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등의 육상생태] 왕등도에서 만난 들꽃

 

▲왕등 산 정상에 올라ⓒ부안21

왕등도에는 어떤 식물들이 살고 있을까? 9월12일 왕등도 탐방 첫째날, 일행들은 섬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며느리밑씻개가 지천으로 피어 우리 일행을 반긴다. 며느리밑씻개 사이사이에서 “나도요‘ 하며 닭의장풀, 가막사리, 한련초도 얼굴을 내민다.

환삼덩굴이 간재선생유허비 주변 언덕 일대를 우점한 채 며느리밑씻개, 닭의장풀 등을 꽤나 못살게 굴며 타의 접근을 불허하는 태세다. 생명력이 강하기로는 이 환삼덩굴을 따를 식물이 없어 보인다. 어떤 이는 이 환삼덩굴이 있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때문에 자연이 그나마 좀 보존된다며 환삼덩굴의 순기능적 역할을 역설하기도 한다.

▲며느리밑씻개ⓒ부안21
▲한련초ⓒ부안21
▲닭의장풀ⓒ부안21
▲가막사리ⓒ부안21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샘은 여전히 물이 흘러넘쳤다. 퍼내도퍼내도 그만큼. 마을사람들 얘기로는 삼년가뭄에도 끄떡없을 거라고 한다. 그러기에 한때 이 마을에 300명 넘게 북적거렸어도 물걱정은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이 마을사람들의 생명수인 셈이다.

예전에 허물어져가던 폐가들은 다 허물어내 마을이 말끔해졌다. 손바닥만한 공터마다에는 채소가 심어져 있다. 예전에 온 마을을 뒤덮던 전호는 중국산에 밀려나 이젠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마을 샘가에서 만난 마을 주민 한 분은 “왕등도 전호를 알아주었지…”하며 못내 아쉬워한다.

마을 뒤편 언덕에 올랐다. 능구렁이 한 마리가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다가 우리에게 들키고 만다. 능구렁이치고는 꽤 큰놈으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아주 건강해 보이는 놈이다. 그렇잖아도 “왕등에 뱀이 삽니까?“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능구렁이와 조우하고 보니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마을사람들에게 능구렁이 본 이야기를 했더니 “그 좋은 것을 왜 살려줬냐?”는 눈치다.

▲능구렁이ⓒ부안21

용문암을 둘러볼까 했으나 물때가 맞지 않아 내일로 미루고 용문암 남쪽해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는 동안에 살펴보니 대략, 으아리, 누리장나무, 닭의장풀, 며느리밑씻개, 억새, 여뀌, 까마중, 냇씀바귀, 골풀, 어저귀, 꽈리, 개머루, 갈퀴꼭두서니, 자리공, 사데풀, 명아주 등이 눈에 띈다. 명아주는 어찌나 큰지 누군가 “지팡이 만들면 좋겠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다른 식물들도 눈에 띄지만 이름을 모르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시누대를 헤치고 천야만야한 해안가 벼랑에 당도했다. 무릇은 이미 졌는데 어쩌다 한두 구루가 아직 피어 있다. 조금 일찍 왔더라면 기암절벽과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건질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흙이라고는 한 톨 없는 바위에 옹색하게 뿌리를 박고 있는 강아지풀은 열악한 환경 때문인지 15cm 정도로 키가 아주 작다.

바위 절벽 곳곳에 옹색하게 포기를 내린 해국들은 아직은 꽃피울 생각을 않고 있고, 벼랑 위에 핀 등골나물이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 모델이 되어 준다. 방동사니인지 매자기인지, 아니면 세모고랑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식물 역시 강아지풀처럼 낮게 자라며 왕등환경에 적응돼 있다.

