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동농장, 그 지극한 삶

아! 나는 그렇게 시골에 왔다.

부안군 주산면 백석리 예동(禮洞). 이곳에서 양계농장을 시작한 지 올해로 만 9년이 되었다. 햇수로는 10년! 10년이 이렇게 짧은 시간이었나 싶을 정도로 지나간 기억이 선명하다. 바로 엊그제처럼 말이다.
사실 나는 시골을 무척 싫어했다. 평생 논농사, 밭농사로 고생하셨던 친정 부모님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고생하며 농사일을 해야 하나, 다른 일을 하면 저 고생의 반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부모님을 답답하게 생각했었다. 결혼하면 절대 시골에서 살지 말아야지, 절대 농사는 짓지 말아야지 하면서.
남편은 6남매의 외아들인데 시부모님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우리는 시댁으로 들어왔다. 아! 나는 그렇게 싫어하던 시골에 살러 온 것이었다. 그게 15년 전 일이다. 아파트에서 살다가 시골 주택으로 이사 오니 처음에는 모든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다. 댈 수도 없게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하루가 다르게 적응이 되면서 익숙해졌다. 오히려 점차 아파트에 살 때 불편했던 점이 떠올랐다. 사람 좋아했던 나도 그때는 사람을 경계했었다. 올 사람이 없는데 벨이 울리면 없는 척하고, 복도에서 사람소리가 들리면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려 문단속하며 현관문 한번 열어놓고 있어본 적이 없었다. 동네 사랑방처럼 언제나 사람이 들끓던 친정집이라 어려서부터 사람 북적거리는 것이 당연한 환경에서 살았는데도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이 와서 길을 물어도 좋았고, 문단속도 해 본적이 없으며 심지어 대문도 없는 이 집에서 나는 진심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아파트를 좋아했던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막연한 동경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안 것이다. 아마도 나에게는 흙냄새를 맡아야 편안해지는 DNA가 심어진 듯하다. 하긴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흙이었다’고 농담할 정도로 나는 흙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걸음도 걷기 전부터 밭에서 개미들과 친구하며, 풀과 놀았으니 그때 집어먹은 흙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내면의 소리를 무시한 채 도시만 동경하다 이제는 사람은 흙에서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시골예찬론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모른다.

 

예동은 젖소농장이 많은 동네

이 동네는 ‘예동’보다 ‘안여술’이라고 많이 부른다. 도대체 여술은 무슨 뜻일까 궁금해서 동네 어른들께 여쭤 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옛날부터 그렇게 불렀다고만 했다. 재작년에서야 나는 ‘여우실’을 연음화해서 여술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안읍 신흥리 예동은 밖여술, 주산면 백석리 예동은 안여술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보통 밧여술, 안여술로 부르는데 도로명 주소로 바뀌면서 밖여술길은 있지만 안여술길이 없는 것은 매우 아쉽다.
예동은 유난히 젖소농장이 많은 동네다. 우리 집도 그중에 하나였다. 시아버님은 굉장한 멋쟁이에 호인이셨는데 40대부터 뇌경색 증상으로 일을 잘 못 하셨단다. 그런 사정으로 시어머님은 억척스럽게 남자 일을 대신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처음 젖소 5마리로 시작해서 무려 15번이나 고치고 늘려서 농장을 키웠는데 허리가 굽고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정리했다고 했다. 그때 어머님은 세상이 끝나는 줄만 알았다고 회상하신다. 나라면 못해냈을 삶을 살아내신 어머님을 인생의 선배로서, 같은 여자로서 존경한다.
2000년 4월 결혼했을 때 정리한지 5년쯤 된 빈 농장을 보면서 나는 무척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어머님의 고생담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경험할 기회가 없었으니 말이다.
결혼하고 3년 후 아버님은 뇌졸중이 더욱 악화되어 침대에 누운 환자가 되었고 우리가 시댁에 들어간 계기였다. 그리고 또 4년이 지나 혈관성 치매까지 온 아버님과 태어날 아이까지 아이가 셋이나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뭔가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느꼈던 것 같다. 남편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양계농장을 짓다

