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안당산제] “올해에도 마을의 모든 일을 잘 보살펴 주옵소서”

 

마을지킴이 신을 섬기는 민간신앙(7)

서문안당산제는 1978년까지 지내고는 끊겼다. 이 해의 음력 정월 초하루 밤에 향교꼴의 산신제(山神祭)도 향교 옆 삼메산(三山) 중턱에서 마지막으로 지내고는 끊겼는데 필자가 두 곳의 당산제의에 모두 참여하고 그 축문을 자료로 수거하여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서문안당제의 제일이 음력 정월 초하루 밤이므로 모든 제의의 준비는 섣달그믐까지 이루어지는데 그 준비는 당산지역의 주변 정화로부터 시작된다. 당제일 3일 전부터 솟대신간과 돌장승들의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 주변에 정황토(淨黃土)를 뿌려 정결한 성역임을 표시하며, 당산의 신간주에는 왼새끼에 백지 한 장씩을 끼워 감아 놓고, 길 양쪽에 영기(令旗) 한 쌍씩을 꽂아 부정한 잡인의 통행과 접근을 금지한다. 영기(令旗)란 농군(農軍)들의 군령(軍令)의 기로 검은 바탕에 붉은 글씨 영(令)자를 쓴 것인데 풍물패의 농기(農旗)로 사용되었다.

제일의 전날인 섣달 그믐날엔 주당산인 할아버지 당산의 신간석주 앞에 멍석 또는 포장을 둘러쳐 제막(祭幕)을 설치하고 백지에 「당산신위(堂山神位)」라 쓴 지방을 할아버지 당산의 신간주에 붙여 놓는다. 그리고 제관 등이 징을 치며, 마을의 고샅길을 누비며 「내일이 당산 제삿날이요, 애기 낳을 부인네는 어서 빨리 딴 마을로 옮기시오!」하고 외치고 다닌다. 이는 당산젯날 마을에 초상이 나거나 애기를 낳게 되면 부정한 일이 발생하였다 하여 당산제가 2월 초하루 영등날로 연기되고 제사비용 일체는 그 집에서 부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복잡한 규제와 금기사항들을 잘 지키며 경건한 자세로 새해를 맞은 성안 사람들은 집집마다 차례를 모시고 세배를 마친 다음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서문안 당산거리에서 풍물굿을 처 당산제의가 곧 행하여 질 것임을 알림과 동시에 동문안, 남문안의 풍물굿패들을 맞아 풍농의 용신기(龍神旗)인 용당기(龍塘旗)에 기세배(旗歲拜)도 주고받으면서 성안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을 축원하는 한바탕의 굿판을 벌리기도 한다. 이윽고 밤 10시경이면 주당산 앞에 설치한 제막 안에서 진설을 한다. 제물을 한 사람이 한 가지씩 나르는데 돼지머리, 백설기 떡, 삼색실과 건포, 나물, 밥, 국, 제주 등이다. 이때 할머니 당산이나 문지기장군인 돌장승 등의 하위격 당산 앞에는 간단한 음식상이 받혀질 뿐 별다른 제의 의식은 행하여지지 않는다.

제막의 안에서 행하여지는 제사에는 제관, 화주, 독축관 세 사람만이 들어가며, 제의의 순서는 분향, 참신, 헌작, 독축, 소지축원(燒紙祝願)의 순서인데 소지축원은 군수와 서장의 축원 소지로부터 시작하여 각 가정의 개별적인 축원을 제관이 대신 올려준다.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무오정월경자삭일일 동민감소고우 당산지신 금위세신 동중백사 유시보우 근이청작서수 지천우신 상향(維歲次 戊午正月庚子朔一日 洞民敢昭告于 堂山之神 今爲歲新 洞中百事 維時保佑 謹以淸酌庶羞 祗薦于神 尙饗)」

마을사람들이 당산신에게 바라는 축문의 뜻은 대체로 이런 뜻이다. 「새해를 맞아 마을 사람 모두가 삼가 바라옵건대 당산신께서는 올해에도 마을의 모든 일을 잘 보살피시어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주시기를 빌며 삼가 맑은 술을 올려 축원하옵니다.」

제차에 따른 당산제의가 모두 끝나면 제물은 다음날 오전에 집집마다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주어 음복을 모든 가정이 함께 하게 하였으니, 이는 마을의 수호신이 운감(殞感)한 음식물이므로 이를 나누어 먹으면 그 복된 영력 또한 모든 가정에 고루 미치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라 한다.

이와 같이 부안읍 성안 세 곳 당산제 중에서 서문안의 당산제의만이 정숙한 가운데 행하여지는 유교식 제의로 거행되고, 동구당산제(洞口堂山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축제적이고, 개방적인 놀이 의례가 없이 행하여졌음은 좀 특이한 제의의 형태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당산의 설치구조가 이중 또는 다중적(多重的)인 구조일 경우 웃당산격(상당산)인 당산제의는 대체로 산신제적(山神祭的)인 형식을 취하면서 매우 조용한 유교식 제의형태로 행하여지며, 따라서 줄다리기 등 놀이성의 제의 행사가 없거나 별도로 분리되어 대보름날 행하여지기도 한다.

서문안당산제의 놀이 행사는 본제의에서 분리되어 정월 대보름날 당산거리에서 남녀로 편을 갈라 놀이굿판으로 줄다리기 놀이를 벌렸으며, 그 용줄은 할아버지 당산의 신간에 감았다고 하는데 당산제의가 끊겼던 1970년대 후반 무렵에 이르러서는 그 흥겨웠던 줄다리기 놀이가 끊기더니 얼마 안 있어서는 당산제마저 끊어졌다.

이는 사회의 구조가 빠른 속도로 산업사회화 하여가는 경향도 있었지만 마을의 문화를 주도하여 왔던 청장년층이 대도시로 집중되면서 마을이 노령화하여 가기도 하고 또 박정희 군사정권이 유신(維新)을 내세워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을 전개하면서 전래의 기층문화 중 많은 무속적인 부분을 억압 또는 추방한 영향이 컷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형주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글쓴날 : 2005·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