▲등골나물ⓒ부안21
▲갈퀴꼭두서니ⓒ부안21
▲사데풀ⓒ부안21
▲방동사니ⓒ부안21

▲강아지풀ⓒ부안21

▲무릇ⓒ부안21
▲개머루ⓒ부안21
▲여뀌ⓒ부안21
▲으아리ⓒ부안21

▲갯까치수영ⓒ부안21
▲어저귀ⓒ부안21
▲꽈리ⓒ부안21

마침 날씨가 청명해 왕등의 해넘이도 감상할 겸 산 정상(해발 240m)에 오르기로 했다. 해발 240m라면 내륙지방에서는 그리 높은 산이 아닌데 섬이라서인지 높아만 보인다. 다행하게도 산 정상까지는 이동통신사에서 기지국 건설할 때 길을 내 그런대로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굽이굽이 산을 오르면서 살펴보니 멀리에서는 민둥산으로 보였던 산의 서쪽비탈에는 산닥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북쪽비탈에는 누리장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물론 모진 바람 탓에 키들은 낮다. 산 정상은 온통 억새밭. 정상에서 내려다 본 동남쪽(마을쪽) 비탈은 동백, 팽나무, 포리똥나무(현지어)들이 띄엄띄엄 숲을 이루고 있다.

▲누리장나무ⓒ부안21
▲산 정상의 억새밭ⓒ부안21

마을사람들 이야기로는 지금이야 산에 나무가 있지만 나무를 땔감으로 쓰던 시절에는 섬 전체가 “빡빡머리 민둥산이었다.”고 한다. “지금이사 그럴 일이 없지만(가스를 쓰니까), 나무 땔 때는 가실(가을) 되면 산 벳끼(벗기는)는 것이 일이여. 육지에서 추수하는 것맹키로 여그는 마을사람들이 다 달려들어 몇날며칠을 산소 벌초하듯기 산을 몽땅 벗겨다 집 뒤안에 집채보다 더 큰 나무배늘을 쌓아놓지. 그래야 바람도 막아주고 또 시한(겨울)을 나지…” 산을 벗긴다는 표현이 실감난다. 변산같은 산중마을도 그 시절엔 모든 산이 민둥산이었는데 이 좁은 왕등이야 오죽했으랴.

땔나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 시절, 필자가 나서 자란 변산면 마포리의 경우, 봄, 가을이면 성천포구에 왕등도 배가 들어온다. 봄에는 주로 옹기를 실어가고, 그렇게 실어간 독으로 여름내 젓을 담가 가을에 싣고 다시 성천으로 나온다. 그럴때면 성천포구는 저자거리보다 더 붐비게 되는데 집집마다 이때를 기다려 장작이나 곡식을 주고 젓 한 동이라도 들여놓아야 1년을 날 수 있었다. 곡식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장작은 배에서 밥을 지어 먹어야 하니 왕등사람들에게는 곡식 다음으로 요긴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왕등도 노병렬 노인에게 했더니 “암 그때는 그랬지. 여러 가지로 여건이 맞은 게 배를 성천에 댔던 것이여. 마포 근방에 옹기골이 많았고, 그러고 배 대기도 좋고… 그래서 왕등배들은 한동안 성천으로 왕래했었지…” 이 노인의 이야기는 마포 어른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왕등도 탐방 이튿날인 13일 오전에는 왕등이 감추고 있는 제일의 비경 용문암을 둘러보았다. 조수가 밀려나자 바위에는 홍합, 거북손, 검은큰따개비가 밭을 이루다시피 다닥다닥 붙어있는 바위지대가 드러난다. 이를 보고 일행 한 분은 “이 홍합만 따먹어도 왕등사람들 굶어죽지는 않겠다.”며 감탄한한다.

이번 여행에서 하왕등도를 탐방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동서로 길게 누운 하왕등도는 남북으로 누운 상왕등도에 비해 생태환경이 좀 더 나은 편이다. 아무래도 상왕등보다 바람도 덜 맞고, 햇볕도 많이 받으니 그럴 것이다. 특히 하왕등도 남쪽은 먼발치로 보아도 숲이 제법 울창하다. 마을도 남쪽 숲 속에 앉혀져 있다. 지난 99년 방문 때 보니 포리똥나무, 산닥나무, 동백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내년에는 다달이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계절별로는 왕등을 찾으리라 다짐하며 왕등을 떠나왔다.


/허철희(2007·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