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설화] 선계안과 이성계-‘태조 이성계, 선계안에서 공부하다’

 

▲보안면 우동리(선계안)ⓒ부안21

보안면 우동리 뒤에 큰 저수지가 있는데 그 저수지의 동북쪽 산 일대를 선계(仙溪)안 또는 선계골이라고 한다. 일찍이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청년시절에 큰 뜻을 품고 팔도를 두루 편답하면서 지리도 익히고 인심도 살피다가 부안의 변산 선계안에 이르러 이런 영산에는 큰 도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곳에 암자를 짓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남루한 옷차림의 두 노인이 이 암자에 찾아왔다. 옷차림은 비록 남루하나 높은 기상이 엿보이는 이 노인들이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이성계는 극진한 대접을 하였더니 노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유산(遊山)하는 사람으로 잠시 다리를 쉬어 가려는 것이오”

하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노인들에게 글과 무예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어보았더니 아무 막힘이 없이 척척 대답하여 주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속으로 크게 기뻐하며

“두 분 선생님께 청을 드릴 말씀이 있사온데 허락하여 주시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더니

“잠시 다리를 쉰 것도 인연이고 신세를 진 일인데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면 하여 보지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기뻐하며

“오늘부터 두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공부하여 큰 뜻을 펴보고자 하오니 물리치지 마시고 시생의 앞날을 지도하여 주시면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엎드려 청하였다. 두 노인이 처음에는 한사코 사양하더니 이성계의 끈질긴 간청과 정성에 감복하여 쾌히 승낙하고 사제의 의를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날부터 두 노인은 선계암에 묶으면서 이성계의 스승이 되어 한 분은 문(文)을 또 한 분은 무예(武藝)를 지도하였는데 어찌나 총명하던지 그 학업이 일취월장하여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청년이 되었다. 두 노인은 그의 뛰어난 총명을 찬양하며

“이제 우리의 힘으로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세상에 나가 큰 뜻을 펴 성취하라”

하니 이성계는 그동안 베풀어 준 가르침에 대하여 깊이 사례하고 작별을 하게 되는데 사제의 정이 어찌나 깊었던지 서로 헤어지기가 안타까워 이야기 이야기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는 것이 선계안 암자에서 북쪽으로 삼천보(三千步)나 떨어진 어느 봉우리까지 오게 되었다. 두 노인 이성계를 돌아보며 이만 돌아가도록 일렀다. 어쩔 수 없이 두 스승에게 하직의 절을 올리고 일어서 보니 두 스승은 간 곳이 없고 그 앞에 높은 봉우리 두 개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었다.

▲변산면 운산리에서 본 쌍선봉ⓒ부안21

이 봉우리가 월명암 옆에 있는 쌍선봉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선계안에는 이성계가 공부했다는 암자의 주춧돌이 남아 있고,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대나무 밭이 있으며 활 쏘고, 말 달린 자리라고 전하는 반석 위에 말발굽자리가 어지럽게 흩어져 남아 있다고 한다.

소재지: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제보자:김종규(金鐘奎, 남, 56세,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1990년 당시)/출처:전설지(1990.08.20. 전라북도 발행)


/부안21(2009·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