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풍,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지만-백제 부흥의 중심, 주류성

▲우금산성(일명 주류성) 굴실-백제부흥운동때 복신이 칭병 우거했던 곳이라 하여 ‘복신굴’이라고도 부른다.

왕조의 단절은 ‘한순간의 실수’일 뿐

서기 660년 6월 21일에 당나라군이 백제를 침공하기 위해 서해 덕물도에 도달하였다. 백제에 위기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결국 7월 12일에는 수도인 사비성을 포위당했다가 마침내 7월 18일에 의자왕이 항복함으로써 국가의 운명이 꺾이게 되었다. 채 두 달이 안 되는 기간이었다. 신라와 당 연합군은 갑자기 나타나서 백제 서울을 에워싼 지 6일 만에 전쟁 상황을 종료시켰고, 백제라는 나라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백제와 신라의 전쟁은 빈번한 일이었기에 백제 사람들은 패전을 절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왕조의 단절이 ‘한순간의 실수’일 뿐, 정말 전쟁 자체에서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으니 이제 정말로 한번 해보자는 태세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주류성(부안) 중심의 백제 부흥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백제 부흥운동 세력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이미 국가 재건의 열쇠인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왜에 체류 중이던 부여풍의 귀환을 공식 요구한 상태였다. 부여풍의 영입과 왕위 계승은 부흥 백제세력의 중앙 지휘부를 견고하게 하고, 그 지휘 아래 조직적 명령체계를 갖추어 단기간에 국가의 부흥을 완성시키는데 중요한 필수 조건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래서 부여풍의 귀환 과정은 주류성 중심의 부흥백제국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응답하라! 부여풍~”

기록에 의하면 부흥세력이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한 것은 서기 660년 10월이었다. 당시 백제 지역은 각처에서 부흥군이 일어나 일시 단절된 국가의 연속성을 확보하려는 중이었다. 복신이나 도침·정무·여자진 등의 부흥세력은 침략군을 몰아내고 단절된 왕통을 이으면 국가는 계속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당시 백제 사람들은 ‘위험한 국가 상황을 다시 안정시켜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의자왕이 항복한 7월 18일로부터 두 달 만인 서기 660년 9월 23일에 사비성을 포위・공격하고, 10월에는 왜에 사신을 보내 부흥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왕자 부여풍(풍장)의 왕위 계승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다시 6개월 뒤인 서기 661년 4월에도 나타난다. 『일본서기』에는 복신이 부여풍(풍장)으로 여겨지는 왕자 규해(糺解)의 송환을 재차 요청한 것으로 나온다. 이 시기는 부흥세력이 두량이(완주 이서)·고사비성(정읍 고부) 전투(661년 3~4월)에서 승리하여 기반을 고착시켜 나갈 때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남방제성(南方諸城)’이 모두 귀속되었다고 할 정도로 부흥세력의 기세가 높았던 상태였다. 따라서 부흥세력은 부여풍의 조속한 귀국과 등극을 통해서 새로운 국가 수립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백제 지역은 중앙정부와 지배층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려 지방 세력은 각기 독자적 생존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서기 661년 4월 이후 사비정부를 대체할 주류성(부안) 체제가 어느 정도 구현되자 당과 신라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정국을 관망하던 지역 세력들이 일순간 부흥군에 호응하였던 것이다.
이에 복신은 부흥세력의 방어체제 강화를 위해 지역 세력의 결속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이들을 더욱 밀착시켜 부흥세력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면 효과적이고 정확한 정치 일정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왕위의 승계를 통해 백제의 ‘재조(再造)’ 내지는 ‘계속’을 실행할 능력과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그 시작점은 바로 부여풍의 조기 귀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귀환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멀리서 본 우금산성(일명 주류성)

기록의 진실

그로부터 다시 부여풍(=풍장)의 귀환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3개월 후인 서기 661년 9월이었다.

① 9월 황태자가 나가쓰노(長津宮)에 가서 백제 왕자 풍장(豊璋)에게 직관을 주고, 또 오오노오미코모시키(多臣蔣敷)의 누이를 아내로 삼도록 했다. 그리고 대산하(大山下) 사이노무라치아치마사(狹井連檳榔)·소산하(小山下) 하타노미야츠코노다쿠쓰(秦造田來津)를 파견하여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본국까지 호위해 보내게 하였다. 이에 풍장이 입국할 때 복신이 맞이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일본서기』 27, 천지 즉위 전)

② 여름 5월 대장군 대금중(大錦中) 아츠미노히라부노무라치(阿曇比邏夫連) 등이 수군 170척을 거느리고 풍장 등을 호위하여 백제국에 호송한 후 칙서를 내려 풍장이 그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또한 복신에게 금책을 주어 그 등을 어루만지면서 작록을 포상으로 주었다. 이때에 풍장 등은 복신과 더불어 머리를 조아리고 칙서를 받으니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일본서기』 27, 천지 원년)

