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상서와
어린 날의 아지랑이

 

상서는 어머니 같은 느낌

누구나 하나쯤은 애창곡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애창곡은 ‘고향무정’이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로 시작되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내 고향 상서 우슬재 너머 청림리 노적마을이 떠오른다. 아니 떠 올리기 위해 이 노래를 부르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태어난 고향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고향이 주는 이미지는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 같은 느낌은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내 고향 상서는 내게 어머니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그 곳에 어머니의 땀내가 배어있고 발자취가 남아 있으며 나의 아련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청림리 노적(露積) 마을에서 태어난 사연은 이렇다. 아버지 고향은 상서면 가오리 우덕 마을이고 어머니 친정은 이웃인 숙실 마을이다. 어머니는 이웃 마을로 출가해 오신 셈이다. 할아버지는 한학을 하신 분으로 특히 한약 처방에 능하시어 돌아가실 때까지도 인근에서 처방을 받아가셨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의 우덕 마을이 처음 조성되었을 때 할아버지께서도 그곳에 거주하셨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새로 생긴 동네라는 뜻으로 ‘새터’라고 부르던 곳을 덕(德)이 넉넉한(優)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뜻과, 또 덕을 넉넉하게 베풀며 살자는 염원을 담아 ‘우덕(優德)’이라는 동네 이름을 지으셨다고 고(故) 김형일 옹께서 들려주셨다. 김형일 옹은 한때 상서면 민선 면장을 하신 분으로 아버지와 이웃에 사셨는데 할아버지께서 동네 젊은이들끼리 잘 지내라고 만들어준 계(契)가 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그 계의 계원이시기도 했다.

노적이란 동네는

청림리는 원래 다섯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동, 청림, 노적, 거석, 서운암이다. 부안댐이 만들어지면서 서운마을은 수몰되어 마을이 사라졌다.
여기서 노적마을은 마을 뒷산인 노적봉의 봉우리 모양이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듯 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노적매라고도 불렸다. 노적마을은 다른 곳에 비해서 동네도 크고 살기도 좋아서인지 해방 후와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외부에서 사람들이 여럿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주변 산 밑 골짜기에도 사람들이 살았고 골짜기는 위치에 따라 토질이 다르고 햇빛이 비추는 시간이나 방향도 달랐다. 그래도 노적마을은 산골치고는 햇빛이 오래도록 남아 일조량이 커서 논밭의 작물도 잘 자라는 편이었다. 마을 옆으로는 냇가가 있었다. 청림에서 내려온 물과 학치재 골짜기에서 거석을 거쳐 흐르는 물이 마을 앞에서 합쳐진 물골을 전통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고기도 잡고 여름이면 멱을 감기도 했다. 전통은 물이 깊어 멋모르고 놀던 아이들이 죽어나가기도 했다.
노적 사람들이 부안에 나가려면 학치재를 넘어 개암사 주변을 싸고돌아 감교를 거쳐 우덕을 지나 부안으로 나갔다. 또 한 길은 청림 앞길로 유동의 창수재 뒷산을 넘어 내동과 우덕으로 가는 길이다.
옛부터 노적마을에서는 과거합격자를 많이 내서 고씨와 박씨가 양반행세를 하며 살았다. 비록 산골이지만 부안군에서는 유식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들이 주변과 마을 앞 전답을 차지했고 살만했다. 그렇다고 기와집이기보다는 초가집이었는데 집이 크고 기둥들을 실하고 반듯한 것으로 썼다고 할 수 있다.
해방 후에는 산골마을로서는 꽤 큰 50여 호가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 동네가 반촌(班村)이다 보니 서당도 있었다. 노적봉 밑에는 지당골이라는 꽤 큰 골짜기가 있는데 여기서 유송열 선생이 청림리의 젊은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할머니들 얘기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에 변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빨치산과 군경들로부터 동네 사람들이 맞기도 많이 했고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9·28 수복 후에는 변산으로 들어간 부안의 좌익들이 있었고 이들을 토벌하려는 군경이 치열하게 부딪힌 곳이라서 노적 마을 같은 경우는 이 다툼 속에서 마을 사람들이 피해도 당하거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견디면서 살아야했다.

