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지킴이 신을 섬기는 민간신앙(11)
지난 1999년 4월 8일 상서면(上西面) 개암동 위금산성(位金山城) 아래 개암호의 만수로 넘치는 수문 앞에서는 길이 6.5m, 폭 2.1m 크기의 거대한 용신기(龍神旗 : 또는 용당기)를 세워놓고 상서농민회원들이 풍년을 기원하는 통수(通水)의 굿판을 벌렸다.
용신기의 깃발에는 한 마리의 청룡이 여의주(如意珠)를 희롱하며 구름을 헤치면서 하늘 높이 오르는 모습을 그렸는데 마치 개암호 짙푸른 용궁으로부터 방금 뛰처나온 것이나 아닌가 하리만큼 생생한 용 그림이였다. 이 그림은 1936년에 부안의 오당(梧堂) 조중태(趙重泰) 화백이 그린 것을 저본(底本)으로 주산면의 박홍규 화백이 그렸다고 한다. 조중태가 그린 이 용신기의 원본은 지금 동진면 장신마을에 보존되어 있다.
용은 물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이며 풍운을 몰고 다니는 기상의 신이요 사령(四靈 ;용.봉황.기린.거북)의 우두머리로 최고 권위의 상징이지만 예로부터 농업의 신으로 받들어 온 농업의 신이었다.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서면(上西面) 농민회원들이 한해의 농사일을 시작하는 시농(始農)의 의식을 겸한 물내림(通水)의 행사로 개암호 깊은 물에 서의(棲依)하고 있을 물의 신 농업의 신인 용신에게 우순풍조(雨順風調)와 제액진경(除厄進慶)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농민들의 협동 단합을 다짐하는 한마당 굿놀이 판의 축제를 연 것은 이와 같은 우리 겨레 기층문화에 바탕한 것으로 이 지방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농경축제문화의 재생적인 시도였다고 보아 잊어버린 우리 것을 되찾은 듯 흐믓 하였다.
이날 많은 농민들과 기관장들이 풍물굿패와 하나 되어 푸른 물 넘치는 개암호반에서 용그림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점안식(點眼式)에 이어 용신기 밑 제단에 향 피우고 용신에게 술잔 올리며 절하고 풍년을 기원한 시농(始農)의 굿판을 벌렸다. 이와 같은 용신제는 우리 민간신앙의 하나다. 우리 겨레는 다양한 민긴신앙을 행하여 왔다 물의 신이요 농업의신인 용신을 받드는 일은 그 중에서도 생활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신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용은 봉황, 거북, 기린과 함께 옛날부터 상서로운 동물인 사령(四靈)의 하나로 여겼다. 그래서인지 우리 부안지방의 땅이름에만도 용(龍)자가 든 이름이 18개나 보인다. 뿐만 아니라 궁궐의 지붕, 사찰의 법당과 처마, 스님들의 부도, 사대부나 높은 벼슬아차들의 묘비 등에도 용을 그리거나 새겼으며, 미술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의류, 문방구류, 장신구 등에도 용문(龍紋)은 제각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새겨져 있어 우리 겨레는 먼 옛날부터 용을 신성시하는 다양한 용문화 속에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용은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그럼에도 용은 우리 문화 깊숙이 고급스럽게 파고들었다. 용은 우선 권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최고의 권력자인 제왕(帝王)을 상징한다. 용은 제왕을 상징하기에 임금의 얼굴은 용안(龍顔)이요, 앉는 자리는 용상(龍床)이며, 입는 옷은 용포(龍袍)라 하고, 임금이 흘리는 눈물은 용누(龍淚 : 용의 눈물)요, 임금이 타고 다니는 수례는 용여(龍輿), 용거(龍車)라 했다. 또 등용문(登龍門)이라는 고사성어는 우리들이 흔히 쓰는 말로써 뜻을 이루어 크게 출세한다는 말로 입신출세를 뜻하는 말이지만 원래는 중국의 황하(黃河) 중류 산서성(山西省) 하진(河津)의 서북에 있는 급한 여울목의 이름인데 잉어가 이 여울목을 뛰어 오르면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 하여 생겨난 말로 출세의 길에 올랐다는 뜻이다.
