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섣달 꽃 본 듯이…” – 동백꽃

 

엄동설한…, 동지섣달에 꽃을 볼 수 있다니…,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동백꽃 이야기다. 다른 나무들은 활동을 멈추고 겨울나기에 여염이 없는데 동백은 눈 속에서 붉디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차나무과의 상록활엽교목인 동백나무는 따뜻한 남쪽지방에서 주로 자생하나 해안을 타고 동쪽으로는 울릉도까지, 서쪽으로는 고창 선운사에서 큰 숲을 이루고 변산반도를 거쳐 대청도까지 북상해 분포하는데 변산의 양지쪽 동백들은 벌써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겨울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동백冬柏나무를 겨울나무, 또는 한사寒士라고도 한다. 가난한 선비에 비유한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벌, 나비도 없는 한 겨울에 꽃을 피웠는데 어떻게 수분을 한담? 자연의 조화는 오묘하다. 새의 힘을 빌린다. 새의 이름도 동박새다. 동박새는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꽃가루받이를 돕는다. 이런 이유로 동박새를 조매화鳥媒花라고도 한다. 새는 그 대가로 동백꽃으로부터 꿀을 얻는다. 동백꽃이 유난히 붉은 이유도 곤충과 달리 새가 붉은 색을 잘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분을 끝낸 꽃들은 통째로 뚝 뚝 떨어진다. 꽃잎이 시들거나, 꽃잎 한 장씩 떨어지는 다른 꽃들과는 사뭇 다르다. 시인들이 이 대목을 놓칠 리 없다. 아래에 부안이 낳은 목가시인 신석정의 시 한 수를 소개 한다.

氷河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너머로 꿈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소리
파도소리 붓어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년 지구와 주고 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面紗布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 소리와
뚝 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 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대어 몇 번이고 소근거려도
가고 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다 우리 상처입은 옷자락을
갈갈이 스쳐갈 바람결이여

생활이 주고 간 火傷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 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心腸도 氷河되어
남은 피 한 천년 녹아
철 철 철 흘리고 싶다.

/신석정
<1954.1>
시석정 시집 氷河/1956.11.30 발행/민음사



동백꽃 하면 동백기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동백열매는 삭과(殼果)로 9-10월에 굵은 밤알만하게 익는다. 열매는 3실로 되어 있는데 이 안에 검은 갈색의 씨가 들어 있다. 이 씨로 짠 기름이 바로 동백기름이다. 동백기름은 맑디맑은 노란색을 띤다. 방치해두어도 증발하는 일이 거의 없고, 또 변하지도 않는 고급기름이라고 한다. 각종 요리에 쓰이고, 정밀한 기계에 치기도 하고, 또 예전에는 호롱불을 켜기도 했다. 허지만 뭐니뭐니해도 동백기름하면 여인들의 머릿기름으로 유명하다. 윤기나고 단정한 옛 여인들의 삼단 같은 머릿결이 떠올려진다.


/허철희(2008·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