독립운동가 집안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가 사셨던 상서면 우덕 마을이 언제쯤 조성되었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조선 말 쯤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그곳 본가에서 혼인해 이웃 감교로 분가해 사시던 김낙선 중부(둘째 큰아버지)께서 1909년 의병 선봉장으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의병 독립운동을 하신 것을 보면 대략 그 이전으로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중부님의 독립운동을 소개하면, 필자의 중부인 김낙선 의사(義士)는 1909년 3월 8일 태인군 남촌면 일대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교전 중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탈출, 귀가 하시어 치료하시다가 1909년 7월 상처가 완치되지 않은 상태로 동지 12명을 재규합 선봉장이 되어 총8정과 칼1자루 등 무기를 휴대하고 부안, 고부, 정읍, 태인 김제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 하셨다. 1909년 8월 8일 김제군 홍산면 내리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 중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구금되셨다. 이후 7년간 옥살이를 하는 동안 나라는 일제에 의해 침탈되었고 독립운동가 집안은 심한 탄압과 감시를 감내해야 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중부님의 독립운동은 그동안 묻혀 있었는데 독립운동 연구가 이명호 선생이 보낸 엽서 한 장에서 관심이 시작되었다. 80년 대 초 아버지 성묘를 갔다가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둘째 큰댁에 인사갔을 때 종 형수씨로부터 뜻밖의 엽서 한 장을 건네받았다. 내용인즉은 김낙선이라는 분이 구한말에 의병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지금 그 후손이 살아서 이 엽서를 받거나 아니면 다른 분이 받았으면 그 후손을 찾아 이 엽서를 전해주고 국가에 포상신청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의병독립운동 당시 검거되었을 때 재판받은 70여 년 전 당시 판결문의 주소로 엽서를 보내온 것이다.
필자는 그 엽서를 받아들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고향을 방문해서 큰어머니를 처음 뵈었을 때 큰아버님이 왜 젊어서 돌아가셨는지에 대해 물어본 일이 있었다. 그때 큰어머님이 “의병질 하다 돌아가셨다”라고만 말씀하셨는데 그때는 의병질이 무슨 뜻인 줄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엽서를 보는 순간 그때서야 의병질이 의병독립운동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후 후손들의 노력으로 중부님은 독립유공자가 되셨다. 2009년 거사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감교리 입구에 약 7m의 자연석 기적비도 세워졌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중부님 말고도 많은 독립운동가가 부안지역에서 활동했고 서훈을 받은 분도 많은데 유독 저의 중부님만 기념사업을 하게 되어 독립운동하신 당사자와 그 가족들에게 죄송스런 마음이 크다. 때가 되면 그 분들의 공적을 기리고 그 숭고한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업이 부안지역에서 군민의 뜻을 모아 추진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
이러한 항일독립 운동의 여파로 해방은 되었지만 35년 동안 핍박 받았던 독립운동가 집안의 삶은 여전하였다. 특히 6·25 전란을 겪으며 집안의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급기야 아버지는 먹고살 일거리를 찾아 1952~3년경 산 너머 청림리 노적 마을에 기거하며 나무를 베는 산판일을 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사고를 당해 1954년 2월 19일(음)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 그때 어머니는 34세로 필자를 태중에 품고 있었으며 그해 8월 7일(음)에 필자가 태어났으니 이른바 유복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태몽을 어머니께 말씀해주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네에 큰 포플러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검은 구렁이 한 마리가 나무를 타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 길이가 나무 길이와 같아 보이는 꿈을 꾸었다며 아들을 낳을 거라 말씀 하셨단다. 이렇게 상서면 노적 마을과의 인연이 맺어졌다.