처음 양계농장을 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물론이고 주위의 지인들은 10명 중에 8, 9명이 반대를 했었다. 양계농장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농장주들을 만나보니 괜찮으니 해보라는 분도 있었고 너무 힘들다고 절대 하지 말라는 분도 있었다. 잘 되는 농장과 안 되는 농장의 차이점은 무엇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농장을 운영할 것인지,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은 것을 고민했고 그것은 시작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일도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빔을 세우고 두꺼운 판넬을 붙이고 높은 지붕을 올리는 과정을 보면서 사람들은 닭 키우는데 무슨 건물을 저렇게 거창하게 짓느냐고 했다. 하우스대로 지어 부직포를 덮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던 그때는 그랬다.
예전 방식으로는 질병에 취약하고 사양관리도 힘들어 앞으로는 이런 건물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 거라는 믿음으로 꿋꿋하게 밀고 나갔다. 집안 사정상 나는 같이 일을 할 수 없었고 남편 혼자 하려면 현대화된 시설은 더욱 중요했다. 젖소 농장을 헐고 직접 자재를 사다가 양계농장을 지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같이 배우면서 농장을 지었다.
드디어 2008년 3월 3일.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이었고 셋째아이가 태어난 지 2주째였다. 우리 가족의 새로운 희망과 설렘을 안고 농장에 병아리가 들어왔다. 지금은 육계(치킨집 닭이나 마트에서 파는 일반 닭)를 키우지만 처음에는 종계(외국에서 가져온 종자닭으로 이 닭이 낳은 알이 부화장에서 부화해 육계농장으로 간다)를 키웠다. 종계는 병아리를 6개월을 키워야 알을 낳는데 이후 9개월간 알을 낳다가 폐계가 된다. 병아리가 들어와서 15개월이 지나야 한 과정이 끝나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살아있는 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세심한 관심과 끝없는 보살핌이 있어야 한다. 남편은 강해보이는 겉모습에 비해 마음이 무척 약하다. 집에서 개를 키우면 묶여있는 꼴을 못 본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개를 잘 풀어 놓지 않는데 농작물을 망치기도 하고 동네 골목까지 차가 다녀서 교통사고의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가 뛰어 다니고 싶다는 눈빛으로 자기를 쳐다본단다. 그 눈빛이 안쓰럽다고 풀어줬다가 앞집 아주머니가 성화를 대서야 다시 묶어놓기도 했는데 어느 날 나갔던 개가 교통사고를 당했는지 나쁜 마음으로 누가 데려갔는지 모르지만, 집에 들어오지 않은 이후로 개는 안 키운다. 그런 사람이 주먹보다 작은 동물을 돌봐야하니 얼마나 신경이 쓰였을까.
모든 것이 처음이라 몸으로 부딪히고 익히면서 경험을 쌓아 갔다. 처음 병아리가 들어온 날부터 일주일간을 농장 안에서 사료포대를 깔고 병아리들과 같이 쪽잠을 잤다. 그때는 하루 24시간 동안 화장실가고 잠깐 쉬는 시간 빼면 농장 안에서 살았다. 살이 쭉 빠져 바지가 헐렁거려 못 입을 만큼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15개월간 쉬지 않고 예민하게 반응하고 신경써야하는 일은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육계로 바꾼 이유였다. 육계는 일 년에 다섯 번에서 여섯 번을 키우는데 입추에서 출하까지 짧게는 30일에서 길게는 35일이 걸리기 때문에 집중할 때와 쉴 때가 나뉘어 남편에게 더 잘 맞았다. 사람도 어릴 때가 더 중요하듯이 육계도 입추 이후 열흘 동안의 사양관리가 중요하다.
어릴 때 사양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출하시기에 닭의 건강상태가 달라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젊고 건강한 종계가 낳은 병아리는 그렇지 않은 병아리에 비해서 활력도 좋고 건강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막상 키워서 출하할 때 보면 별 차이가 없었다. 적어도 예동농장에서는 입추 때 병아리 상태를 따지는 일은 없다. 그만큼 그 후의 사양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육계농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환기량과 온도를 맞춰주는 일이다. 이산화탄소는 배출시키고 산소가 적절하게 들어오게 하는 환기는 입추에서 출하까지 전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다. 환기량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도 질병으로 연결되어 생산성이 떨어진다. 닭은 기초체온이 40도가 넘기 때문에 더욱 환경에 민감하다. 적정하게 환기를 시켜주고 열풍기를 이용해서 적절한 온도를 맞춰주는 일은 쾌적한 농장 환경을 만드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자동화 시설이라서 타이머만 맞추면 되지만 그 적절한 시간은 온전히 농장주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 닭은 바닥에 배를 대고 생활하기 때문에 바닥 상태도 굉장히 중요하다. 처음 몇 달은 바닥에 깔려있는 왕겨의 습기 상태나 바닥 온도를 느끼기 위해서 맨발로 농장 안에서 일을 했다. 온도나 바람의 유속을 느끼려고 마스크도 써본 적이 없다.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몸으로 느끼며 농장안의 온도나 습도의 적정량을 알아갔다.

 

저녁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재운다!