그런데 위의 기록에 따르면 풍장(=부여풍)의 귀국 시기는 서기 661년 9월만이 아니라 이듬해인 662년 5월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사료 ①에는 백제 왕자를 “군사 5천명에게 호위하게 하여 본향으로 보냈다(率軍五千餘 衛送於本鄕)”고 나오는데, 사료 ②에도 분명 “수군 170척을 보내면서 풍장 등을 백제국에 보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서기』는 부여풍의 귀환에 대해 두 가지 시기를 병기하여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 꼴이 된다.
같은 ‘부여풍’에 대한 기사인데도 귀국 시기가 다른 것은 『일본서기』 찬자가 사용한 원 자료가 달랐기 때문이다. 즉 사료 ①은 서기 661년 9월에 풍장(=부여풍)을 호위하여 따라간 에치노다쿠쓰(朴市田來津)와 관련된 가기(家記)를 참고하였으며, 사료 ②는 아츠미노히라부노무라치(阿曇比邏夫連)의 활약상과 관련된 자료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귀국 시기가 두 가지인 것은 편찬자의 착오가 아니라 참고 자료 때문이며, 편찬자는 『일본서기』 본문 내용의 통일보다는 원 자료를 그대로 싣는 것을 존중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두 기록이 모두 의미가 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이를 인정할 경우 부여풍의 백제 귀국 시점에 대해 합리적인 이해나 해석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에 부여풍은 서기 661년 9월에 치쿠시(筑紫)로 와서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로부터 책봉을 받은 후 바다를 건널 기회를 엿보았지만 결국 이듬해 5월에야 5천의 구원군을 실은 170척의 선단과 함께 귀환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왕좌의 게임’

하지만 이 두 기사 중 하나만을 부여풍의 귀국 시기와 연관시킬 것이 아니라 그의 귀환 시점과 이후 백제에서 상황, 정확히는 그의 정식 즉위 시점에 대한 것으로 추정해야 한다. 즉 그의 귀환은 부흥세력이 요청한 시점으로부터 1년여 후인 서기 661년 9월이지만 백제 도착 이후 정세 변화에 따른 부흥세력 내부의 정치적 요동이 그의 정식 즉위까지 상당한 시간이 지체되도록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분명한 점은 『구당서』 백제전에 “이때는 용삭 원년 3월이다……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군대를 아우르니 부여풍은 단지 제사만 주관할 뿐”이라고 하여 용삭(龍朔) 원년(661)에 부여풍이 귀국하였고, 복신이 도침을 죽인 후에는 제사만 주관하는 형식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따르면 적어도 서기 661년 3월 이후에는 부여풍(풍장)이 백제에 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일본서기』제명 6년 10월 기록에도 “왕자 풍장과 처자를 그의 숙부 충승 등과 함께 보냈다. 그를 정식으로 보낸 때는 7년에 보인다”고 하여, 풍장(부여풍)이 백제로 돌아간 시기를 제명 7년(661)임을 확인해준다. 그러므로 이들에 근거하면 부여풍의 귀국 시기는 사료 ①의 서기 661년 9월 이후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서기 662년 5월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사료 앞부분의 “送豊璋等於百濟國”보다는 “以豊璋等使繼其位”라는 부분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풍장(=부여풍)이 그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는 진정한 의미가 비로소 정식 즉위식을 통해 백제의 왕이 되었다는데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왕좌의 게임’을 염두에 두고 부여풍의 귀환 과정을 좀 더 추적하면 남은 기록이 갖는 의미가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부여풍, 출발하다!

우선 부여풍이 왜국을 떠난 시점은 언제였을까? 앞의 사료 ①에 따르면 그는 떠나기에 앞서 몇 가지 중요한 의식과 행사를 치러야 했다. 하나는 왜의 ‘직관(織冠)’을 수여받는 일이었다. 이는 대화개신(大化改新)으로 서기 647년에 제정된 19단계 관위 중 최고 관직을 말하는 것으로, 왜가 부여풍에게 신하로서의 위치를 부여하려 했던 의식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에 따르는 일정 소요에만 주목하자!
그리고 또 하나는 새로운 아내를 맞이한 사실인데, 부여풍이 왜에 간 것이 서기 643년의 일이므로 약 20년이라는 세월을 왜에서 혼자 살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정략결혼의 배경이나 의미 등을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여기에서도 주목할 것은 그로 인한 일정과 시간이다.
왕실의 관직 수여나 국혼(國婚)에 준하는 행사 등은 각종 의식 절차로 인해 상당한 기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런 행사들을 소화해 낸 부여풍 일행이 왜지(倭地)를 떠나게 된 시기는 빨라야 9월 하순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는 데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왜국의 제명(齊明) 여왕이 사망한 것이 서기 661년 7월 24일이기 때문에 국상 기간인 8~9월에 부여풍이 참석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면 그의 귀국 시기는 더욱 늦어질 수 있다.