방앗간과 점빵과 두부공장

내 어린 시절 어머니는 산중에서 나무를 해 가지고 고개를 넘어 장에 내다 파셨단다. 빈 몸으로 넘기에도 힘든 고개를 나무 짐을 이고 넘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왔다. 남편을 여의고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여인의 몸으로 세상과 싸워야 했던 처절한 삶! 다섯 살 위인 하나밖에 없는 누나는 어머니를 기다리다 지쳐 나를 업고 마중을 나온다는 것이 노적에서 십리길인 고개까지 나올 때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한두 살 때라면 누나의 나이 여섯 일곱 살이다. 어른들은 애기가 애기를 업었다고 가엾어 했다고 한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어머니는 남편을 여의신 후 이웃의 온정으로 한동안 노적 마을에서 기거하셨다. 여러분들과 정을 나누고 사셨지만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잊지 못한 분이 계신다. 댁호가 대실떡(댁)을 쓰는 분으로 노적 정미소를 운영하셨던 고광충(일명: 광호)의 모친이시다. 이 분은 필자가 세상에 나올 때 산파를 하신 분이다.
그 집은 당시 농촌의 부의 상징이었던 정미소를 운영할 정도로 살림이 넉넉한 집으로 어머니의 궁핍한 사정을 잘 알고 일거리를 제공하는 등 배려로 많은 도움을 주신 것으로 안다. 그리고 아드님인 고광충 선생도 누나와 필자를 친 동생처럼 여겼다고 한다. 필자가 성장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혈육은 아니지만 친형제처럼 느껴져 노적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큰집처럼 들르곤 했다.
고광충 선생은 당시 시골 분이지만 지식인으로서 학식과 덕을 고루 갖춘 분이셨다. 필자가 처음 뵈었을 때 느낌은 인물이 워낙 수려해 신선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생활하셨다. 사연인 즉은 정미소를 운영하다 불의의 큰 사고로 양다리를 쓰지 못할 정도로 장애를 갖고 계셨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누워서도 정미소를 통해 마을의 경제권을 행사하고 계셨다.
나는 고광충 선생께 고등학교 때 처음 인사드린 이후로 형님이라 부르며 그동안 못 나눈 정을 나누며 살았다. 특히 전주로 이사 와서는 1년에 몇 차례씩 찾아뵈며 생활했다. 특히 단단한 복숭아를 좋아하셔서 복숭아 철이면 구해서 찾아가 나누어 먹으며 옛이야기를 나누며 살았었다. 그러나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관계로 당뇨 합병증이 와서 60을 조금 넘기고 돌아가셨다. 자녀들이 잘 성장하여 아들은 언론기자(전, 스포츠한국/고규대 기자)가 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형수씨는 지금은 노적을 떠나셨고 서울의 아들네 집에서 모셔가 봉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동네가 크다보니 점빵도 하나 있었다. 양금철이라는 사람이 처음 열었는데 이 집에서는 어른들이 눈이 벌걸 때까지 취하는 막걸리를 팔았다.
이웃에 살던 상텃 양반은 나를 업고 익은 홍시를 등 뒤로 넘겨주셔서 받아먹은 일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집은 두부공장을 했는데 기술이 좋아 맛있는 두부를 만들어 인근에서 유명했다. 소금간수가 필요하면 바디재를 넘고 우반동을 거쳐 곰소에서 사다가 두부를 만들었다. 필자는 그 노적 마을에서 여섯 살 정도까지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슬재 너머 노적마을까지

노적 마을을 떠나 하서면 큰댁에 잠깐 머무르다가 이모가 계시는 김제로 이주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고등학교를 진학해 성장했다.
내 고향 부안 상서와의 추억은 철이 어느 정도 든 고등학교 시절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어릴 적 고향을 떠나 고향땅에 처음 내려온 것은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추석이 지나고 며칠 후로 아버지 성묘를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청림리 노적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드물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고 변산 방향 버스를 타고 가다가 하서면 소재지인 섶못에서 내려 걸어가야만 했다. 구암리, 풍남동, 용화동, 수련동, 우슬재, 유동, 청림을 거쳐 고향 노적에 땀 흘리며 닿았다.
우슬재를 넘어 걸어다닐 때는 버스 다니는 신작로가 있지만 경사를 줄이기 위해 내놓은 길이라 길이 꽤 멀기 때문에 가파르지만 우슬재 아래 마을을 지나는 지름길을 택해 걸어갔다. 재는 상당히 가파르게 느껴졌고 고개 정상에 다다를 무렵 돌무더기가 나타났는데 돌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엉성하고 그렇다고 그냥 돌만 모아놓은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돌탑에 이르기 전 어머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시다 돌 하나를 주우시고는 발걸음을 멈추시더니 거기에 돌 하나를 정성스럽게 올려놓고 두 손을 모아 “천지신명이시어 우리 ◯◯살 먹은 김씨 대주 남의 눈에 꽃으로나 나부(나비)로나 보이게 하시고 무병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비셨다. 바로 그곳이 선황당(仙皇堂, 城隍堂) 역할을 하던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빈한했지만 서로 정을 나누며

