 읍성(邑城)이라 함은 그 고을의 행정치소(行政治所)가 있는 곳을 말한다. 수렵의 시대에서 벗어나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된 농경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국가의 형태가 갖추어지고 점차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지방으로 미치게 되면서 지방의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형성되니, 어느 고을이나 거기에 성을 쌓아 통치의 권위와 위용을 세웠기 때문에 흔히 이를 읍성(邑城)이라 한 것이다.
부안을 다스렸던 행정의 치소(治所)는 조선조 이전에는 두 곳에 있었는데 그 하나는 백제시대의 개화현(皆火縣)에서 부령현(扶寧縣)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고을의 치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행안면 역리(驛里), 송정리(松亭里) 근처였으며, 다른 한 곳은 백제시대의 흔양매현(欣良買縣), 희안(喜安), 보안현(保安縣)의 치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보안면의 영전리(英田里) 근처였을 것이다.
이들 두 고을이 1416년(조선조 태종 16년)에 병합되면서 보안현이 그 치소와 함께 폐현되어 없어졌으며, 부안현(扶安縣)의 치소는 부령현의 치소였던 행안면 역리로부터 지금의 부안읍 성황산을 중심으로 축성된 토성(土城)을 읍성으로 하여 옮겨 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추정하는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의해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 관찬(官撰)의 지리서(地理書)인데 1481년(성종, 12)에서 1530년(중종, 25)까지 무려 50여년에 걸쳐 완성한 우리나라 최고(最古), 초대의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다. 총 55권으로 된 이 책의 내용은 각 고을의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성씨(姓氏), 풍속(風俗), 형승(形勝), 산천(山川), 토산(土産), 성곽(城郭), 관방(關防), 봉수(烽燧), 누정(樓亭), 학교(學校), 역원(驛院), 불우(佛宇), 교량(橋梁), 사묘(祠廟), 고적(古蹟), 인물(人物), 그리고 그 고을의 풍습 풍광 등을 시문(詩文)으로 노래한 제영(題詠)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어 5백여 년 전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사회, 인문은 물론이요, 민속과 인물의 연구에도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전적(典籍)의 하나다.
이 <신증동국여지승람> 34권, 부안현(扶安縣), 성곽(城郭), 읍성(邑城) 조를 보면 부안현의 치소인 부안읍성(扶安邑城)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여 놓고 있다.
「읍성: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백 88척, 높이가 15척이요, 안에 우물이 12개 있으며, 동서남의 삼면에 모두 성문다락(樓)을 세웠다. 신증: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6천 4백 58척, 높이 15척이요, 안에 우물이 16개 있다. (邑城: 土築 周一千一百八十八尺, 高十五尺 內有泉井十六. 新增: 石築 周一萬六千四百五十八尺, 高十五尺, 內有泉井十六)』이라 하였다. 이는 지금은 모두 훼철 되어 버리고 일부 흔적만 조금 남아 있는 扶安邑城을 말한 기록으로 치소가 옮겨올 당시에는 토성이었는데 그 후에 견고한 석축의 성을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적(古蹟)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고읍성(古邑城): 현의 동쪽에 있는데 둘레가 5백 척이고, 안에 우물이 6개 있다. 보안폐현(保安廢縣):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古邑城:在縣東 周五百尺, 內有六泉, 保安廢縣:在縣南三十里> 위의 기록에서 보안폐현과 고읍성(古邑城)은 옛 부령현과 보안현이 합병되기 이전 부령현과 보안현의 치소를 이름이요 고읍성은 부령현의 치소였던 지금의 행안면 역리 뒷산을 중심으로 있었던 토성을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그곳이 부령현의 읍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 기록의 내용중 동(東)과 서(西)가 잘못 바뀌어 기록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즉.
“현의 동쪽에 있는데(在縣東)”가 아니라, “현의 서쪽에 있는데(在縣西)”로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 잘못 기록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고을의 형성은 고을을 다스리는 중심지인 읍성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고을의 규모를 이루므로 읍성과 그 위치는 매우 중요하였다.
부안읍성의 동쪽에는 덕다리(德村)마을이 있을 뿐이고 그 뒤에 망기산(望旗山)이 있을 뿐인데, 이 산에 성곽의 흔적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한 고을의 치소가 될 만한 터전도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와 같은 잘못된 기록들이 간혹 있어 우리를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33권의 전라도 전주부(全州府)의 건치연혁(建置沿革)조에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이며,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27권 경상도 창령현(昌寧縣)의 건치연혁 조에서는 ‘신라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한동안 전주(全州)를 비사벌(比斯伐)로 잘못 알고 큰 혼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이 소동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여 비사벌(比斯伐)이라는 지명은 경상남도 창령군(昌寧郡)의 신라 때의 지명으로 판명이 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지금도 전주에는 비사벌다방이니, 비사벌미용실이니 비사벌아파트 등의 명칭, 상호들이 자주 눈에 띠며 한때는 비사벌예술고등학교까지 있었다.
부안읍성(扶安邑城)의 형태가 토성과 석축성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처음의 토성은 부령, 보안 두 현이 합병된 후 부안현이 치소를 지금의 부안읍내 성황산 밑 동남 좌향으로 옮길 당시의 성이 토성이었던 것이며, 토성이 좁고 튼튼하지 못하여 석축의 평산성(平山城)형태로 넓고 견고하게 다시 쌓은 것이 석축성인 것이다.
이 개축된 석축의 부안읍성은 그 규모가 유난히 넓고 크다. 부안읍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고을들, 고부, 흥덕, 고창, 만경, 옥구, 임피 등의 읍성의 둘레가 고작 2~3천 여척에 지나지 않고 지금 남아 있는 고창의 모양성도 3천80척이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인 고부(古阜)읍성도 2천 4백여척에 지나지 않으며 전라도의 감영이 있는 전주의 읍성도 5천 3백여 척에 불과한데 비하여 부안읍성은 전주읍성의 3배가 넘는 1만 6천 4백여 척의 큰 읍성이었다.
지금은 거의 옛 성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 자취를 더듬어 한바퀴 돌아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원불교 교당 뒤편 아람드리 당산나무 옆으로(지금은 고목의 그루터기만 남았지만) 토담의 자취처럼 남아있는 성터를 따라 완만한 산비탈을 오르면 옛 망해루(望海樓)가 있었던 북쪽으로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부성루(扶城樓)를 지나 성황사(城隍寺)를 감고 북동으로 돌다가 동쪽의 급경사를 내려서 동문안 당산의 석장승 한 쌍이 있는 곳에서 성의 동문(東門)을 이룬다.
동문에서 방향을 동남방으로 돌려 숙후리 서답바위 옆을 지나 구영말((九英里, 東中里)의 뒷등성이를 감고 돌아 상원아파트 못 미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남일당한약방 앞에서 남문(南門)거리를 이루고 부안초등학교 뒷담 옆을 지니 화성탕 사이를 지나 부안신협의 남측으로 해서 원불교 교당앞에서 서문(西門)거리를 이루면서 높이 15척에 둘레 16.458척, 우물 16개를 보유하는 부안읍성(扶安邑城)을 이루었다.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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