군사 5천에 수군 170척을 거느리고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부여풍이 부흥세력의 거점인 주류성(부안)에 언제 도착했는가 하는 점이다. 즉 그가 현재의 후쿠오카(福岡)의 나가쓰노(長津宮)를 출발하여 주류성까지는 얼마 만에 도달했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항해 기록이 남지 않았으므로, 유사한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아래 기록이다.

③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에는 …… 2척의 배로 오당(吳唐)의 길을 이용하여 …… 8월 11일에 치쿠시(筑紫)의 오오쓰우라(大津浦)를 출발하였다. 9월 13일에 백제의 남단에 있는 섬에 이르렀는데 섬의 이름은 명확히 알 수 없다. (9월) 14일 인시(寅時)에 2척의 배가 연이어 대해(大海)로 접어들었다.(『일본서기』 26, 제명 5년 7월)

위는 2년 전인 서기 659년에 왜에서 견당사를 파견하였을 때의 항로를 적은 것으로, 당시 견당사는 북큐슈(北九州)를 출발하여 절강성의 괄주(括州)를 거쳐 낙양에 이르는 코스를 밟았다. 그런데 이 견당사의 출발점인 오오쓰우라(大津浦)가 바로 현재의 후쿠오카 하카다(博多) 만으로, 공교롭게도 부여풍의 출발지와 동일한 곳이었다.
당시 견당사의 배는 ‘오당지로(吳唐之路)’를 이용하였는데, 이는 북큐슈를 출발하여 한반도 남서부를 경유하지 않고 중국의 강남 지역으로 직행하는 항로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이 지난 후에야 백제 남단의 섬에 이르렀고, 이어 대해로 접어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후쿠오카에서 제주 남쪽을 지나 동중국해로 나가기까지 한 달 이상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7월 하순에서 8월 하순은 동중국해의 기상이 비교적 안정되어 남동 내지 남풍 계열의 바람이 불기 때문에 견당선은 대개 여름에 일본을 출발하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항해에는 계절풍과 해류의 영향을 많이 받아 신라에서 일본으로 갈 때는 거의 겨울 계절풍을 이용하기 때문에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집중되는 반면에 일본에서 신라로 향하는 경우에는 봄에서 초여름, 가을에 걸쳐 남풍 계열의 바람을 이용해야만 순조롭다.
따라서 서기 661년 9월의 부여풍 일행 또한 사료 ①에 나오는 나가쓰노를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백제 남단까지는 최소 한 달 이상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 그가 이용하였을 코스는 견당사의 오당지로와 달리 남해안의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데다가 다시 그 남단을 거쳐 북으로 서해안을 따라 주류성(부안)까지의 거리가 더해진 것이기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특히 연안항로 선택 시에는 섬들이 많고, 조류의 움직임이 복잡하면 안전한 항로를 선택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한반도의 서남해안은 조류의 영향력이 매우 크고 방향의 지역적 편차도 심해 크게 신경을 써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해풍과 육풍이 바뀌는데다가 바람이 주위 지형과 부딪혀 흐름이 변하는 등 배의 운항이 매우 불규칙적이고, 운항 일정도 늘어지기 십상이다.

비바람, 전염병에 군사 훈련까지

더군다나 서기 659년의 견당사는 2척의 배에 불과했지만 서기 661년 9월의 부여풍 일행은 휘하에 5천의 군사까지 동반하였고, 뿐만 아니라 각종 장비와 무기・군량 등까지 한꺼번에 움직여야 할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 규모는 사료 ②의 표현처럼 수군 170척이 동원될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그와 5천 군사를 실은 선단의 이동 속도는 더욱 떨어졌으리라 여겨진다. 오늘날처럼 모터가 달리지 않은 전근대 이전 시기 선박은 순전히 사람과 바람의 힘을 이용해야 만이 항해가 가능하였기에 속도 또한 생각 이상으로 나지 않았다. 실제 이보다 뒤의 일이지만 서기 838년 일본의 견당사 파견 때 참여한 엔닌(圓仁)의 기록에는 출발 때인 6월 13일에 “바람이 불지 않아 사흘을 머물렀다”거나 6월 17일에도 “바람이 없어 닷새 동안 머물렀다”는 등 항해에 바람의 영향이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기상 변화 등의 제약 조건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며, 원활한 식량·식수의 공급 문제와 비좁고 불결한 공간에서 빈발하는 전염병 등도 있어서 수시로 육지에 정박하여야 했고, 때때로 항해 중의 진법 훈련까지 고려한다면 생각 이상으로 항해 거리나 기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러 악조건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견당사의 움직임보다 2배인 60일 이상은 잡아야 주류성 근방에 도달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부여풍이 9월 말에 후쿠오카에서 출발하였다면 아무리 순조롭게 부안 주변에 도달하여도 거의 11월 말이었으리라!