우슬재를 넘어 걸어서 노적 고향 마을에 이르는 동안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노적 마을에서 살아온 이야기는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의 내 마음에 남아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아픈 멍 자욱이 남아 있는 듯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아버지 묘소에 이르렀을 때 벌초는 이미 이웃에 사셨던 아저씨가 해놓으셨다. 가난한 중에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인심은 잃고 살지 않으셨던지 찾는 자식이 없어도 벌초는 매년 하셨다고 했다. 마음으로부터 고마움이 느껴왔다. 이웃사촌의 정이 이런 것인가! 덕을 쌓으며 살고자 하셨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아버지 어머니께 전해져 그렇게 살아온 성적표일 것이다.
고향 마을의 인상은 이렇게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빈한했지만 서로 정을 나누며 살았을 어른들의 삶이 존경스럽게 찾아왔다. 난생 처음 아버지 성묘를 하고나서 복받치는 감정을 달래기 위해 음복주를 어머니와 나누어 마시고 나니 사무치는 감정으로 인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어지간해서 울지 않았던 나였지만 그 순간만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를 부르지 못하고 이제야 묘소 앞에 꿇어앉아 아버지라 부르는 회한의 눈물! 내 자신을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게 해준 어머니의 처절한 삶에 대한 죄송함! 아! 나는 어떻게 살아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

40여 년 전의 아련한 추억

고향 마을 노적봉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적봉 아래 초라한 생가는 그래도 남아 있었다. 너무도 초라했다. 그곳에서 지아비 없이 어머니는 나를 낳으셨다. 그리고 아버지 대신 나를 업어주었던 희미한 기억속의 아저씨(상텃양반)를 처음 뵈었다. 그분은 6·25때 얼굴과 다리에 총상을 입어 입이 돌아가고 다리를 절고 계셨다. 이 분도 외지에서 노적 마을로 들어오신 분으로 아버지와 함께 지은 집에서 나보다 어린 자녀들을 낳아 키우고 계셨다. 그 집의 큰 아들이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 이기봉 목사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이 목사를 친형제처럼 생각한다.
노적마을을 어머니는 노적미(뫼)로 부르셨다. 노적봉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필자의 생가는 그 노적봉 바로 아래에 우측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작고하신 고(故) 고광충 형님은 “자네는 노적봉 정기를 받고 태어났으니 잘 될 거야”라고 고등학교 시절 처음 만날 때부터 말씀하시며 격려하셨다. 그리고 풍수적으로 부안의 제일명당이라는 자부심을 노적마을 어른들은 갖고 계셨다. 뒤에 어른들께 들은 얘기지만 부안에서 명당을 논할 때 옹정 분들은 ‘1옹정 2노적’이라 하고 노적 분들은 ‘1노적 2옹정’이라 하며 서로 자기네 지역이 명당 터이고 살기 좋은 곳이라 논쟁했다고 한다. 어떻든 노적마을이 부안지역에서는 내놓으라하는 명당 터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명당 터가 아니더라도, 노적마을은 고향이기에 필자에게는 숙명적인 곳일 수밖에 없다. 고향을 떠나고 철들어 처음 방문한 이후 매년 추석 무렵이면 성묘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여 사회인이 막 되었을 때 양복을 입고 생가 앞에서 찍은 사진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를 모시고 한 지붕아래 살았던 이웃 아저씨(상텃양반)와 아주머니 그리고 그 집의 1남 2녀 동생들과 찍은 사진이 40여 년 전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김인술(온생명영농조합법인 온생명평생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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