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이끌어갈 대안 원효의 화쟁사상
우리는 우리 원래의 종교 선교(仙敎)에 바탕하여 불교·유교·기독교 등 숱한 종교를 받아들였다. 이중에서 불교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주로 귀족 중심의 통치자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불교를 일반국민에까지 퍼뜨린 으뜸가는 인물은 바로 원효대사(元曉)다. 그는 종교로서의 불교만이 아니라 국민을 가르치고 바르게 살게 하기 위한 정신세계의 도구로 삼아 전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전후한 격변기를 살았던 원효는 종파와 경전을 가지지 않고 모든 분야에 손을 댔다. 그리고 어느 한 학설을 고집하지 않았고 또 버리지도 않았다. 모든 학설을 나름대로 다루면서 개개의 다른 학설과 교리를 자기분열없이 종합하고 융화해서 하나의 사상체계 속에 담았다. 즉 여러 이론을 한 원리 속에 담아서 총화적·통일적인 불교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리도 통일지향성을 근본 원리와 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각론과 내용에 들어가서는 이 원리를 인류사회로 옮겨 화합과 통일이 깃들도록 했고 그 자신 몸소 전국을 돌며 민중 속으로 들어가 이를 실천해 갔다. 이론과 실천을 일원화시킨 것이다. 이런 자세를 그는 ‘화쟁(和諍)’이라 불렀다. 이 화쟁이야말로 그의 중심사상이요 생활신조였다. 그러다보니 그의 모든 저서나 행적도 이 화쟁을 줄기차게 뚫고 나가는 것이었다. 반면에 하나의 불교이면서 어느 종파니 무슨 학파니 하면서 서로 담을 쌓는 모습은 외면했다. 특정한 어느 경론과 종파를 끄집어 내지 않고 오로지 종합적인 ‘총화불교(總和佛敎)·통불교(通佛敎)’를 위해서 학문상으로나 실천상으로나 이끌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서론’이었다면 중국에 건너와 ‘각론’으로 발화하여 조선의 원효에 의해 비로소 ‘총론’으로 마무리되었다고들 말하며, 삼국으로 나뉘어졌던 민족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던 사상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가 지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1998년11월 21~24일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세계종교학회 정기학술회의에서는‘원효학연구발표회를 갖고 토론을 벌였다. 세계 종교학자 5천여 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원효스님의 화쟁(和諍)·원융회통(圓融會通) 사상이 분열과 혼돈이 갈수록 심화되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21세기를 이끌어 갈 대안 사상’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신(神)에 대한 유일사상에서 ‘신의 해체’를 과제로 안고 있는 미국 신학자들은 원융회통사상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렇듯 원효사상은 통일 등 오늘날 전반적 사회문제에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어 원효를 연구하는 각 학회와 연구원의 원효 사상에 대한 연구가 최근 들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변산에 온 원효
원효(617~686)는 진평왕 39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원효의 부친 설담날은 당시 신라 육두품으로서 관리의 열일곱 계급 중 열한번째인 내마(奈麻)의 지위에 있었다. 그리고 조부는 잉피공(仍皮公)이라 하여 널리 공경을 받은 사람이었다. 청년 원효는 화랑이 되어 출중한 문무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젊은 시절의 신라는 너무나 힘든 처지였다. 북에서는 고구려가, 서쪽에서는 백제가 쉴 사이없이 침공해 왔던 것이다.
전장을 누비던 원효는 전투에서 절친한 벗이 죽자 복수를 결심하며 통곡하던 중 지금까지 자신이 적군을 죽여 승리에 들떠 있을 때 상대편에서도 똑같이 복수의 칼을 갈며 애통해 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에다 어머니의 죽음, 방울스님의 가르침을 겪고 배우면서 진정한 삶의 진리를 구해보자는 생각도 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이차돈, 원광과 자장의 뒤를 이어 부처의 나라 신라를 더욱 평화스럽게 만들기 위한 길을 찾고자 결심하게 된다. 마침내 원효는 29살의 나이로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부처의 길에 나섰다.
출가 직후 그는 자신의 집을 절로 만들어 ‘초개사’라 부르고 도를 닦는 한편 설법도 부지런히 했다. 그러던 중 34살이 된 원효는 진덕여왕 4년 650년에 이르러 외국은 어떠한지를 살펴보고 보다 더 깊이 불교공부를 하기 위해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나라로 가려다가 국경선에서 고구려의 보초병에게 붙잡혀 간첩으로 오인되어 감금당했다가 한 달 가량 지난 후 겨우 풀려났다. 옥고를 겪은 이들은 그 길로 곧장 되돌아 왔다.
이후 그는 국내에서 공부도 하고 수도도 했다. 더러는 강단에 올라 설법도 했다. 그는 원래 워낙 설법을 잘했기 때문에 그 인기가 그야말로 높았다. 얼굴도 잘 생기고 화랑출신이라 기골은 장대했던 데다 목소리에 힘이 넘치고 그 내용이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가 설법을 할 때에는 임금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에서부터 무수한 신라인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설법을 경청했다. 또한 그는 <발심장(發心章)>이란 글을 지어 모두들 빨리 불도를 닦도록 권하기도 했다.