▲우금산성(일명 주류성)

가파리 해안과 소류성

하지만 바다에서의 항해는 언제나 예측불허였기에 실제 부여풍 일행은 좀 더 늦은 12월이 되어서야 도달하고 말았다.

④ 이 해에……또 일본의 고(구)려 구원군 장수들이 백제 가파리의 해안에 정박하여 불을 피웠다. 배에 구멍이 생겨 가는 소리가 났는데 화살이 날며 우는 소리 같았다. 어떤 사람이 “고(구)려, 백제가 끝내 망할 징조인가”라고 하였다.(『일본서기』 27, 천지 즉위전)

위 사료 ④는 앞에서 언급한 사료 ①과 같은 해의 기록이다. 『일본서기』에는 사료 ①의 서기 661년 9월 기사에 이어 12월에 고구려와 당군 사이의 평양성 공방에 관한 사실을 전한 뒤에 바로 이 기록을 적어 놓았다. 이를 보면 ‘이 해[是歲]’는 적어도 12월 이후에 일어난 사건과 연관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이 시기 왜가 군대를 파견하면서 백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는 식의 표현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러한 예는 다음에서도 볼 수 있다.

⑤ 이 달에 당인(唐人)과 신라인(新羅人)이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가 우리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장수를 보내 소류성(䟽琉城)에 진을 치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당인들이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다. 신라는 서쪽 보루를 빼앗을 수 없었다.(『일본서기』 27, 천지 원년)

⑥ 여름 5월 계축삭에 오노우에(犬上君)[이름이 빠졌다]가 달려가 병사의 일을 고(구)려에게 알리고 돌아왔다.(『일본서기』 27, 천지 2년)

위의 기록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고구려를 구하러 갔다’거나 ‘고구려가 구원을 요청하여 장수를 보냈다’거나 ‘군사에 관한 일을 고구려와 상의하고 돌아왔다’는 것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위의 기록을 고구려와 왜 사이에 군사적 연합과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위의 기록들을 자세히 음미할 때 드는 의문은, 고구려 구원군이었음에도 그 종착점이 왜 하필 가파리 해변이나 소류성에서 끝나는가 하는 점이다.
사료 ④에서 고구려 구원군이 도착한 곳은 가파리 해안이라 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전북 부안 일대로 추정하는 곳이었다. 또 사료 ⑤에도 고구려가 구원을 요청했는데도 왜군이 진을 친 곳은 소류성 즉 주류성이었다. 그리고 사료 ⑥의 ‘병사를 아뢴다(告兵事)’는 것도 고구려 구원을 위한 군사 논의였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오히려 왜군이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일(兵事)’에 대해 논의한 것이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사료 ④에서 언급된 ‘고구려 구원군’이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에 맞다. 따라서 당시 백제 구원군이 백제 가파리 해안에 정박하였다는 ④의 기록은 한 겨울의 험난한 파도와 싸우면서 계속된 항해로 인해 배에 구멍이 숭숭 뚫릴 정도로 지난한 여정을 겪었음을 짐작케 하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선단이 12월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목적지에 이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류성에 돌아왔건만

이처럼 부여풍과 그 일행의 백제 귀국 여정은 근 3개월, 적어도 70일 이상이 소요된 험난한 항해를 거쳐서야 이루어진 것이었다. “백제가 끝내 망할 징조인가?”라는 어떤 사람의 말은, 처음 시도되는 대규모 선단의 왜에서 백제에 이르는 바닷길이 생각보다 어려웠기에 대규모 원조를 보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스스로 체득한 탄식조의 넋두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여풍의 백제 귀환 시기는 종래의 주장처럼 서기 661년 9월이나 662년 5월이라는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즉, 별개의 사건을 설명하는 것 같은 관련 기록들을 조합하여 살펴보면 그가 백제로 귀환하기 위해 출발한 것은 서기 661년 9월이 맞지만 목적지인 백제 주류성 근방에 도착한 것은 만 2달 이상의 험난한 항해 끝인 서기 661년 12월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이 이후 부흥백제국의 앞날에 많은 우여곡절을 드리우는 전조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계속>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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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남(국가기록원 학예연구사)

<부안이야기 15호>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