그 당시 대부분의 농장들은 하루 24시간 불을 환하게 밝혀 닭을 깨어있게 했었다. 쉬지 않고 먹고 계속 크라는 의미다. 24시간을 사료를 먹이고 질병은 약으로 해결하는 악순환의 연속인 상황. 약을 많이 쓴다는 것은 비용의 문제도 있지만 사람이 먹는다는 개념으로 생각해도 문제였다. 그렇다면 면역력이 높아지면 약을 덜 써도 되지 않을까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밤에 재우기로 한 것이다.
농장들이 잘 시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농장 내 전등 자동타이머를 저녁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꺼지게 맞춰놓고 꼬박 10시간을 재웠다. 그렇게 10시간을 쉬게 하니 닭은 더 건강해졌다. 약값도 거의 들지 않았다. 지금은 다른 농장들도 5~6시간은 재운다고 한다. 우리는 10시간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 육계농장에서 사료 요구율이 높으면 생산성이 떨어진다. 즉, 닭이 아무리 크고 건강하게 컸어도 사료를 많이 먹었으면 수익이 낮아진다는 뜻이다. 하루 10시간을 재우고 먹는 시간은 줄였는데도 일령에 맞는 기준 수치보다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우리에게는 감사한 일이다.
지금은 HACCP 인증도 받고 무항생제 농장을 운영 중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도 항생제는 별로 써본 적이 없다. 바닥에 깔아주는 왕겨도 많이 쓰지 않는다. 출하하고 나면 바닥왕겨를 전체 다 걷어내지 않고 하우스키퍼 작업으로 덩어리진 것만 걷어내고 부드러운 왕겨는 남게 한다.
그것을 다시 소독하고 재활용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부족하다 싶을 때만 보충해 준다. 약값이나 왕겨 값 등 농장에서 발생되는 경비를 최소화하니 무리하게 많은 수의 병아리를 넣지 않아도 되었다.
출하할 때 닭을 차에 싣는 일을 하는 분들이 말하길 “이 농장 닭들은 힘도 좋고 활력이 넘친다”고 한다. 닭이 한쪽으로 몰리면서 밑에 깔리는 약한 놈들은 죽기도 하는데 그런 닭이 없는 농장이기도 하다.

 

“일이 없으면 건강하게 크는 것”

농장관리사에는 컨트롤박스가 있다. 농장 안 CCTV, 고온이나 저온일 때 울리는 경보장치, 정전일 때는 자가발전기가 자동으로 작동하는 시설이 되어있다. 모든 기계시설이 그곳에 있어서 놀아도, 쉬어도, 잠을 자도 농장관리사에 있어야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닭처럼 예민하고 민감한 동물이 있을까. 환기량이나 온도가 조금만 안 맞아도 질병에 걸리고 전기 공급이 10분만 끊어져도 다 죽게 되는 민감한 동물이다. 남편이 농장관리사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아이들과의 시간도 늘리고 가족과 함께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직원을 두었다. 남편이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직원이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난다. 전에 있던 농장에서 잘한다는 칭찬도 듣고 나름대로 요령도 생겨 자신 있게 왔는데 전혀 적용이 안 된다고 힘들어 했다. 항생제를 안 쓰는 것부터 10시간이나 재우는 것, 하다못해 할 일이 없다고 힘들어 했다. 자기 월급 10만원 깎고 그 돈으로 약 사먹이자고 했던 사람이니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싶다.
예동농장에서는 일이 많을수록, 힘들수록 닭은 잘못 크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기계실에서 모든 일이 해결되고 안에 들어가서 하는 주된 일은 상태가 안 좋거나 폐사된 닭을 꺼내는 일이다. 또 왕겨를 보충해서 깔아줘야 할 때가 있는데 바닥이 질어졌을 때다. 이때는 수시로 왕겨를 깔아줘야 해서 일이 무척 힘들어진다. 그래서 직원한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은 질병이 있거나 폐사가 많다는 뜻이고 일이 없다는 것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는 뜻이니 일이 없으면 좋은 것이다.”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은 남편을 존경하는 팬이 되었고 마음을 나누는 동생이 되었다.

 

“정성을 다하면 세상이 변한다”

20대부터 좋아하던 글귀가 있다. 나도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얼마나 벅차던지. 지금은 우리 부부의 인생의 글귀로 삼고 있다.
『중용』 23장에 나오는 글귀로, ‘其次 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이다. 영화 「역린」에서 인용돼서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 같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의역하면,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진다.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농장을 시작하면서 조언을 구했던 20년, 30년 경력의 농장 선배들이 자문을 구하러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10년 만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나는 남편이 자랑스럽고 남편은 나를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해주니 서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닭을 키우면서 철이 들어 인생을 알아가고 서로 성장했다. 삶의 방향성을 함께 공유하고 고민하며 서로에게 따끔한 조언자, 최고의 지지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더불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을 선택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리라 다짐해 본다. 다시 10년 후 더 성장해 있을 우리 부부, 그리고 예동농장의 미래를 그려본다.

 

/김미경(농장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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