백제가 망한 이듬해인 661년 문무왕 원년에 45살이 된 원효는 의상과 더불어 다시금 당나라에 가고자 서해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수원 근처에서 며칠 동안 묵으면서 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밤 해골바가지에 괸 썩은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마음이 있으면 가지가지 일이 생기고, 마음이 없으면 가지가지 일도 없어지니,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나니라.” 즉 ‘모든 근본원리가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또렷또렷하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다. 내 마음 외에 그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일은 나로부터 출발시켜야 한다.’ 고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당나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미련 없이 홀로 서라벌로 되돌아 왔고 자기 스스로의 길로 나섰다. 그후 686년 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 동안 인간 구도의 길로 가는 처절하고도 험한 길을 걸었다. 형식과 규율을 싫어했던 원효는 요석공주와 파계하여 설총을 얻은 후 승복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낮추며 전쟁에 찌든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당시의 승려들은 주로 수도 경주의 대사원에서 호화생활을 누렸으나 원효는 전국을 돌며 전쟁으로 인한 참화로 갈가리 찟긴 민중의 마음을 어루어만지며 갈등과 증오를 차단하여 원융회통의 하나 되는 경지로 이끌었다.
676년 문무왕 16년에 마침내 당나라 군사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자 원효는 화엄종을 연 의상과 함께 3년간 처절하게 전투를 치르며 백제부흥운동을 벌인 중심지였던 변산으로 왔다. 개암사는 이 때 원효와 의상이 중건하였다고 <개암사지>에 전한다. 원효는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던 복신장군이 거처하던 암굴에서 수행에 정진하였으며, 개암사에는 수많은 백제 유민들이 원효의 설법을 들으려 몰려들었다. 원효는 이들에게 야단법석(野壇法席:야외에서 베푸는 강좌)를 차렸다.
원효는 힘에 의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이 하나로 뭉쳐졌지만 정서와 생활까지의 일체화에는 힘들고도 오랜 시일이 걸리기 마련이므로 삼국통일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를 지은 것도 삼국통일의 원리와 이념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법화경≫에 ‘부처님이 세 사람에게 각각 다르게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임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 셋은 모두 커다란 한 그릇에 담겨지는 것’이라고 씌어 있음을 찾아내고 주목했던 것이며 이를 널리 폄으로써 사상통일을 꾀하려 하였다. 즉,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다 일시적인 것이며, 보다 더 큰 한 그릇 속에 하나로 뭉쳐 합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되고야 만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셋이 하나로 되어진다는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이야말로 원효가 외친 삼국통일의 이념이었다.
이규보가 가 본 원효방
조선 중종 때 사람 심의(沈義)는 그의 한문소설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에서 조선의 천자(天子)에 최치원, 수상에 을지문덕, 좌상에 이제현, 우상에 이규보(1168~1241)를 내세워 조각을 단행했다. 중국에 사대의 예를 갖추어야 했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리라. 벼슬이 문하시랑에 올랐던 이규보는 살아서도 상국(相國)이었다. 그래서 그의 문집 이름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다. 이 문집에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란 기행문이 실려 있다. 이 일기는 그가 전주목 사록(司錄)으로 재직 중이던 시기에 쓴 것으로 변산을 비롯한 호남지방을 둘러 본 감상을 적고 있다.
천재 시인 이규보(1168고려 의종22~1241고종28)는 1189년에 사마시에 수석 합격했으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최씨 일가에게는 소외되어 벼슬을 하지 못하고 노장 철학을 넘나들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이 시기에 많은 시문과 역사 서사시 <동명왕편>을 짓기도 하였다. 자신의 빈한한 처지를 한탄하다가 마침내 그는 1197년 나이 30이 되어 최충헌에게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쓰고 1199년 12월에 전주목 사록(司錄)에 부임을 명받았다. 이후 1년 4개월간 임지에서 하급관리를 지내며 변산의 벌목책임자로 명받아 변산을 처음 오게 되었다. 이 시기의 경험을 그는 <남행월일기>에 기록해 두었다. 그러나 비방과 중상에 휘말려 이 마저 그만둔 그는 중앙에 올라와 또다시 어렵게 생활하다 당시 최고의 문사들이 참여한 한 시회에서 그 재능이 인정되어 최충헌 정권에 중용되었다. 그러던 중 1230년에 한 사건에 연루되어 부안의 위도에 유배되어 8개월 만에 풀려나기도 하였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그에게 벌목 책임을 맡아보라 하였으니 내심 못마땅할 법도 하다. 그의 변을 직접 들어보자.