우리 민속에서 용은 농업의 신으로 농사의 풍(豊)․흉(凶)을 좌우하는 영물로 여겨 왔다. 용생구자(龍生九子)라 하여 아홉 종류의 용이 있다는데 특히 날아다니는 응용(應龍:또는 청룡)이 구름과 비바람을 몰고 다닌다고 믿어 날이 가물면 용이 깃들어 있다는 용소(龍沼)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우리 부안의 옛 읍지(邑誌)에 의하면 곰소와 직소폭포의 용소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관개(灌漑) 수리시설이 거의 없었던 옛날에는 하늘만 쳐다보며 농사를 지었으므로 날이 가물면 용신에게 기우제를 지냈는데, 용그림을 그려 놓고 지냈다는 최초의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진평왕 50년 조에 보인다. “여름에 크게 가물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오기를 빌었다.(夏大旱移市 畵龍祈雨)”, 그리고 《태종실록(太宗實錄)》 21권 신묘 11년(1411년) 6월 21일 신사(辛巳)조에도 가뭄이 심하여 “종묘 사직과 백악, 목멱, 한강, 북교(北郊)에 제를 지낼 때 검교참의 최덕의(崔德義)를 시켜 양진(楊津)에서 화룡제(畵龍祭)를 지내게 하였다” 하였으며, 세종실록(世宗實錄)에도 용그림을 그려 세우고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여러 곳에 보인다.
중국의 옛 지리서《산해경(山海經)》의 <대황동경(大荒東經)>편에 의하면 “대황(大荒)의 동북 쪽 모퉁이에 흉여토구(凶黎土丘)라는 산이 있는데 응용(應龍)은 이 산의 남쪽 끝에 산다. 치우(蚩尤)와 과부(夸父)를 죽이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계(下界)에 자주 가뭄이 들었는데 응용의 모습을 만들면 큰 비가 내렸다” 하였다. 이로 보아 용그림을 그려 우순풍조를 축원하는 용신제의 용당기 용은 응용을 뜻하며, 이를 우리는 흔히 청룡(靑龍)이라 한다.
농경사회(農耕社會) 시절의 우리 농촌에는 세 네 개의 마을을 한 단위로 하여 그 중심 마을에 용신기가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가뭄이 심하면 이들 마을 사람들이 용신기 아래 모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니 용신기는 이들 마을의 공동신앙체인 셈이다. 1970년대 말경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동진면 장신리, 부안읍 서외리, 행중리, 상서면 청등리 등에 용신기가 있었던 마을로 확인되었다. 지금은 유일하게 장신리에만 1936년에 오당(梧堂) 조중태(趙重泰)라는 화가가 그린 용신기가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청룡이 붉은색 여의주(如意珠)를 물었다 토했다 희롱하며 구룸을 헤치며 하늘 높이 오르는 형상의 이 용그림을 보노라면 우주의 무한함과 오묘한 섭리를 느끼게 하면서 용신이 실지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을에서 용신기를 공식적으로 밖에 내어 꽂는 일은 정초와 칠월 백중날 두 차례였다. 정초에는 이웃 마을의 농기(農旗)들이 형님 마을의 용신기에게 기세배(旗歲拜)를 하려 오기 때문이며, 백중날은 농사일이 끝난 “호미씻기 날” 이어서 용신기를 세워 놓고 풍년을 구가하는 놀이판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옛날의 농촌에서는 용신기가 있는 마을이 어른 마을이요, 중심 마을이었다. 아무리 양반이 많이 사는 반촌(班村)이라도 마을의 좌상(座上)이 풍물굿을 이끌고 용신기가 있는 마을로 기세배를 드리러 간다고 한다. 마을에는 자율적인 농민조직이 있어 가장 어른인 지도자를 좌상(座上)이라 하고, 좌상을 도와 일을 집행하는 사람을 공원(公員)이라 하였으며, 청년층을 대표하는 사람을 소좌(小座) : 수머슴)라 하였다. 이 농민조직의 위계질서와 규율은 매우 엄격하였다 하며,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위계질서나 강상(綱常)을 문란하게 하는 사람은 좌상의 명에 의하여 벌을 받았으며, 때에 따라서는 버드나무 곤장으로 볼기를 쳤다고 한다. 장신리 용신기 한쪽에는 당시 마을 조직의 임원들 이름이 밝혀져 있다.
상서(上西) 농민회에서 우리 겨레문화의 뿌리에 바탕을 둔 농경문화(農耕文化)를 오늘에 맞게 재생하여 한마당 풍농의 축제로 승화(昇華)시킨 개암호반(開岩湖畔)의 용신제(龍神祭)는 겉치레와 낯내기, 그리고 국적불명의 문화행사에 식상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오랜만에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할 것이다.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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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06·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