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굴비(靜州屈非)’

 

▲영광굴비의 고장 법성포

이자겸과 굴비(屈非)

고삿상에 북어가 필수라면 제사상에는 조기가 필수다. 그런데 서해에 그 많던 조기 씨가 말라 구경하기가 좀처럼 어렵다. 그러기에 조기는 금값이 되어 서민들은 명절 때 외에는 조기 맛보기가 어려워졌다. 거기에 더하여 가짜에 수입납조기에 불량상혼이 판을 쳐 우리네 밥상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다. 이제는 조기가 제사를 받아야 할 판이다.

조기를 중국에서는 석두어라고 하며, 우리나라 “동국여지승람”에는 석수어(石首魚)라 기록되어 있고 진공편에는 굴비라고 기록되어 있다. 굴비(屈非)라는 이름이 붙은 데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고려 11대 문종으로부터 17대 인종까지의 80여 년간 경원 이씨는 누대의 외척으로 세력을 떨쳤다. 그 가운데 이자겸은 그의 둘째 딸이 예종비로 들어가 원자를 낳자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예종이 죽자 자기 집에서 성장한 14세의 외손을 인종으로 즉위시키면서 더욱 큰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후, 이자겸은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한편,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비로 들여 중복되는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독차지 하였다. 이자겸의 전횡이 심해지자, 마침내 인종도 그를 미워하게 되었고, 이를 알아차린 인종의 측근이 이자겸의 제거를 꾀하다가 오히려 이자겸과 척준경에 의해 역공을 당하게 되었다. 궁궐을 불태우고 반대파를 제거한 이자겸은 왕위까지를 넘보게 되었는데, 최사전(崔思全)이 이자겸 일당인 척준경을 매수하여 체포한 후 정주(靜州)로 유배시켰다.

정주 땅은 칠산바다를 끼고 있는 지금의 영광 법성포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봄가을이면 조기떼가 몰려와 칠산바다를 뒤덮었었는데, 그 당시는 오죽했겠는가. 이자겸은 이곳 정주에서 유유자적하며 조기의 진미를 맛 본 것이다. 석수어라 해서 진공해온 것을 먹어보긴 했으나 소금에 절여 말린 것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자겸은 한 생각을 떠올렸다.

‘정주굴비(靜州屈非)’

이 네 글자를 건석수어에 써서 임금에게 진상했다. 정쟁에 밀려 비록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결코 굴하거나 꺾이지 않겠다는 뜻을 이러한 방법으로 임금에게 전했던 것이다. 이를 맛본 임금 인종은 ‘이것이 정주굴비인가’ 했을 뿐이었다. 이자겸의 ‘정주굴비’의 뜻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인종은 정주굴비를 해마다 보내라고 진상품목에 추가시켰다. 옛 문헌에도 나오는 ‘굴비(屈非)’라는 이름은 이렇게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정주는 지명이 영광으로 바뀌고 영광굴비는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잇고 있다.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3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