12월에 조칙을 받들어 변산에서 나무 베는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변산이란 데는 우리나라의 재목창(材木倉)이다. 궁실을 짓고 고치느라 해마다 재목을 베어내지만, 아름드리 나무와 하늘을 찌를 듯한 거목들이 수두룩하다. 내가 벌목을 감독하고 있으니 나를 일러 작목사(斫木使)라고 한다. 내가 노상에서 장난 삼아 시를 지어보았다.
짐꾼에게 권세부리니
이 영화 어떠한고
벼슬은 나무 베기라
창피도 하구나
그러나 변산에 부임한 그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원효방과 부사의방장을 가보았던 것이다.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원효방과 부사의방장의 모습을 알아보자. 그는 부안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색적인 경험을 한다.
임진년 정월에 처음 변산에 들어가니 층층의 산봉우리, 겹겹의 묏부리들이 솟으락, 엎디락, 구불구불 질펀하여 머리며 꼬리가 어디 놓였는지, 팔쭉지와 뒤축이 어떻게 뻗었는지, 그리고 도대체 몇리(里)인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옆에 큰 바다가 굽어보이고, 바다 가운데는 군산섬, 고슴도치섬( 島), 비둘기섬(鳩島)이 있는데, 모두 아침 저녁으로 갈 수가 있다. 바닷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순풍을 얻어 쏜살같이 달려가면 중국이 멀지 않다.”고 한다.
산중에는 밤(栗)이 많아 이 고장 사람들이 해마다 양식의 일부를 삼는다고 한다. 얼마쯤 가니 아름다운 대숲이 총총히 삼(麻)처럼 서 있는데, 수백보 쯤마다 울타리로 막아 있었다. 대숲을 건너 질러서 바로 내려가니 평탄한 길이 있다. 여기에 보안(保安)이란 마을이 있다.
밀물이 들어올 때는 평탄한 길도 순식간에 바다가 되므로 조수가 들어오고 나감을 기다려 때를 잘 맞추어서 가야 한다. 내가 처음 갈 때에 조수가 한창 들어오는데, 아직 50보쯤 거리가 있어서 말에게 채찍을 쳐서 빨리 달려서 가려하니 종자가 깜짝 놀라며 급히 말린다. 내가 들은 채 않고 막 달렸더니 이윽고 조수가 쿵쾅거리며 휘몰아 들어오는데, 그 형세가 사뭇 만군(萬軍)이 달려오는 듯 장하고도 엄청나 심히 두려웠다. 내가 넋을 잃고 달려서 산으로 올라가 겨우 위기를 면하기는 했으나, 물은 거기까지 따라와서 바닷물은 말 있는 곳까지 와서 넘실거렸다.
바라보니 푸른 물길, 파란 산봉우리가 숨었다가 나타나고 그리고 들락날락, 청(晴)과 음(陰)의 교체, 아침 저녁의 경치가 각각 다르고, 구름과 노을이 붉으락 푸르락 그 위에 둥실 떠 있어, 아스라이 만첩 화병을 두른 듯, 눈을 들어 바라볼 때, 시를 잘 하는 두 셋의 친구들과 함께 가면서 이 좋은 경관을 시로 읊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그러나 만경(萬景)이 내 넋을 호들겨 주니 정서가 스스로 뒤흔들리어, 시를 지으려 하지 않아도 어느 틈에 술술 흘러나온다.
위 기록으로 보아 이규보는 썰물 때 드러난 개펄을 가로질러 보안에서 유천리 쪽으로 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지금 이곳은 육지로 변해 있다.
이규보는 원효방(元曉房)을 찾았다. 원효방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살았던 곳이라 전하는데 개암사 뒤 우진암 바위 중간에 있는 굴 속에 있었다. 암자가 있었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바위 아래에는 깨어진 기왓조각도 찾아볼 수 있다. 이규보가 남긴 일기를 통해 원효방의 모습을 더듬어 본다.
부령현의 사또인 이군(李君)과 다른 손(客) 6, 7명과 함께 원효방에 갔다.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층이나 되어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찬찬히 올라가니,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는 듯 했다. 듣건대 종종 호랑이와 표범이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분이 옛날 이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원효가 와서 살게 되니 사포가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다려서 원효에게 드리려 했으나 샘물이 없어서 딱하게 생각하던 중, 물이 갑자기 바위틈에서 솟아났는데, 그 맛이 매우 달아 마치 젖 같았다. 이로부터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여덟 자의 크기이다. 여기에 한 늙은 중이 거처하는데,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헤어진 누비옷에 도통한 얼굴이 고고하였다. 방 한 가운데를 막아 내외(內外)실로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진용을 모셨고, 외실에는 병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뿐 취사도구도 없고 시중 드는 사람도 없었다. 오직 소래사(蘇來寺)에 가서 하루에 한 재(齋)에 참예할 뿐이라고 한다.
위 기록에서 보듯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났다고 했는데 지금도 바위 아래 굴 안쪽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땅을 적시며 약간씩 흘러내릴 정도이며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다. 이를 원효샘 또는 유천(乳泉)이라고 한다.
/허정균(2005·12·08)