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리 마을의 지킴이 신 모시기-우동리당산제

 

마을지킴이 신을 섬기는 민간신앙(8)
우동리 마을의 지킴이 신 모시기<1>

▲우동리 당산제ⓒ부안21

우동리 마을의 역사와 문화

보안면(保安面) 우동리(牛東里)는 우리 부안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역사․문화가 거의 원 형태로 남아 있는 뿌리 깊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양반문화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조선조시대 약 450여년에 걸친 부안김씨(扶安金氏)들의 고문서(古文書)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그 일부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韓國精神文化硏究院)에서 1983년에 《고전자료총서(古典資料總書)》 83-3호로 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고문서들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900호로 지정하여 보존각을 지어 보존 전시하고 있다.

이들 고문서들의 자료 내용은 문과(文科) 급제자에 주는 홍패(紅牌)와 생원(生員) 진사시(進士試) 합격자에게 주는 백패(白牌)를 비롯하여 4품관 이상에 임명될 때 받는 임명장인 교지(敎旨)들과 교첩(敎牒), 그리고 중앙관서나 지방관서에서 발행한 차첩(差帖), 호구단자(戶口單子), 소지류(所志類), 원정(原情), 통문(通文), 노비문서(奴婢文書), 토지문기(土地文記), 백성들이 관에 올린 소지(所志)의 내용을 국가에서 인정하여 주는 문서인 입안(立案), 가족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분재기(分財記), 간찰(簡札) 등으로 그 시대의 사회사(社會史)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사료들이다.

이와 같이 귀중한 사료들이 어느 한집안에서 어느 한 시대만이 아닌 450여년을 대를 이어오면서 고스란히 보존되어 왔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역사의식, 문화의식, 뿌리의식이 부족한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할 것이다.

최근에는 저북대학교 전경목(全炅穆) 교수가 이들 고문서들을 분석하여 우반동과 우반동김씨의 역사책 <우반동(愚磻洞)>을 저술하였는데 이 집안의 16.17세기의 인물 즉 축보와 개간사업으로 부를 이룬 김경순(金景順), 나주목사 김홍원(金弘遠), 평산부사를 지낸 김명렬(金命說), 진사 김수종(金守宗) 등 4대에 걸친 양반가문의 생활사를 복원하면서 이 마을의 생성사를 소상하게 밝혀 놓고 있다.

우동리 마을에는 이와 같은 양반계층의 귀중한 생활문화의 기록들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공동신앙체인 당산제와 그에 따른 제의(祭儀)놀이 또한 옛 형태 그대로 지금까지 잘 계승되어오고 있어 이 마을에 들어서면 타임머신에 의한 옛 시절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조상들의 정서와 슬기를 쉽게 접할 수 있어 정겨움을 주는 마을이다.

우동리(牛東里)마을의 원래 이름은 동변리(東邊里)였다. 저 유명한 실학(實學)의 태두(泰斗)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살았던 우반동(愚磻洞)마을의 동편의 끗자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의 이름이었는데 동변리란 명칭이 어느 때부터인가 우반동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의 우동리(愚東里)로 바뀌었다. 그런데 1914년 일제(日帝)가 이 땅을 강점하고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지명(地名) 중 획수가 많아 쓰기에 불편한 한자 지명들을 쓰기 쉬운 글자로 바꾸면서 아무런 뜻이 없는 획수가 적은 소우자(牛), 우동리(牛東里)로 고쳐버린 것이다.

모든 땅이름에는 반드시 어떤 뜻이 내포되어 생겨난다. 우동리도 우반동의 동쪽 마을이란 뜻으로 어리석을 우(愚) 자가 붙어 생겨난 이름인데 소우(牛) 자 우동리로 바꾸어버린 짓은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행위 중의 하나다. 이런 현상은 우리 부안지방에서만도 10여 곳이 되며 전국적으로는 수 천 군데에 이른다고 하니 원래의 이름을 찾아 복원하는 일도 시급한 일중의 하나다.

우동리마을이 부안김씨들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6게기 중반 당시 건선면(乾先面:지금의 줄포면)의 장동(壯洞)에 살았던 담양부사(潭陽府使) 김홍원(金弘遠)이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조부인 유성민(柳成民)으로부터 그의 6대조였던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인 우의정(右議政) 유관(柳寬)의 사패지지(賜牌之地)인 우동리 주변의 토지를 매입한 이후일 것이다. 1636년에 유형원의 조부 유성민과 김홍원 사이에 체결된 토지매매문서가 《부안김씨우반고문서》에 수록되어 있는데 반계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 문서를 보면 우반동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까지를 묘사되어 있어 토지매매의 문서라기보다는 서정(敍情)을 담은 한편의 수필과 같은 문장으로 되어 있다.

우동리 마을에 들어서면 우선 마을 앞 동구에 수백 년 된 당산나무가 무성하게 뻗어 있고 그 밑에는 입석(立石)과 오리 솟대가 함께 어우러져 동구수호(洞口守護)의 당산거리를 형성하고 있음과 만나게 된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의 남향 마을 형태로 마을 뒤 동북서는 망월봉 중고개재, 덕성봉, 남대봉, 노선봉들이 병풍처럼 드리워 있고, 남쪽은 훤하게 트이었으나 줄포만 기슭으로는 야트막한 천마산(天馬山)과 매봉이 엎드려 있으며, 그 밑이 바로 바다다. 앞마을 만화동 주변에는 네 기의 지석묘가 산재되어 있고, 그 사이로 곰소와 내소사, 띠목, 격포로 이어지는 변산을 감고 도는 해안 일주도로가 나 있다. 마을에서 동남으로 1km 쯤의 서낭댕이에는 옛 보안현(保安縣)의 성터인 희안성(希安城 : 씨안)터와 그 안에 저 유명한 유천리(柳川里)의 고려자기 도요지가 있다.

이 지역에서는 옛날 고려시대에 상감청자(象嵌靑瓷)를 비롯한 세계적인 명품의 자기(磁器)들 이 만들어진 곳이다. 우동마을 뒤 산기슭과 옆 마을 감불(坎佛)에서도 자기를 구웠다는 기록이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도 보이는데 「자기소일 재현남 감불리 품중(磁器所一 在縣南 坩佛里 品中)」이라 하여 “자기를 굽는 마을이 한 곳 있는데 현의 남쪽 감불마을이며 품질은 중급이다”하였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보안면의 서부지역은 고려시대 이후로 우리나라 도자기 공예의 명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동마을과 그 주변 일대는 먼 옛날부터 역사․문화의 활동이 활발하였던 현장이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뿌리의 자취나 유적 유물들이 소중하게 남아 있는 고장이다.


/김형주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글쓴날 :2006·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